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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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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한 세상, 달콤하고 시큼해라

등록 2005-10-20 00:00 수정 2020-05-03 04:24

지난 여름 <한겨레21>에서 ‘바쁘다 바빠’를 외친 인턴기자 7인의 뒷담화
연예인과 농민, 주검을 만나고 독도와 홍대 앞을 종횡무진 누비며…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과의 만남

▣ 강나림 rubyshoe@empal.com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기자는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식상한 말이지만 그만큼 설레는 말도 없었다. 인턴기자도 기자 아닌가. 마음만은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인턴기자를 하면서 거지도, 대통령도 만나지 못했다. 두달 동안 내가 만난 이는 대한민국 인구의 0.0001%를 간신히 넘겼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거지와 사흘 밤낮을 동고동락한다거나 대통령과 점심식사를 함께 한다? 그건 기자가 아니어도 할 수 있고 기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걸.

나는 내 이름 석자 뒤에 ‘인턴기자’를 붙이고 다녔던 두달 동안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이들’을 만났다. 유난히 죽은 이를 대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부검 현장에서, 주검 위생처리 취재에서, 장례지도과 교수 인터뷰에서 나는 직·간접적으로 고인들과 만났다. 난 원래 공포영화라면 질색을 하고, 피가 튀기거나 살점이 찢기는 장면에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맨눈으로 죽음을 봤을 때는 오히려 두 눈을 더 크게 뜰 수 있었다.

내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편히 가시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는 세상의 싸늘한 시선이, 이별의 슬픔보다는 서러움의 눈물이 저승까지 따라갔던 분들이다. 병원비를 지급할 일가친척 하나 없어 장례를 못 치르는 어느 행려자, 본국으로 송환할 돈이 없어 영안실 냉장고에서 부패돼가는 어느 외국인 노동자 아저씨의 주검.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거지든 대통령이든 다 똑같다는 말, 거짓말이었다. 누구도 슬퍼해주지 않고, 전혀 엄숙하지 않으며,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죽음도 있었다.

난 그들한테서 많은 말을 들었다. 내가 봤던 이런저런 죽음은, 삶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이들’을 만났던 건, 4900만명의 삶을 접한 것만큼이나 가치 있었다. 그래서 ‘기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접었다. ‘거지부터 대통령까지’는 나중에 ‘인턴기자’가 아닌 ‘기자’가 된 다음으로 미뤘으니까.

인권이 아저씨와 바밤바를 먹다

▣ 박수진 lenne21@freechal.com

처음이었다. ‘연예인’과 대화를 나누다니. 부산 촌 출신인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연예인이라곤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서울로 대학을 온 2000년. 학교 앞에서 ‘이휘재’가 당시 유행하던 데이트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롱다리가 아니었지만 “어머, 웬일이야”를 연발하며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흘끔거리다 결국 사인 한장 부탁하지 못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던 고수도 마주쳤지만 매우 관심 많았던 속마음과는 달리 관심 없는 척했다. 내 심리를 나도 잘 모르겠으나, ‘팬과 스타’라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여겨지는 관계가 싫었나 보다.

그랬던 내가 TV에서나 볼 수 있던 스타 전인권을 만나다니. 인턴 생활 1주째였다. 예상외로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 인권이 아저씨는 스타일 좋은 가죽구두에 선글라스를 걸쳤다. 흠, 의상은 생각했던 대로구나. 그러나 인터뷰는 버라이어티 토크쇼였다. ‘오프 더 레코드’를 포함해 ‘예측불허 솔직대답’이 이어졌으니까. 인터뷰의 압권은 바밤바. 머리 손질을 위해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코디에게 인권이 아저씨가 부탁한 건 바밤바 10개. 사진기자까지 사람은 5명인데 바밤바는 10개였다. 결국 인권이 아저씨, “아침에 일어나 먹는 바밤바 맛이 끝내준다”며 앉은 자리에서 3개를 뚝딱 해치웠다.

기자는 취재원을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전달하는 것 같다. 간혹 어떤 취재원은 나를 무시했고, 어떤 취재원은 나를 가르치려 했다. 고발성 기사를 쓸 때는 어떻게든 정보를 빼내야 했고, 속마음을 듣고 싶은데 쉬이 털어놓지 않으려는 취재원과는 좀더 많은 시간을 두고 소통하고 싶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아주 가끔은 지나치게 나를 ‘기자님’이라며 대우해줘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만나고 싶어했던 스타의 부류해 속해 있던 전인권은 논란의 와중에 있으면서도 대화의 대상을 믿어주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자기 얘기를 털어놓아 기억에 남는다. 물론 나는 당시엔 ‘곁다리’로 따라간 ‘인턴기자’였지만, 인권이 아저씨는 내가 앞으로 한번 더 기자를 하게 된다면 인간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취재원을 여럿 만들며 기자 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해줬다.

