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의 정치적 대타협 없이 ‘핵 포기→NPT 복귀→IAEA 사찰’은 먼 꿈
설사 핵 포기하더라도 미국이 북한의 경수로를 지원할 가능성은 200% 없다?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9·19 베이징 6자회담 공동성명에 ‘태풍의 눈’이 숨어 있다. 전문가들은 뭐니뭐니해도 북한 핵 포기 검증이 ‘난제 중의 난제’라고 입을 모은다. 6자회담의 미국쪽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얼마 전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우리는 숨바꼭질을 하고 싶지는 않다. 북한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것은 원치 않는다”며 “미국은 북한이 모든 시설을 밝히고 미국쪽 사찰단원에게도 접근을 허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공동성명에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검증이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11월 초로 예정된 5차 6자회담은 핵 검증 범위와 방법 등을 둘러싸고 4차 때보다 더 치열한 샅바싸움이 예고된다.
공동성명 제1항은 “6자회담의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어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안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Safeguard)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고 성명은 적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쪽 협상대표는 이 조항이 공동성명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NPT 복귀는 곧 IAEA의 사찰 수용으로 이어진다. NPT 제3조에 따르면 조약 당사자는 IAEA와 안전조처 협정을 체결하고 이 기구의 사찰을 허용해야 한다. NPT는 IAEA에 핵무기의 제조 및 무기 전용의 금지와 신고된 핵물질 및 시설에 대한 안전조치, 즉 사찰과 관련한 권한을 위임했다. IAEA는 사찰(정기, 임시, 특별)과 기록, 봉인, 감시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사찰, 북한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
그렇다면 무엇을 사찰하는 것일까. 공동성명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을 담고 있지만 북한이 생각하는 모든 핵무기와 계획은 미국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사찰을 받을 것이 있는 경우 사찰을 받는다는 입장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사찰받을 게 없다는 뜻으로도 비친다. 미국은 과거 핵뿐 아니라 북한이 비밀리에 농축 우라늄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나,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이 핵 사찰 범위에 농축 우라늄 계획을 포함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한 핵 포기 검증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우라늄 농축 핵 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어떻게든 입증해 보여야 하는 부시 정권과 예봉을 피하려는 북한 사이의 견해 차이를 좁히는 문제는 쉽지 않다.
사실 북한 지도부는 검증, 사찰 등의 용어에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북한은 사찰을 주권 침해 행위로 간주한다. 심지어 검증 명분의 사찰을 통해 정권을 뒤흔들려는 미국 등 서방 세계의 음모적 행위로까지 해석한다. 실제로 상대방 국가의 핵 관련 시설을 방문해 직접 확인하는 현장 사찰은 여러 검증 방법 가운데서도 주권 침해의 소지가 가장 크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북한은 과거 IAEA의 줄기찬 특별사찰 요구를 내정간섭이라고 거부해왔다. 검증은 받아들이는 나라의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찰은 조약 당사국들 사이에 어느 정도 신뢰가 축적된 뒤에 이뤄져야 성공적 이행을 기약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또 성공적 사찰 여부는 상대국의 체제 개방 정도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방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옛 소련은 폐쇄 체제를 유지하고 있을 때는 미국의 사찰 요구를 거부하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뒤에야 사찰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사찰을 통한 검증의 어려움을 짐작게 한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상호 불신이 존재하고, 북한의 개혁·개방이 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의 전면적 사찰 요구를 수용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핵 사찰은 당사국인 북한의 꾸준한 양보와 전폭적 협력 없이는 100% 검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북한뿐 아니라 과거 이라크나 이란 등 미국과 숙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일방적인 사찰 수용은 곧 정치적 굴복으로 읽힌다. 리비아는 핵무기를 모두 자진 신고한 뒤 미국에 백기투항한 바 있다. 한국도 사찰과 전혀 인연이 없는 게 아니다. 20년 전 일부 과학자들이 우라늄 농축·변환과 플루토늄 분리 실험을 한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난해 한국도 IAEA 사찰단의 무자비한 사찰을 받았다. 한국은 당시 국가적 차원에서 사찰에 전면 협조해 IAEA를 만족시켜 간신히 유엔 안보리 회부를 막았다. 상호 신뢰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가 9월18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북한 영변 5MW급 원자로의 지난 1월7일(왼쪽)과 4월7일 모습. 1월 사진에는 오른쪽 아래의 냉각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나, 4월 사진에서는 연기가 보이지 않아 가동이 중단됐음을 보여준다. (사진/ 연합)
사찰 하더라도 핵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북-미 사이는 다르다. 9·19 공동성명 채택 이후에도 두 나라는 상대방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할지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사이가 좋아질 리도 없다. 북한은 미국의 경수로 제공 약속 이행 여부를 신뢰의 척도로 삼고자 한다. 북한은 9월20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6자회담에서) 조-미 사이의 핵 문제 해결의 기초는 역사적으로 조성된 두 나라 사이의 불신을 청산하는 데 있으며, 서로의 신뢰 조성을 위한 물리적 기초는 다름 아닌 경수로 제공이라는 것을 명백히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이런 요구가 황당하다는 투다. 북한이 우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해체하고, NPT 복귀와 IAEA 안전조치를 준수한 이후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자세다. 즉, 미국은 북한의 핵 포기 조처 → NPT 복귀 → IAEA 사찰을 이른 시일 안에 받으라고 재촉한다.
