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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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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항복’은 위대했다

등록 2005-04-28 00:00 수정 2020-05-03 04:24

사이공 정권 최후의 날, 치욕을 감당하며 시민들을 구한 남베트남 마지막 대통령 즈엉반민 이야기

▣ 호찌민·하노이= 글 구수정 전문위원 chaovietnam@hotmail.com · 사진 호앙 반 끄응(Hoang Van Cuong) / 전 UPI 종군기자

사이공 최후의 날,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미국말도 못하고, 미국으로 튈 돈도 없고, 미국 비자는 꿈도 못 꾸는, 그래서 어떻게든 이 땅에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가난한 백성들은 북베트남 병사들이 수십 마일 앞까지 다가왔다는데도 천하태평이었다. 그러나 미국말 잘하고, 여차하면 튀려고 미국 비자 미리 챙겨두고, 미국에 빌붙어서 사리사욕이나 챙기며 전쟁을 부추겨왔던 자들은 잃을 게 너무 많아 미친 듯이 날뛰었다. 무장한 미 해병대원들이 헬리콥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의 손을 개머리판으로 후려치는 동안, 노점상들은 잽싸게 종이나 천으로 월맹기를 만들어 행인들에게 팔아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지휘관과 장교들이 맨 먼저 도망치다

1975년 4월30일, 해방군이 사이공으로 진격해오던 그 순간, 남베트남 병사들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고위급 장성들은 대부분 이미 살길을 찾아 고국을 등졌고, 상급 지휘관과의 통신도 두절됐다. 어디서나 전투가 벌어지면 지휘관, 장교들이 맨 먼저 도망쳤다. 4월21일, “미국이 우리를 돕지 않겠다면 떠나가게 내버려두라. 갈 테면 가라고 하라. 인도적 약속을 망각하게 내버려두라”며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미국 비난을 곁들인 사임 성명을 발표했던 응웬반티에우 대통령은 금괴를 챙겨 망명길에 올라 대만과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달아났다. 4월25일, 떤선 공항 앞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과 함께 떠나는 비겁자는 가게 하라. 월남을 사랑하는 이는 남아서 싸우자”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응웬까오끼 부통령도 미국인과 함께 떠나버렸다.

그러나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도 있었다. 남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인 즈엉반민이다. “본인은 동포들을 대표해, 우리 베트남인들의 화해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 불필요한 유혈을 막기 위해 민족의 화합을 제의한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전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침착하게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나는 또 혁명군 전사들에게 사격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질서 있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이곳에서 임시 혁명정부를 기다릴 것이다.” 4월30일 오전 9시30분, 사이공 라디오방송에서 즈엉반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어떤 병사들은 울고, 어떤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또 어떤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녹음을 마친 즈엉반민은 프랑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항복하지 않을 수 없소. 인명을 구해야 하오.”

나는 30년 전의 이 육성 테이프를 당시 즈엉반민의 보좌관이었으며 남베트남 총참모부의 작전책임자였던 응웬흐한(81) 준장의 집에서 들었다. “항복은 치욕이지. 더구나 군인으로선. 그러나 누군가는 그 치욕을 감당해야 했어. 그게 바로 즈엉반민 대통령이었지.” 그는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즈엉반민의 녹음 테이프를 들고 라디오 방송국으로 달려갔던 그는 즉석에서 생방송으로 남베트남 병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낭독한다. “참모총장도 부참모총장도 다 달아났어. 사병들만 싸우고 있었던 거야. 총참모부에 남은 사람 중에서는 내가 최고 지휘관인 셈인데, 그런 상황에서 병사들을 무모한 희생물로 만들 순 없었어.” 낭독을 마치자마자 라디오 방송국의 담당자가 슬그머니 도망을 치려 했다. “아니, 병사가 수백만명인데, 겨우 한번 방송을 내보내고 말면 어떻게 다 들어?” 그는 준장에게 다시 한번 낭독을 시키더니 “제가 오토매틱(automatic)으로 돌려놓았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1963년 국가원수에 올랐다가 쫓겨난 이유

4월30일 오전 11시 정각,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제1대대 소속 탱크 다섯대가 철문을 부수며 대통령궁에 진입했다. 즈엉반민 대통령과 부반머우 총리가 이끄는 내각의 국무위원들은 대회의장의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군이 들어서자 즈엉반민이 일어서서 말했다. “당신들이 왔군요.” 그러고는 항복 각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남베트남 정권의 최후였고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의 종말이었다. 사이공 거리에는 메가폰을 든 베트콩들이 나타나 외치기 시작했다. “사이공은 해방됐다. 겁내지 마라.”

