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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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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김정일의 사랑이 익는다

등록 2005-08-23 00:00 수정 2020-05-02 04:24

8·15 60돌 민족대축전에서 보여준 대표단과 노 대통령의 따뜻한 만남
핵 문제가 해결된다면 남북 정상의 공동 평화선언이 나올 수도 있어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노무현 대통령과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지난 8월17일 청와대에서 처음 만나 인사말을 주고받은 풍경은 이랬다.

김 단장: “먼저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께서 노무현 대통령 각하께 보내신 인사를 전해드립니다.”

노 대통령: 감사합니다. (김정일 장군은) 건강하시죠.

김 단장: 건강하십니다.

노 대통령: 지난번에도 정동영 장관이 갔을 때 정말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고, 또 그 이후로 남북 관계와 6자회담이 계속 발전해나가도록 해주신 데 대해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6자회담이 신뢰 구축의 열쇠

김 비서는 노 대통령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따뜻한 안부부터 건넸다. 비록 특사를 통한 노무현-김정일 양 정상 사이의 간접적인 대화이긴 하나 말 속에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김 비서는 노 대통령에게 이젠 남쪽에서도 낯설은 ‘각하’라는 극존칭을 덧붙여 깍듯한 예의를 표시했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이에 대해 노 대통령도 김정일 위원장에게 각별한 안부 인사를 전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6월 평양에서 열린 6·15 5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이전만 해도 두 정상 사이는 그렇게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확 달라졌다. 불과 몇개월 만이다. 두 정상이 주고받는 인사말에는 묵은 친구 사이에 오갈 법한 돈독한 우애마저 감지된다.

이처럼 8·15 60돌 기념 민족대축전은 두 정상을 한 발짝 성큼 더 다가서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은 북쪽 지도자의 약속 이행을 눈여겨보았고, 북쪽은 아직까지는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남북한을 자주 오가는 한 인사는 “이번 북한 대표단이 보여준 화끈한 행보는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 대한 신뢰감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북쪽 대표단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첨예한 이념적 갈등의 상징적 장소라 할 수 있는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묵념을 했고, 국회를 방문해 남북 화해와 협력에 동참해주길 호소했다. 뿐만 아니라 8·15를 즈음해 남북 해군사령부간 핫라인이 개통되고 군사분계선의 선전 수단이 제거됐는가 하면, 북한 상선이 제주해협을 통과하는 등 전례 없는 순풍이 불고 있다.

노 대통령의 마음도 흡족해 보인다. 그는 김 비서를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북쪽 대표단이) 이번에 현충원을 방문해준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또 앞으로 더 좋은 일이 계속해서 생길 수 있는 밑천이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평소 김 위원장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그의 ‘말’이 아닌 ‘실천’의 정도에 방점을 찍어왔다. 그는 북쪽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도 “6·15 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최근 각 분야에서 남북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해 신뢰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남과 북이 상호 신뢰와 존중을 토대로 약속한 것은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제 6자회담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 김 위원장의 6자회담 해결 노력을 남북 정상간 신뢰 구축의 핵심 고리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김기남 비서 등에게 “8월 말에 재개될 4차 6자회담에서 핵 문제 해결에 실질적 진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남과 북이 함께 노력해 핵 문제의 고비를 넘어서 한반도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핵 문제는 한반도 냉전을 마감하는 평화 체제 수립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남아 있다. 또 6자회담의 실패는 곧 남북 관계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조기 성사 여부는 북쪽이 6자회담에서 어떤 전략적 결단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 듯하다.

핵 문제 진전되면 정상회담이 보인다

이런 속내는 노 대통령이 지난 7월7일 중앙 언론사 보도·편집국장단 간담회에서 말한 데서 비교적 소상하게 드러났다. 그는 “남북간의 정상회담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북핵 문제를 풀고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전략적으로 유효하면 정상회담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정상회담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6·15 방북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자신의 달라진 생각을 전했다. “6자회담이라고 하지만 결국 쟁점은 북-미간에 걸쳐 있고 북-미간 타협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결국 북쪽에서 볼 때는 한국과 정상회담에서 만나봤자 북쪽의 양보만 요구할 것이 아니냐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정상회담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그동안의 저의 전망이었다.” 하지만 정 장관을 통해 달라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태도를 접하고는 노 대통령도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열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김 위원장이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한 점, 그리고 핵 문제 해결 논의 과정에서 기존의 북-미간 해결 구도만이 아닌 남북 대화의 틀 속에서 북핵 문제를 진전시키겠다는, 즉 남쪽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정책 변화에 높은 점수를 준다.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주변 환경이 크게 나아진 셈이다. 노 대통령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정상회담 테이블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전체적인 상황 변화 속에서 북쪽의 생각이 바뀌면 나는 항상 열어놓고 있으니까 언제, 어느 때, 어디서라도 좋다. 이렇게 열어놓고 있으니까 또 어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남북대화 가운데서 또는 그런 가능성이 있을지를 저도 끊임없이 모색은 해보겠지만 아직은 그럴 만한 좋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노력해보겠다.”

핵 문제 해결의 진전을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도 솔솔 나온다. 임동원 전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같은 이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정 전 장관은 “핵 문제 해결의 출구로 정상회담을 상정하면 성사가 어렵다”며 “정상회담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결단을 촉구할 수도 있고,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북쪽의 전향적인 자세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핵 문제 해결을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삼는 태도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정상회담은 어느 한쪽에서만 원한다고 성사될 일도 아니다. 서로의 목적과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시점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무현 정부도 북쪽과 이해를 공유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노력이 불가피하다. 이런 맥락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다소 과감하게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지지하고 나선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이가 적지 않다. ‘북한은 어떤 핵 프로그램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하는 미국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에게는 적잖은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제스처다. 김정호 8·15 민족대축전 북쪽 준비위 부위원장은 15일 “지금 남쪽에서는 민족 공조와 다른 나라의 공조를 많이 얘기하지만, 우리는 남쪽이 다른 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는 일관된 입장을 갖고 있다”며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동족을 반대해서 다른 나라와 손을 잡는 반북 공조”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그간 자신들의 합리적인 주장마저 한-미 공조에 매달려 인정하지 않는 남쪽의 의존적 태도를 크게 문제 삼아왔다. 이런 맥락에서 정 장관의 발언은 북쪽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주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김정일 답방의 사전 답사 성격?

정부쪽 관계자들은 북쪽이 보내는 여러 긍정적 신호를 근거로 6자회담 결과를 비교적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이번 8“15 민족대축전에 참석한 북쪽 대표단의 행보를 김 위원장의 답방을 염두에 둔 사전 답사 성격으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김 위원장은 내부적으로 이미 답방 절차를 밟고 있다는 얘기다. 한 관계자는 “핵 문제 해결 등으로 북-미 관계 진전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뤄진다면 남북 두 정상이 한반도 냉전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서울 평화선언’ 이 나올 가능성도 크다”고 귀띔한다. 또다시 한반도에 메가톤급 이벤트의 무대 막이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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