면소재지 마을에서 유명인사 돼 버렸네

▣ 하어영 ha5090@dreamwiz.com

인턴 생활을 하면서 선배들의 실상을 과하게 지켜본 경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도 취재다. 조오련의 울릉도-독도 횡단 취재! 나는 팀장 선배의 지시로 공동취재단에 참여했다.

일간지, 스포츠지 기자 선배들, 인터넷 매체 선배들까지 구성은 참 다양했다. 내가 공동취재단에 합류했을 때 산소 같은 여자 선배들이 날치처럼 뛰어다니고, 활화산 같은 남자 선배들이 돌고래처럼 바다에 뛰어들어 취재하는 모습, 실시간으로 노트북을 펴놓고 조오련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며 이번 횡단의 역사적 의미라든지, 이 이벤트가 갖는 국가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논할 줄 알았다, 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울릉도에서의 첫날 밤 하나같이 “왜 기자가 되려고 하나?” “나 같으면 네 나이에 다른 거 한다”(이 말을 한 기자는 알고 보니 나보다 두살 어렸다) “기자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등의 악담을 늘어놨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기자가 되었나, 내 나이가 어때서, 좋은 시절이 과연 좋은 시절이었는가?” 등 그들에게 인턴답게 이야기했다, 라고 <한겨레21> 선배들에게 말했지만 사실 난 아무 말도 못했다. 다만 기자랍시고 옆에서 대우해주는 게 좋아서 인턴이라는 것 안 밝히고(물론 공동취재단에서 밝히지 말 것을 이야기한 탓도 있지만) 술 얻어먹고 배 터져라 울릉도 약소를 우겨넣었으며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렀다. 결국 나는 폭탄주와 약소를 내 몸에 안고 텅 빈 머리로 돌아와 독도 취재 기사를 완성하지 못했다. 신기한 것은 누구도 마감날 독도 취재 기사를 독촉하지 않았다는 것.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듣고 본 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이 기사의 뒷담화를 위해 마련된 의문이다.

P.S. 면소재지인 우리 마을에서 난 이미 유명인사다. 인턴과 수습을 구분 못하는(내가 논 가운데 모와 피를 구분 못하는 것처럼) 우리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수습기자가 되려 오늘도 난 도서관행이다. 여기까지. 독자들의 흥미를 절대 끌 수 없는, 철저하게 사적인, 절대 교훈적이지 않은 기사가 된 듯하다. 목적 달성이다. 읽느라 수고하셨다. 두달간의 비정규직 기자생활 뒷담화 끄~~읕!

A형 전갈자리 장녀의 ‘발랄 콤플렉스’

▣ 이혜온 eon2222@hanmail.net

인턴은 재기발랄해야 사랑받는다.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들은 어차피 선배 기자들이 훨씬 잘 쓰기에 어쭙잖게 욕심을 부리는 건 좋지 않다. 기획회의 시간, “이러이러한 문제에 대해 기사를 쓰고 싶다”고 다소 거창하지만 폼나는 주제를 말하면 “기사 검색해봤어? 1만5876개 정도 기사가 뜰걸? 그런 거 말고 뭐 좀 발랄한 기사 없나” 하고 바로 ‘킬’당하기 십상이다. 발랄하지 못한 게 스트레스였다. 생각이 발랄하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몸도 따라주지 못했다. 노래방에 가면 기껏해야 자우림 정도를 소화할 수 있는 나는, 보아의 댄스를 소화해내는 서른 중반의 김아무개 선배의 발랄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가기보다는 남들로부터 칭찬받기 위해 용쓰는, 한마디로 뚝심 없는 성격의 소유자인 터라 어떤 기사를 써야 발랄하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뜯기 일쑤였다. 발랄한 아이디어를 찾는 것은 포기하고 원래 취재계획서에 낸 데로 여성 농민에 대한 기사를 쓰기로 했다. 주변에선 걱정이 많았지만, ‘여성 농민은 언론에서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으니 내 기사는 비록 재미는 없지만 의미는 있을 것이다’는 사뭇 비장한 문제의식을 되새겼다.

