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 신척리의 세 농부가 털어놓는 ‘농사 짓는 맛이 사라진 사연’
팔 곳 없는 ‘생산의 무정부 상태’에 놓인 쌀과 과수들 “풍년 기근이 두렵다"
▣ 진천=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신경림 시인은 ‘파장’(罷場)을 노래하면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이 발효된 이후 10년이 지난 농촌에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노래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시장’이 농촌까지 휩쓸면서 농심은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다. “올해는 또 무슨 작물을 얼마나 심어야 하는 걸까?” “농가 빚은 어떻게 할까?” “남들 안 하는 작물을 해야 제값 받고 팔 수 있는데….” “다른 작물이 망해야 내 작물이 사는데….”
지난 8월11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신척리. ‘해방촌’으로 불리는 이 마을은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농가는 몇 안 되지만 논에 항상 물이 풍부한 구레논(수렁논)이라서 차지고 맛 좋은 ‘생거(生居)진천쌀’이 나온다는 곳이다. 오후 들어 여름비가 그치자 산 허리쪽으로 푸르스름한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해가 구름 사이로 비껴나올 때마다 농촌의 여름빛이 반짝, 빛났다. 셋은 나무에 걸터앉아 고추 몇개에다 막걸리로 술추렴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기수(47)·유조성(52)·김주성(52)씨. 모두 이 마을에서 20년 넘게 농사짓고 있는 사람들이다. 박씨는 비닐하우스 수박, 유씨는 사과, 김씨는 쌀농사를 짓고 있다.
“저기 봐. 쌀농사 짓다 소득을 못 올려 지난해부터 다 때려치우고 논에 비닐하우스 씌워 전부 수박 농사를 짓고 있잖여. 근데 올해 수박금도 떨어지고, 또 별 재미 못 보고 있어.” 산 아래쪽에 펼쳐진 논을 고개짓으로 가리키며 김씨가 말했다. 시원하고 푸른 논들 사이로, UR 이후 농촌에 대규모로 들어선 하얀 비닐하우스가 다소 볼썽사납게 들어서 있었다. “산물이 풍부하고 시장이 성했다” 해서 붙여진 ‘살아서 진천’의 농민들은 “당최 농사짓는 맛이 없어졌다”고 한숨지었다.
“지원도 쌀금 떨어지면 다 헛것이야"
“1ha에 60만원을 쌀소득직불제로 주고 있는데, 그러면 뭐해. 1ha에서 쌀 100가마 짓는다고 할 때 가마당 3만원만 쌀금(쌀값)이 떨어져도 300만원이나 소득이 줄잖아. 이제는 마땅히 쌀을 팔 곳도 없고….” 김주성씨가 탄식처럼 말했다. “예전에는 수확하면 쌀 등급도 올라가고 쌀 수매도 있어서 농사짓는 맛이 있었지. 근데 지금은 팔아먹을 데를 확보해놓지 않으면 아무리 농사 많이 지어도 소용없어. 올해부터는 쌀 수매도 끊어졌잖아.”
김씨의 쌀 경작 규모는 5ha(1만5천평)로 제법 대농 축에 속한다. “여기서 50년 넘게 농사짓고 살았어. 논 1만평이면 옛날에 어머어마한 농사였는데 지금은 별것 아니야. 10년 전만 해도 쌀금이 좋아서 돈도 쓰고 생활도 할 수 있었지. 쌀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그때는 1등급 최고 가격으로 팔았지.” 그러나 그럭저럭 ‘살만했던 옛날’은 벌써 아득하기만 하다. 김씨는 1995년에 2만평 쌀 농사를 지어서 5천만원 정도 소득을 올렸는데, 2000년에는 4천만원 정도로 줄었고 올해는 3500만원 정도로 더 떨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연방 담배만 피워물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사과 농사를 짓는 유조성씨가 입을 열었다. “수입 과일이 넘쳐나면서 과일 시장은 다 무너졌어. 한-칠레 협정 이후 포도 농가는 폐작하면 정부에서 생산 조정 차원에서 지원비를 주고, 사과와 배도 농사 그만두면 어느 정도 지원해준다는데 자식같이 키운 과수나무들을 어떻게 베어낼 수 있나?” 유씨는 “예전에는 1천평 과수 농사만 지어도 먹고살 만했는데, 지금은 5천평을 지어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엄청나게 들어가는 시설투자비 때문이라고 했다.
