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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유공자를 욕보이지 말라

등록 2005-06-23 00:00 수정 2020-05-03 04:24

친일 행적자들을 국립현충원에 안장케 한 무책임한 보훈정책
광복60돌 현충일이 지나도 왜 개선의 조짐조차 안 보이는가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우리가 어떤 인물을 사회적으로 기념한다는 것은, 그 인물의 삶과 그가 성취한 것에 경의를 표하고, 이를 우리 사회의 건강한 가치관의 한 표상으로 승화시키려는 데 있다. 특히 20세기 반토막 가까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있다가 독립한 신생 대한민국의 경우, 무엇보다도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과 그 유족에 대한 보훈사업이 우선시돼야 했다. 비록 남과 북으로 쪼개지기는 했지만, 국내외 곳곳에서 자주독립의 염원을 품고 스러져간 독립투사들의 고귀한 피의 희생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반공투사 원호로 시작한 보훈사업

국내외의 독립투사들을 지속적으로 발굴, 서훈하고 추념하는 사업은 개인에 대한 추념으로 그치지 않는다. 지속적인 기념사업과 교육을 통해 “만인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그들의 삶”을 인간성의 위대한 성취로 승화시키고, 이를 한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확립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독립유공자의 서훈이나 후손에 대한 보훈은 결코 특정 정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민족사의 관점에서 광명정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역대 정권의 독립유공자 서훈 과정이나 관련 보훈 사업의 실상을 돌아보자면, 이러한 취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아니 그 취지가 무색하게 거꾸로 간 경우조차 적지 않다. 신성한 보훈사업이 특정 권력의 정통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편의적으로 운영되거나 졸속으로 처리되고, 심하게는 친일 행적자들이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서훈까지 받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경우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60년이 되도록 이 문제는 여전히 개선의 조짐조차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도대체 이 어찌된 영문일까?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보훈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 4월14일 군사원호법이 공포·시행되면서였다. 그런데 이 법은 공비를 토벌하다 전사한 사람이나 군 복무 중 순직한 자의 유족에 대한 원호 업무가 목적 사업이었다. 항일 독립유공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훈 지침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라고 말하기가 무색하게, 이승만 정권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훈보다는 반공투사에 대한 보훈부터 서둘렀다. 자신의 정통성을 항일독립보다는 반공에서 구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후원 아래 친일세력과 연계해 반공을 국시로 성립된 권력이었다. 이승만이 볼 때 좌익 독립운동가들은 ‘빨갱이’로 처단 대상이었고, 김구를 비롯한 우파 독립운동 진영은 부담스런 정적에 지나지 않았다. 친일세력은 미군이 진주하자 잽싸게 친미로 돌아섰고, 좌우 이념 갈등을 틈타 반공을 생존의 전략으로 삼고 이승만을 ‘국부’ ‘반공의 지도자’로 칭송하면서 이승만과 결탁했다.

박정희 시대에 원칙과 순수성 무너지다

만일 이승만 정권이 독립운동가들을 전면적으로 기념하는 한 그 대척점에 서 있던 친일세력은 반민족행위자 또는 ‘파쇼전범’으로서 비난받아야 할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도 자신의 정적에게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줌으로써 정치적 부담을 키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묘약은 역시 ‘반공’에 있었다. ‘반공전선’에서 죽은 사람들의 각기 애달픈 사연과는 무관하게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훈의 첫 출발을 반공으로 삼았고, 그러한 유공 과정을 통해 친일세력들은 ‘반공 애국투사’로서 대한민국에 당당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따라서 친일세력에게 반공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존의 필수도구였으며, 대한민국의 역사적 연원은 항일 독립투쟁이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오로지 ‘반공’에서 구해야 했다. 이승만 정권의 반공유공자 보훈사업은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진행됐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기에 들어서며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과 포상이 본격화했다. 박정희는 자신이 친일을 하고 4·19 민주항쟁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만큼, 이러한 콤플렉스를 보상하려는 듯 다양한 형태의 국가적 기념사업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훈사업을 전개했다. 1962년 4월16일 군사정부는 군사원호청을 원호처(지금의 국가보훈처)로 승격시키고 그 대상도 군사원호 대상자 중심에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가로 포함시켰다. 같은 해 문교부 산하에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63년 내각사무처에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 1968년 총무처에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 1977년 원호처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등을 설치해 이전의 정권과는 달리 적극적인 보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공적 조사와 상훈 심의는 보훈사업의 역사적·도덕적 원칙과 순수성을 무너뜨렸다. 그 단적인 예가 친일 행위자를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임명하거나 수상자로 포상한 것이다.

친일 행적자가 아무 거리낌 없이 독립유공자들을 심사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이 선정한 독립유공자나 애국지사들 가운데도 친일 행위자들이 상당수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초기에 항일운동을 하다가 뒤에 변절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광복군도 예외가 아니어서, 광복군으로 포상받은 이들 가운데는 전혀 광복군과 관련이 없거나 해방 뒤에 광복군에 편입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한때 박정희 대통령조차 광복군으로 비밀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의 책들을 공공기관에서 버젓이 출간할 정도였으니, 가짜 광복군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 결과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국립현충원 내 국가유공자 묘역, 애국지사 묘역 등에 진짜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안치됐다. 항일 독립투쟁의 정통성이 없는 이들이 저지른 무책임한 보훈정책으로 인해 독립유공자 보훈사업은 독립유공자를 욕보이는 사업이 되고 만 것이다.

한번 이뤄지면 바뀌기 어려운지라…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공적 심사는 한번 이루어지면 바뀌기 어려운지라(왜 어려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진짜 독립운동가와 가짜 독립운동가가 섞여버려 옥석을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친일 부역배들은 서훈의 수수관계를 통해 서로가 역사 왜곡의 공범이 되면서,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로 위세 좋게 자리잡았다. 또 이러한 허위 공적을 자신의 사회적 위광으로 적절하게 활용해, 죽어서는 국립묘지에서 묻혀서 후손들에게 기득권을 물려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이른바 존경받는 이들이 기념사업을 할라치면, 친일 문제나 독재 지지의 덫에 걸리는 것도 과거 박정희 시기 이러한 무책임한 기념사업의 양산과 이들의 후안무치가 야합한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후대 정권이 이를 그대로 방치해 문제를 더욱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린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광복 60년에 맞은 현충일은 그런 사연을 안은 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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