기사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취재는 재밌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비장하게 여성 농민의 문제를 말하려 했던 나의 ‘발랄하지 못함’과는 다르게, 늦은 저녁으로 함께 감자탕을 먹으며 밤새 편집작업을 하며 들었던 언니들의 살아 있는 수다와 유머감각. 그들의 삶은 생생하고 발랄했다. 기사가 재미없었다면 그건 결코 ‘여성 농민’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기사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내 탓이다. 아이디어에 집착할 게 아니라 전달력을 기를 일이다.

발랄해지는 건 여전히 어렵다. 유머감각 없기로 소문난 ‘A형 전갈자리에 장녀’인 내가 과연 발랄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하나 깨달았다. 나는 발랄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발랄하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발랄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아이디어를 찾아헤맬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무서운 후유증, 팬레터의 선물일까

▣ 김다슬 pinkxanoc@hanmail.net

‘인턴 뒷담화’라니 참 난감하지만… 뒷담화는 사실 자신 있다. <한겨레21>에 출근한 첫날부터 아스라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날은 마감이 가까워진 시점이라 고경태 선배가 “오늘은 조용히 분위기를 파악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음, 편집장님은 정말 키가 크신데 머리는 잘 안 빗으시는 것 같다… 김소희 선배의 원피스는 정말 예쁘구나… 신윤동욱 선배는 왠지 생각했던 대로인걸….’

‘어영부영’과 ‘과부하’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생활 가운데서도 ‘모여라 친절한 야채 보양식들’ 취재를 생각하면 아직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그렇잖아도 기자란 무엇이든 직접 체험(?)해봐야 할진대 제대로 된 기자의 덕목을 실현할 찬스이니 놓칠 수 없지 않나. 결국 그 전날 밤에 벌건 눈을 하고 일필휘지로 기사를 마무리해놓은 뒤 사진촬영을 다녀왔다. 단호박 영양밥은 어찌나 달콤했던지…. 그러나 영화는 잠시. 전날 써놓은 16매짜리 기사는 시뻘건 피를 흘리며 난도질돼 있었고 전날 밤 고생했던 생각과 ‘2장짜리 기사 하나도 제대로 못 쓰다니. 난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류의 자책감에 빠져 무척 서러웠다. 단호박의 달콤함은 어디로 가고 오미자의 시금털털한 끝맛만이 입 안에 가득했더랬다.

사실 그렇게 한달 남짓 지낸 <한겨레21> 생활이 지금도 자주 그립다. 만화가 문하생으로 뛰어들어보기도 하고, 궁금했던 것들을 ‘바쁘다 바빠’ 소리지르며 취재해보기도 했으며 그중 실제로 기사화된 것들도 있었으니 참 행복했다. 스스로 팬레터라고 우기고 있는 ‘격려 메일’도 받았다. 요즘도 <한겨레21>을 넘기다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무심코 내 기사를 찾아보기까지 하니 아직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나저나 한달 전에 송고한 기사는 어떻게 된 걸까. 잘려나간 지 오래라는 심증은 들지만 아직도 기대는 하고 있다. 이러다가 뒷담화를 또 한번 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받아버린 흰 봉투에 바들바들 떨다

▣ 하정민 foolosophy@naver.com

그날 오전, 여의도엔 비가 내렸다. 한 취재원과 인터뷰를 마친 나는 탁자 위에 흰 봉투 하나를 놓고 황망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촌지였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 취재원이 봉투를 꺼냈다. 친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아 적던 와중에 돈봉투는 낯설고 난감했다. 아니,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넣어두라, 이러면 안 된다며 벌이기 시작한 승강이는 점점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릴 정도의 작은 소란으로 변했다. 결국 취재원은 “나중에 잡지나 한 부 보내달라”며 봉투를 던져놓고 나가버렸다. 급히 따라나가며 “정 그러면 우토로 모금 참여는 어떠냐”고 했더니 그건 싫단다. 맙소사. 결국 나는 옴쭉달싹 못하고 ‘취재 중 촌지를 받아버렸다’. 취재원을 상대하는 내내 단호한 척했지만 혼자 남게 되자 소심한 마음이 바들바들 떨렸다.

