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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도 계속되는 전쟁

등록 2005-10-12 00:00 수정 2020-05-03 04:24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보듬는 첫 심포지엄
“이제는 만성질환자 된 피해자들의 치료와 재활 모델 개발돼야”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한국만큼 국가폭력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도 없을 듯하다.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후과다. 일제, 해방공간, 한국전쟁, 베트남 참전, 고문과 폭력이 함께한 민주화운동 과정을 겪은 3세대는 모두 이 증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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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자보다 유병률 더 높아

‘전선이 없는 전쟁’이라거나 ‘피아 구분이 없는 전쟁’으로 불리며 참전군인들의 정신적 피해가 극대화했던 베트남 참전 한국 군인들의 정신적 후유증을 보듬는 첫 시도가 이뤄졌다.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www.peacemuseum)가 10월7일 서울 중구 배재대 학술지원센터에서 연 ‘정신의학자가 본 전쟁의 상처’라는 이름의 심포지엄에서다.

이날 심포지엄은 3명의 정신의학자가 각각 △개인의 삶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정신적 후유증의 측면 △인체생리학적 측면에서 뇌에 미치는 영향 △사회심리학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분석했다. 먼저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전쟁을 겪은 인간은 전쟁 이전의 인간과 같은 인간일 수 없다’고 단언하는 정신의학자가 있을 정도로 전쟁이 주는 정신적 후유증은 크다”며 “전쟁이 주는 스트레스는 불가항력적·파국적 스트레스인데 그 본질은 ‘죽음 각인’”이라고 말했다. ‘죽음 각인’이란 죽음의 경험과 연합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로 한 인간에게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영구적인 내적 폭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5천여명의 아군과 4만여명의 적군이 죽어나가는 현장에 있었던 참전 군인들이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얘기다. ‘악몽과 환영 → 정신적·정서적 마비 상태 → 깊은 우울증’으로 점점 심해지는 정신적 후유증의 원인도 여기에서 비롯한다고 정 박사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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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진범수 박사는 전쟁의 상처가 뇌에 남기는 흔적을 분석했다. 그는 “PTSD를 겪는 병사들의 뇌를 살펴보면 전투 상황에 노출된 병사들은 특정한 호르몬 분비가 급증하거나 해마와 같은 뇌의 특정 부위가 위축되거나 손상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이들이 극도의 두려움·무력감·공포 등을 느끼는 것은 이런 뇌의 변화나 손상과 긴밀히 관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PTSD 유병률은 23%로 한국전쟁 참전자 8.8%보다 훨씬 높다”고 덧붙였다. 조중근 한림의대 교수는 “대부분의 만성질환이 그렇지만 PTSD 역시 만성화하면 치료가 쉽지 않다”면서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러 PTSD를 겪는 환자 모두가 만성질환자들이 되었지만 치료와 재활 모델이 개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헬기 소리만 들어도 놀란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참전 군인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68년 말부터 2년6개월 동안 참전했던 배정(71)씨는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정신적 후유증을 처음으로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무척 고맙고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비교적 전선에서 떨어진 공보장교와 민사장교 일을 했는데 나 역시 지금도 헬기 소리를 들으면 화들짝 놀란다”며 “증세가 심한 이들 가운데는 밤만 되면 지붕에 올라가 수류탄 투척한다면서 옆집에 돌을 던지는 이도 있었고 자기 자식을 베트콩으로 알고 찌른 사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사회를 맡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인간을 기준으로 전쟁 비용을 계산한다면 전쟁이 남긴 정신적 상흔이 가장 비싼 비용”이라며 “‘반공십자군’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공식 담론 뒤에 숨겨져 있던 ‘나 아파’ 하는 개인의 목소리에 우리 사회가 귀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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