2천평 정도 수박 시설재배를 하고 있는, 몸빼 차림의 박기수씨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킨 뒤 설명을 보탰다. “파이프며 비닐이며 농자재값이 그동안 끊임없이 올랐어. 노지 재배든 비닐하우스든 밭작물이든 죄다 경영비가 몇배씩 뛰었거든. 농업 개방에 대비해 국제경쟁력을 갖춘다고 다들 유리 온실과 비닐하우스 시설을 갖추는 데 엄청나게 투자했는데, 정부가 투자금 절반을 보조해줬지만 시설비가 워낙 커서 자기가 빌린 농협 대출이자도 엄청나. 경쟁력을 갖추기도 전에 수입 농산물이 막 들어오는 중이고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이제는 농산물 가격 지지도 포기하고 소득직불제로 해보겠다는데, 그래 가지고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 수 있겠어요?” 박씨는 또 “예전에는 농토를 두고 몸만 떠났지만 지금은 농토까지 다 외지인들한테 팔고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 호남평야에서 1마지기(150평) 쌀 소출량은 80kg들이 세 가마였다. 비록 임차농이라 해도 이 중 한 가마는 영농비, 한 가마는 땅 임차료로 쓰고, 나머지 한 가마가 수익으로 남았다. 이처럼 쌀은 다른 작물에 비해 거저먹는다고 할 정도로 수익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농산물은 물론이고 쌀 역시 “시장에서 과연 팔릴 것인가”를 걱정해야 하는 ‘생산의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우박이 와도 높은 산을 돌아서 인근 괴산, 음성에 가서 떨어지지 살기 좋은 진천은 비켜간다’고 했지만, 수입개방 앞에서는 진천이라고해서 여느 농촌과 다를 수 없었다.
“쌀에서 사과, 수박 계속 바뀌었지…"
유씨는 1993년 약 3천평 규모로 사과나무를 심었다. UR 협상이 시작되면서 쌀시장 개방 이야기가 농촌을 뒤흔들던 때였다. 당시 생활 수준 향상으로 과일 수요가 늘긴 했지만, 쌀값이 폭락할 것이라는 말이 뒤숭숭하게 떠돌던 때라 많은 농가들이 과수 재배에 뛰어들었다. 돌실사과 나무가 자랄 때까지 4∼5년간은 수확을 못 봤고, 1997년에 2천만∼3천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 뒤 규모화해야 살아남는다고 해서 사과 재배 면적을 7천평으로 더 늘렸다. 그럼에도 유씨의 농가경제 손익계산서는 여전히 2천만∼3천만원 그대로다. 과수 재배 농가가 급격히 늘어난 탓에 수확을 봤을 때는 이미 사과 생산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배는 농사짓기도 편해서 한창 인기를 끌었고, 사과는 병해충에 취약하고 농사짓기 까다로워 생산이 별로 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과값이 비싸질 거라고 해서 면적을 늘렸는데 이제는 사과 생산이 너무 늘어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유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산 과잉도 문제지만, 사과값은 포도·오렌지 등 수입 과일이 대거 들어오면서 수요 대체로 인해 더 떨어지고 있다.
과수는 2000년부터 농업소득이 가장 많이 떨어지고 있는 작물이다. 진천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진천의 사과 재배 면적은 1990년대 초 300ha에서 최근 80ha로 큰폭으로 줄었다. 그만큼 농사지어봤자 별 재미를 못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배값이 좋은 것도 아니다. 농촌 전역에서 배 생산이 늘면서 배값은 UR 이후 사상 최초로 사과값보다 더 싸지기도 했다. 과수는 다른 과일과의 수요 대체가 심해 농가들이 저마다 돈이 되는 작물을 예상해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다. 다른 과일이 망해야 상대적으로 자신이 재배한 작물값이 오르는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이것이 농민시위말고도 지난 10년간 농민들의 또다른 싸움의 기록이었다. “조류독감·광우병을 피해 살아남는 축산 농가는 굉장히 비싸게 팔아먹잖여.” 김씨가 한마디 보탰다. “쌀금이 시원찮은 지난해만 해도 다들 자기 논에 비닐하우스 세워 수박 재배에 달려들었지. 그러다 보니 수박도 올해 너무 많이 생산되고 말았어. ‘어디 절단나는 곳 없나? 그러면 내 작물값이 오를 텐테’,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는 농민이 우리 현실이야.”
