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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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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뱅잉으론 성이 안 차더라

등록 2005-09-15 00:00 수정 2020-05-03 04:24

[90년대의 추억_인디문화]

너바나의 카피 밴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간 ‘드럭’
1995년 홍대 앞 로컬 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되고 있었다

▣ 김작가/ 음악평론가

‘클럽’이란 말도, ‘인디’란 말도 없었던 때다. 북산고가 전국대회에 진출해 런 앤드 건(Run & Gun) 전술로 무장한 풍전고와의 시합에 한창이던 1995년, 홍익대 앞과 신촌을 거점으로 암약하던 음악 애호가들은 몇 군데에 모여서 음악적 회포를 풀곤 했다. 1960~70년대 올드 록을 틀어주던 신촌의 ‘우드스톡’과 ‘도어스’ 같은 술집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잔을 부딪치는 밤이 있었고, 홍익대 앞의 백 스테이지에 하루 종일 처박혀 얼터너티브 뮤직비디오와 함께 무료하게 보내는 낮이 있었다. 수만원대의 ‘원판’을 사기 위해 단체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만 되면 음반 도매상이 밀집해 있던 청계천으로 몰려가 최신 라이선스 음반과 ‘빽판’을 두루두루 구매하는 게 LP 음반 시대의 마지막을 보내던 애호가들의 뮤직 라이프였다.

그 꼬마들은 ‘크라잉 넛’이었네

음반을 들으면 공연을 보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내한하는 해외 뮤지션들은 정말 한물가도 단단히 간 퇴물이어서 한국은 팝계의 양로원인가 싶은 생각이 들던 당시, 홍대와 신촌의 중간쯤 있던 ‘록 월드’라는 ‘곳’(그때는 클럽이란 말이 없었기에)에서 크래시의 공연을 보며 미친 듯이 헤드뱅잉을 했지만 뭔가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얼터너티브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집에서는 너바나의 <nevermind>를 틀어놓고 1년 전에 가버린 커트 코베인을 그리워했는데, 우리나라 어디서도 그런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는 없었다. 그러니 헤드뱅잉이라도 하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그러던 차에 ‘드럭’이라는 곳에서 너바나를 연주하는 밴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드럭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린데이의 <basket case>가 흐르는 가운데 옷을 희한하게 입은 덩치 큰 사람이 미친 듯이 괴상한 춤을 추고 커다란 구멍이 뚫린 벽에는 김일성 사망이 헤드라인으로 뽑힌 1994년 신문이 붙어 있었던 곳이다. ‘펑크 바’를 표방했던 그 한산한 술집에서 너바나의 카피 밴드가 있다니! 당장 달려갔다. ‘버거킹’이라는 이름의 밴드가 너바나의 <lithum>을 연주하고 있었고 쥐방울만 한 꼬마 네명이 섹스 피스톨스를 카피하고 있었다. 헤비메탈 밴드들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는 연주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몇 안 되는 관객들은 헤드뱅잉 대신 서로 몸을 부딪치며 슬램을 벌였고 조야한 음질로 뿜어나오는 너바나와 섹스 피스톨스의 히트곡 퍼레이드를 따라 부르며 숨을 헐떡거렸다.
섹스 피스톨스를 카피하던 네 꼬마는 ‘크라잉 넛’이었다. 버거킹은 후일 ‘코코어’로 이름을 바꿨다. 아무도 그들이 10년 동안이나 계속 음악을 할 줄 몰랐다. 나도 10년 동안이나 홍대 앞에 머물게 될지 몰랐다. 1년 뒤 <슬램덩크>가 북산고와 산왕공고의 대결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끝날 줄 몰랐듯이. 1995년, 홍대 앞 로컬 신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냥 즐기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lithum></basket></never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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