이런 상호 불신 상태에서는 검증이 성공하기 어렵다. 더구나 북한의 과거 핵 활동을 규명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고백성사가 없는 한 아무리 강도 높은 사찰을 하더라도 과거 핵을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미국 외교협회의 찰스 퍼거슨 박사는 21일 <자유아시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과거에 얼마나 핵 물질을 생산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핵 시설과 장비에 대한 직접 조사와 핵 과학자 면담 등이 필요하지만 북한이 얼마나 협조할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핵 과학자들이 솔직히 대답해주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북한이 상당한 양의 핵 연료봉을 빼낸 사실도 핵 개발 계획의 행적을 알아내는 작업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핵 물질이 군사용으로 전용되는 것을 막으려면 전용되기 수주일 내지 수개월 이전에 이를 포착해야 한다. 북한은 이미 오래전에 핵 물질의 군사적 전용을 마무리했다는 게 통설이다. 따라서 북한 핵의 투명성을 증명하기 위한 기술적 측면에서의 기회는 이미 놓쳤다고 봐야 한다. 결국 미국도 북한의 신뢰를 받아야 성공적인 핵 해체와 검증이 가능해진다는 결론에 이른다.
북한이 경수로를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진정성을 시험해보는 제스처에 가깝다. 이는 사찰 수용의 대가와 맞물려 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이를 검증하는 데 협조하는 대가로 경수로를 요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미국의 신뢰성을 검증하려는 것 같다. 북한은 겉으로 경수로 제공을 요구하고 있지만 당장 시급한 전력을 경수로를 통해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경수로 건설은 보통 6~10년이 걸린다. 핵심 부품은 첨단전략 물자로 분류돼 있어 미국이 승인하지 않으면 북한에 들어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경수로에서 생산한 전력을 실제 활용하려면 주요 기업소나 가정에 전력을 송배전하기 위한 배관을 새로 깔아야 한다. 이 또한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요구한다. 실제 전력 혜택은 먼 훗날의 일인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 부시 정권은 북한에 경수로를 다시 지어줄 생각을 갖고 있을까. 워싱턴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 가운데 부시 행정부가 임기 안에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줄 것이라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 연구소장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미국이 북한의 경수로를 지원할 가능성은 200% 없다”고 잘라 말한다. 찰스 프리처드 전 미국 대북특사도 원칙적으로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워싱턴 내 진보파든 보수파든 어느 쪽도 경수로 제공에는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사찰을 통해 핵 투명성을 입증해 보여야만 북한은 미국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크리스토퍼 힐, 김정일을 설득할까
또 사찰은 새로운 문제를 낳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검증 과정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실제로 확인되거나, 예상보다 많은 양이 나올 경우 과연 미국은 어떻게 나올까. 부시 행정부는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했다가 별다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온갖 조롱을 받았다. 이들은 기존 주장과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북핵을 명예회복의 빌미로 삼아 북한을 압박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더구나 핵무기 보유를 빌미로 내친김에 미국을 불안하게 했던 장거리 미사일이나 생화학무기 사찰까지 요구하고 나설지 모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핵 폐기 사찰 방법도 논란거리다. 미국은 북한의 검증 가능한 핵 포기를 확인하려면 언제든 의심 지역을 사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 에너지부 산하 핵안전보장국(NNSA)의 폴 롱스워스 핵비확산정책 담당 부국장은 북한에 IAEA와 추가 핵 사찰 협정 체결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지난 7월21일 밝힌 바 있다. 그는 일본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핵 시설 불시 사찰을 상정하고 있는 추가 사찰은 IAEA 핵 안전보장 체제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하며 이런 계획은 북한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불시 사찰을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 군부는 사찰을 내정간섭, 나아가서는 미국의 정권 전복을 위한 정탐 행위를 합법화하는 행위로 인식한다. 군부의 자존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북한 지도부는 그야말로 숨 넘어가기 전에는 무차별한 사찰 수용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9·19 공동성명 1항에 따르면 한국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핵무기를 접수 및 배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재확인하고 자국 영토 내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사찰 조건의 하나로 남북한 동시 사찰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우리가 핵무기를 폐기한다고 해서 핵 없는 한반도가 보장되지 않는다. 핵 없는 한반도가 되려면 남한도 포함시켜야 한다. 부시 대통령은 남한에는 전술핵무기가 없다고 단언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가 필요하며 강력한 검증이 필요하다”며 “우리는 나아가 이 원칙을 동아시아로 확대해 일본의 검증 약속도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6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나 NPT에 복귀하고 IAEA 사찰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전 신뢰 구축을 전제로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북-미 관계 정상화를 근본적 해법으로 제시한다. 협상의 귀재라 불리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김 위원장도 미국쪽 최고위 인사를 초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핵으로 8년 내내 변죽만 울리는가
핵 문제는 북한 스스로 핵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야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 북-미 관계 정상화 등을 통해 북한의 안보 위협을 근원적으로 해소해줘야 핵 문제는 풀리는 셈이다. 서로 충분히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어설픈 검증은 미국 부시 정권에도 부담스럽다. 사찰이 순조롭게 성공적으로 이뤄지기도 힘든데다, 사찰 기간도 턱없이 길어질 우려가 있다. 부시의 남은 임기 안에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얘기다. 북핵 문제를 붙잡고 8년 내내 변죽만 울리다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정권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북-미 정상의 정치적 대타협을 통해 가능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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