요즘 농촌에서는 경매 물건으로 나온 20억∼30억원짜리 유리 온실을 헐값에 인수하려고 농민들이 줄 서는 풍경도 빚어지고 있다. 유리 온실 농가가 대출금 5억원 정도를 못 갚고 몇번 연체하면 농협이 경매에 넘기곤 하는데 30억원짜리 유리 온실을 경매가격 7억원 정도에 붙잡겠다는 것이다. 오이·토마토·장미 등을 재배하려고 유리 온실에 대규모 투자했다가 실패한 농민은 워낙 농가 부채가 많아서 “빚이고 뭐고 도저히 못 갚겠다”며 결국 두손 들고 다 털어버리고 만다. 진천군에서 유리 온실을 하며 파프리카를 재배하는 정영식씨는 “유리 온실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거기에 들어간 정부 융자금도 다 날아가는데, 다른 농가의 실패를 기회 삼아 유리 온실을 싼값에 인수해 돈 벌 기회를 노리는 농민들이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풍년 기근이야, 흉년이 낫겠어"
“쌀 수매도 끊기고, 대체 누가 농지 사서 더 짓겠다고 하겠어? 외국산은 들어오지 농사 지어도 앞은 캄캄하지, 알면서 누가 짓느냐고. 나도 쌀 농지 1ha를 하는 수 없이 남들한테 빌려줬어. 거기서 다른 농가가 수박 1ha를 짓고 있는데, 농토 붙잡고 지어봐야 뭐하나. 소득도 없고 적자만 나는 판국인데….” 김씨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풍년 기근이야. 쌀 생산량은 늘어도 늘어난 만큼 가격이 또 떨어지잖아. 생산이 늘어난 것보다 쌀금 떨어진 피해가 더 커. 오히려 흉년이 들 때보다 못하다는 말도 있어.”
김씨는 그 전날 1ha에서 수확한 쌀 52가마를 방아찧었다. 15년 전에 1ha면 쌀값 1200만원은 받았는데, 지금은 소출이 1ha 90가마에서 120가마로 늘었음에도 소득은 900만원에도 못 미친다. “300만원 차이가 아니야. 인건비, 기계값, 비료값 다 배 이상 올랐어. 애들 등록금 내고 나면 끝이야.” 그런데 방앗간에서 900만원이라도 맞춰줄 수 있을지 전혀 알 수없다. “방앗간 주인이 가마당 16만5천원에 쌀을 낼(팔) 수 있을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합디다. 수확이 늘어도 수지가 안 맞아. 차라리 흉년 들어서 쌀가격이 오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유씨도 농산물 가격은 떨어지는데 물가는 계속 올라 어떻게 빚을 갚을 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농산물 금(가격)은 한정돼 있고 물가는 오르고, 1년 농사지어 3천만∼4천만원 소득 올려도 애들 학비, 하숙비 오르고 그래서 1년 쓰는 게 3천만원이 넘어. 도대체 어떻게 저축하고 빚을 갚을 수 있겠어.” 말을 이어받은 박씨는 도시 소비자만 좋고 농민은 계속 희생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UR 이후 그동안 농업에 42조원, 농어촌에 15조원, 그리고 앞으로 119조원을 쏟아붓는다는데 그렇게 해서 생산성을 높여봤자 농민들은 전혀 소득이 늘어나지 않잖아요. 그 돈의 혜택은 농산물값이 싸져 전부 소비자들한테 가버리고, 농가 지갑으로 들어온 게 있습니까?” 농가들은 농사지어 돈 좀 만지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고, 자녀 교육이라도 어떻게 시킬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먹고 살만하면 고속도로 시위 안가"
UR 이후 10년, 농민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비록 죽창은 사라졌지만, 칠순 노인들이 삽자루 놓고 여의도까지 먼 길을 달려와 볏가마에 불지르고 고속도로를 점거한 채 소떼와 경운기를 몰고 시위하는 풍경은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박씨는 이를 “농촌에 사는 죄”라고 말했다. 세 농가 모두 “빚 얻어 생활하는 ‘마이너스 인생’”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농민 시위라면 빼놓지 않고 참가하는 피끓는 농민들이다. “내 참, 고속도로에 앉아 담배 피워본 것도 처음이야.” 유씨가 말했다. “하도 답답하니 그러지. 시위에 가보면 다 노인들인데 오죽하면 칠순 노인들이 그러겠어.” 김씨가 끌끌 혀를 찼다.
사실 나이가 많다고 일이 바쁘다고 집회에 빠지면 갈 사람이 없는 게 농촌이다. 여기 마을 농가들은 모두 다 시위에 참가하느냐는 물음에 김씨가 다소 시큰둥하게 받았다. “물려받은 것이 많은, 그런 대로 사는 농가는 시위에도 안 나가. 시위 나가는 우리한테 ‘너희는 미친놈’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뭘.” 시위에 나가는 농가 대신 집을 지켜주고 개 밥도 먹여주던 마을공동체도 농촌 사회 내부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이제 갈등이 싹트고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동네 일손도 많아서 새벽에 다 같이 타작도 하고 품앗이로 농사도 지었지. 지금은 다 기계화됐어. 농기계 가진 농가들은 기름값 올랐다고, 농기계는 샀는데 제대로 써먹지도 못해 히고 있다면서 이용료를 더 받으려 하고, 그래서 서로 얼굴 붉히는 일도 있지.”
