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명이 희생된 20세기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센인 학살은 이제서야 조명
한국전쟁 뒤인 1957년 8월 민간인들에 의해 벌어진 비토섬 사건은 잔혹의 결정판
▣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해방에서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해방 8년사’(1945~53)는 집단 학살로 점철된 ‘광기의 역사’였다. 전문가들은 이 기간에 남한에서만 100만명 가까운 민간인들이 국군·인민군·미군·경찰·서북청년단과 같은 비정규 부대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센인 학살은 그 끔찍한 ‘광기’ 속에서 주목받지 못한 마지막 한 페이지일 것이다.
한센인 학살의 세가지 유형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는 “한국 현대사에는 두 가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친일파 청산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인 학살이었다”고 말했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대거 충원된 한국군은 일본군이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던 작전을 그대로 답습해 공비를 토벌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게 마련인 민간인 희생은 애초부터 예정돼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제는 간도를 포함한 만주 전역에서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을 박멸하는 과정에서 ‘비민분리’(匪民分離)에 기초한 집단부락 정책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비민분리’란 물에 해당하는 주민들을 뿔뿔이 흩어 유격대인 물고기를 잡는 전술을 뜻한다. 이는 지리산 일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을 일으킨 11사단(사단장 최덕신)의 ‘견벽청야’ 작전으로 계승됐다. 견벽청야의 사전적인 뜻은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들인다”는 것이지만, 실전에서는 공비가 숨쉴 수 있는 산간 민간인들의 학살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함평·거창 등에서 민간인 700여명을 죽인 거창양민사건이 발생했다.
민간인 학살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김창룡·김석원·김종원 등은 일본군 장교·하사관 출신이다. 그들은 친일파라는 원죄를 ‘빨갱이’의 피를 흘려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여순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종원이 잔혹하게 휘둘렀다는 일본도는 친일에서 민간인 학살로 이어지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가장 잔혹하고 야비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제주 4·3 민주화 항쟁과 여순반란 등 친일파들의 좌익 학살로 시작된 학살의 ‘전통’은 전쟁 이후 걷잡을 수 없이 확대재생산된다. 좌익 세력을 통제하고 회유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원 20만~30만명이 전쟁 직후 학살됐고, 그로부터 잉태된 증오는 이후 거듭된 보복 학살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 밖에 대전형무소 등 형무소 수감자의 집단 학살, 피난민, 부역 혐의자, 공비 또는 통비 혐의자 학살 등이 이어지며 “통비라는 불확실한 혐의로 순경이 일가족을 총살하고, 제2국민병 안 나온다고 죽이고, 소집 불응에 죽이고, 그 어머니까지 밥을 잘 못해준다고 사살”(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는 어처구니없는 학살의 역사를 ‘꽃’피웠다.
그렇지만 민간인 학살과 한센인 학살의 논리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해방 이후 벌어진 한센인 학살 사건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해방 이후 혼란 과정에서 터진 소록도 ‘84인 학살’이다. 이때의 학살은 좌우 대립의 결과가 아닌, 섬의 치안부재 상태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것이었다.
성한 사람 300여명이 습격해 28명 죽여
두 번째는 한국전쟁 가운데 한센인들이 좌익으로 몰려 숨진 사건이다. 이 사건들은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았을 뿐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피해 집계에 나서고 있지만 외부 사회와 격리된 한센인의 특성상 사건의 전말이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데다, 사건을 직접 체험한 대부분의 1세대가 이미 숨을 거둬 진상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센인을 둘러싼 가장 잔혹한 학살의 기억은 전쟁 이후 민간인들에 의한 자발적인 학살이다. 1957년 8월28일, 경남 사천시 비토섬에서 발생한 28인 학살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6·25 전란을 피해 삼천포(현재 사천)로 내려온 한센인 40여명이 1950년 비토섬에서 남동쪽으로 3km 떨어진 경남 사천군 실안동 일대 해안에 영복농원을 세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구가 200명으로 늘었고, 한센인들은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마을 앞바다에 떠 있는 섬으로 가서 개간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만 정확히 8일 뒤 섬 주민들과 바다 건너 서포면 사람 300여명이 한센인들을 습격해 28명이 죽고 70명이 다쳤다. 영복농원 이장 지명석(68)씨는 “비토섬 사건은 말 그대로 성한 사람이 한센인들을 이유 없이 죽인 집단 살인이었다”며 “가해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지금까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제 와서 그때 가해자들의 책임을 묻고 싶진 않다”며 “사고가 터졌던 곳에 위령비라도 세웠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움직임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정부는 지난 5월31일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을 통해 올해 12월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로 했다. 법은 아직 시행조차 되지 않았지만 국회의원 62명은 지난 6월29일 “이 법으로는 제대로 된 과거사 정리를 할 수 없다”며 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한센인 학살 사건과 관련해서는 김춘진 열린우리당 의원이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준비하고 있지만 “지원폭이 넓어져야 한다”는 한센인들의 반발로 입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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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센인들의 고통스런 삶이 시작된 것은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일본 정부가 해방 이전 한국 한센인들에게 입힌 피해 보상을 청구하는 ‘일제 강점기 소록도 재원자 보상 청구소송’을 이끌고 있는 일본 변호사 도쿠다 야스유키(61)는 “한센 병력자들이 그동안 편견과 차별을 받게 된 원인은 일제의 강제 격리 정책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 한센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 조사를 통해 발굴된 학살 사건을 제외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한센인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철저히 ‘방치’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일본은 1996년까지 한센인들을 철저히 격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격리보다는 인도적인 ‘보호’에 방점을 찍었다. 한국 정부는 1963년 ‘강제 격리’ 제도를 폐지해 한센인들을 정착촌으로 뿔뿔이 흩었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는 “얼핏 보면 강제 격리 제도의 폐지는 일본보다 진일보한 정책으로 보이지만, 이는 정부가 관리 책임을 포기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격리 제도 폐지 이후 한센인들은 완충 지대 없이 사회의 차별과 맞닥뜨렸다. 그 범위는 취업에서 2세 교육까지 삶의 모든 부분이었다. 우홍선 한빛복지협회 본부장은 “소록도·재가환자·정착촌 주민·2세 등 한센인과 그 가족들의 이해가 저마다 첨예하게 엇갈려 모두를 만족시키는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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