여름 내 인턴기자란 이름을 달고 돌아다니며 가장 짜릿했던 시간은 취재원에게 ‘합쇼체’로 질문을 던지며 입장과 사실의 조각을 찾아다니는 날들이었다. 특히 취재 중 “그러니까 이러이러하단 말씀이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을 때 취재원이 “예, 그렇죠”라고 답할 때, 제대로 소통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청량하던 인턴 생활에 불쑥 등장한 흰 봉투는 취재원과 기자의 관계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선을 긋고 벽을 세웠다.

가방 한구석에 대충 쑤셔넣었던 흰 봉투를 술에 취하거나 기사가 풀리지 않을 때 이따금 만지작거렸다. 봉투는 점점 너덜너덜해졌다. 천진했던 생각도 조금씩 변했다. 문득 술자리에서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쓸쓸함은 존재의 문제고, 외로움은 관계의 문제다. 관성에 젖은 기자가 되지 않으려면 가을처럼 쓸쓸해야 한다.”

인턴기자 딱지를 떼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비를 털어 <한겨레21> 한 권을 빠른 등기로 부친 일이다. 짧은 기간 일하면서 ‘촌지 사건’을 겪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겉봉에 풀칠을 했다. 잡지 사이에 너덜너덜해진 흰 봉투를 끼워넣은 채였다. 기자 지망생의 자리로 돌아가 시사상식을 외우면서라도 봉투는 종종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관계와 소통에 대한 기대감을 전부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참, 소주를 가득 부어주며 어쩌면 그냥 스쳐 지나갈지도 모를 인턴기자 앞에서 ‘쓸쓸’이나 ‘존재’ 같은 닭살 멘트를 서슴없이 날려주셨던 한겨레 선배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꾸벅.

인터뷰 하라니까 강산에 팬미팅하냐

▣ 오승훈 painbird76@nate.com

시차 적응을 못하고 어리버리하던 9월 초, 평소 살뜰한 격려로 후줄근한 일상에 칼 주름 잡아주던 선배 K가 말했다. 이번주 자기가 사람이야기 기사 하나 쓸래? (바쁜 척) 그래요? 누구 좀 없어? 음…(이 대목에선 뜸이 중요하다) 최근 라디오 진행을 맡은 강산에가 어떨까요? 프로그램 제목도 그답게 ‘디제이라고 말하기엔 좀 쑥스럽지만 강산에입니다’걸랑요(사실 ‘기자가 뛰어든 세상’에 연예인 매니저 기획안을 냈을 때부터 내심 강씨를 염두에 두고 있던 차였다). 각별한 애호를 숨긴 채, 불현듯을 가장한 강씨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성사됐다.

강산에! 자취방에서 라면으로 연명하던 20대의 봄날부터, 파전집 막걸리로 죽 때린 늙다리 복학생 때까지 내 인생의 허기를 달래준 그. 나는 그의 노래에 취해 시대를 관통했더랬다. <널 보고 있으면>을 사랑의 세레나데랍시고 수작을 건 게 몇번이며, <거꾸로 강을…>로 노래방에서 개폼을 잡은 게 몇번이더냐. 그를 직접 만나 인터뷰한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밤 11시께 홍익대 앞 연습실을 찾았다. 가난한 주머니였지만, 음료수와 주전부리를 사가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그와 캔맥주를 나누며 취중 인터뷰를 시작했다. 사실 인터뷰는 길게 잡아 30분이면 족했다. 지면이 작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와 30분 만에 헤어질 순 없는 노릇. 택시비·주전부리에 들인 돈이 얼마냐라는 기회비용의 문제는 제쳐놓고, 강산에가 아니던가.

질문 중간중간 어느 콘서트에 갔다, 이 노래는 어떻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냐는 둥 주접을 떨었다. 속에선 ‘인터뷰를 하라니까 팬미팅하냐 인간아’라는 자괴도 일었지만, ‘강산에가 아니던가’라는 항변을 이기진 못했다. 한번 만남으로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냐마는, 기자를 대할 때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참 편한 사람이었다. 그의 자유로움은 그의 편안함에서 나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더 코즈모폴리턴적이었다. 최근 일고 있는 반일 열풍이 그는 무섭다고 했다. 그와 인터뷰를 마친 시각은 1시가 다 되어 있었다. 다음에 술 한잔 하자는 그와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인터뷰 기사는 그와 나눈 대화의 1/20만이 실렸다. 그에겐 미안한 노릇이다. 결국 인터뷰를 가장한 팬미팅이었던 셈이다. 영걸이 형! 팬서비스라고 이해해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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