사실 UR 이후 기업농 육성 및 규모화가 진행되면서 농민층도 2∼3ha 규모의 중농 층이 분해되고 0.5ha 미만의 영세 소농과 5ha 이상의 대농으로 갈리면서 농촌 사회의 내부 격차도 커지고 있다. “내가 이 마을 막내”라고 했던 박씨는 “예전에는 1섬(20마지기·4천평) 농사면 부자였는데 지금은 100마지기(2만평) 지어도 부자 소리 못 듣는다. 우리 농촌은 ‘자연 경로당’이 된 지 오래다. 규모화를 이룬 농가와 그렇지 못한 농가간의 소득 차이도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농어민국민연금에 아직 가입하지 못했다는 박씨가 나섰다. “정부에서 농민은 보험료 절반을 지원해준다니까 다른 농가들은 국민연금도 가입하는데, 나 같은 사람은 지원해준다 해도 우선 먹고살기 힘든데 다달이 낼 보험료가 어딨어?”
“누가 올해를 알어. 그냥 짓는거지 뭐"
박씨는 임차농으로 쌀 50마지기를 농사짓다가 쌀값이 떨어져 수지타산이 안 맞자 1996년부터 밭작물로 전환해 고추를 심었다. 그러나 고추값도 등락이 심해서 소득이 늘 불안정했다. 그래서 수박 시설재배로 다시 바꿨다. “농민은 소득을 좇아갈 수밖에 없어요. 올해 농사 결단날지 어떨지 누가 알겠어.” 진천군에는 논농사 짓다가 논을 갈아엎고 비닐하우스로 바꿔 장미 재배에 나서기도 하고, 이것도 안 되자 다시 논농사로 돌아서기도 한다. 이제는 추곡 수매가 없어진다고 하자 다시 논을 갈아엎고 비닐하우스 오이 재배로 바꾸는 농가도 늘고 있다. 특히 예전에는 대개 복합영농을 했기 때문에 쌀에서 피해보면 다른 작물에서 소득을 올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들 한 작물만 재배하는 단작화로 돌아선 터라 소득 불안이 더 커졌다.
“규모화해야 산다고 하면서 정부가 절반 정도 돈을 지원해주니까 투자는 해놨는데 어쩌겠어. 버릴 수도 없고, 이제 죽으나 사나 농사를 지어야지. 다 포기하고 서울 간다고 직장이나 있나? 자식들한테 용돈을 받기는커녕 대처로 나간 애들도 회사에서 해고되고 우리가 땅 팔아 자식 대주기도 바빠.” 김씨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김씨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우리야 텁텁한 막걸리 한잔 먹으면서 옛날 얘기하고 선거 얘기, 농사 얘기하는 거지 뭐 별것 있나. 아가씨 나오는 다방 물장사만 잘된다는데….” 김씨의 구릿빛 얼굴에 엷은 웃음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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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농산물 가격 하락은 흔히 말하듯 수입개방 때문일까? 아니면 정부의 농업 부문 대규모 투·융자에 따라 과잉 생산이 촉발됐기 때문일까?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정부는 42조원의 막대한 투융자금을 농업생산 기반 자금으로 투입했고, 이와 별도로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15조원을 농어촌 구조개선 자금으로 추가 투입했다. 그러다 보니 “강아지도 농촌에서 1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거나 “먼저 시설하우스 짓고 농기계 사들여 정부로부터 보조금과 저리 융자금을 받으면 다 내 돈”이라는 말도 퍼졌다. 그만큼 농민들은 정부의 투자금을 눈먼 돈으로 여겼고, 수익성도 따지지 않은 채 비닐하우스든 유리 온실이든 앞다퉈 만들고 농기계도 사들였다. UR 이후 수입개방에 대비해 생산기반을 확충한다는 정책에 따라 개별 농가들의 농업 투자가 늘면서 자연히 농산물 생산량이 대폭 증가한 것이다. 농촌경제연구원 박준식 연구위원은 “생산에서 국내 농산물 공급이 대폭 늘어난데다 개방까지 닥치면서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다”며 “비록 생산은 늘어도 가격은 떨어지고, 농업경영비가 크게 오른데다 농가 부채가 늘면서 이자비용도 늘어 농가의 소득이 떨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농촌경제연구원 김정호 연구위원은 “1995년부터 2002년까지 국내 농산물 가격 하락 요인을 따져본 결과, 수입 증가가 20%인 반면 국내 생산량 증가가 80% 정도로 가격하락에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농산물은 다른 상품과 달리 공급이 아무리 증가해도 수요는 별로 변동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량이 조금만 증가해도 가격이 크게 출렁거리게 된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정부의 농업 부문 투자 지출 증가가 농가의 농산물 판매가격지수를 10.8% 하락시켰다는 연구도 있다. 농가 소득의 지지 목표선도 설정되지 않고 생산 조정도 하지 않은 채 농업 투자만 10년간 늘린 것이 결국 ‘싼 농산물 가격’을 초래해 도시 소비자들의 후생만 증가시켰을 뿐 정작 농가 소득은 하락시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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