응오딘지엠- 한국에는 고딘디엠으로 알려져 있다- 정권에서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있었던 즈엉반민은 180cm가 넘는 큰 키에 거대한 체구 때문에 ‘빅 민’(Big Minh)이라는 애칭으로 통했다. 미국이 ‘동양의 처칠’ ‘베트남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극찬하며 마치 민주화의 화신인 양 내세웠던 꼭두각시 응오딘지엠의 부정부패와 폭정이 극에 달했던 1963년, 이미 ‘빅 민’은 반(反)응오딘지엠 쿠데타에 성공해 국가 원수가 되었다. “민 장군은 미국과 함께 일하긴 했지만,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은 하지 않았어. 그가 대통령으로 있을 당시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요구했지만 거절했지. 그래서 쫓겨난 거야. 그는 민족과 국민을 사랑했지. 그게 내가 마지막까지 그를 따랐던 이유야.”

즈엉반민 대통령은 응웬칸 장군의 역쿠데타로 실각해 주 타이 대사로 전출됐다가 68년 귀국했다. 칸 장군은 민 장군이 이끄는 군사평의회가 자유 우방이 우려하는 ‘중립주의 노선’에 너무 치우쳐 있어 “중립주의라는 병아리가 부화하기 전에 나쁜 달걀을 깨뜨려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975년 4월 ‘나쁜 달걀’인 민 장군은 미국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 북베트남과 중립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하노이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무 늦었다.”

미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망 없는 협상에 매달렸다. 주 사이공 마지막 미국 대사 마틴은 연합정부 구성을 희망하는 프랑스쪽과 비밀리에 회담을 진행해왔다. 당시 프랑스 대사 메리옹에 따르면, 중국의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구상은 베트남 남부에 남베트남 정권 대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표, 즈엉반민의 ‘민족화해와 화합파’를 모두 아우르는 중립정부를 세워 북부의 레주언을 총리로 하는 친소파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사이공 최후의 날 아침, 프랑스 정부의 특사인 바뉘셈 소장이 즈엉반민 대통령을 찾았다. “바뉘셈은 미국을 버리고 베이징을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24시간만 버텨달라고 민 장군을 설득했지. 그러면 중국이 하노이에 압박을 가해서 정전협정을 끌어낼 거라고 했어.” 그러나 즈엉반민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바뉘셈이 돌아가자 민 대통령이 허탈한 표정으로 응웬흐한 보좌관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젠 나더러 중국에 나라까지 팔아먹으라고 하는군.”

4월28일 대통령에 공식 취임한 민 장군은 방송 연설을 통해 놀랄 만한 발표를 했다. “미국인은 즉각 베트남을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그는 특별방송을 통해 북베트남군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의 ‘3일 천하’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5월2일, 항복 선언을 했던 즈엉반민과 그의 내각 구성원들은 모두 대통령궁에서 풀려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의 국방장관이며 베트남노동당 중앙위 남베트남 중앙국 부사령관이었던 쩐반짜 중장은 즈엉반민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승자와 패자는 없다. 우리 베트남 민족이 미국을 이긴 것이다.” 그 다음해인 76년 즈엉반민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가족이 있는 프랑스로 떠났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만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1975년 4월30일을 기점으로 세계지도에서 남베트남공화국이 사라졌듯이 그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도 잊혀졌다. 다만, 2001년 8월6일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죽었을 때, 베트남 외무부 대변인은 이렇게 공식 발표했다. “즈엉반민은 과거 사이공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전쟁의 마지막 순간 그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의 손실을 줄이는 데 공헌했다. …우리는 그의 가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두달 뒤인 10월30일, 응웬반티에우 전 월남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베트남 외무부가 “티에우의 역사적 과오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논평을 내보내고 “베트남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대로 조용히 죽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을 접수했던 장본인 중 한 사람인 보반끼엣 전 총리는 최근 시사주간지 <국제>와 한 베트남전 종전 30주년 특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민 장군이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이공 사수’를 결정했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이공이 지금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결코 남을 수 없었을 것이며, 게다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이 파괴됐을 것인가.” 보반끼엣은 그날 오전 즈엉반민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 선언을 들으면서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즈엉반민에 대해서 “미국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했던 장군”이며, 그래서 미국으로 하여금 응웬칸을 통해 그를 뒤엎을 수밖에 없도록 “푸른 경보등을 켜게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분단된 한반도에 주는 교훈

4월30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30년을 끌어왔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며, 남부 베트남이 ‘해방’된 날이며, 그리하여 분단됐던 조국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된 역사적인 날이다. 올해로 그 30주년을 맞는 오늘, 베트남의 표정에서 단순한 들뜸이 아닌 비장함마저 읽힌다. 보반끼엣 전 총리는 “우리는 그동안 1975년 4월30일, 그 기적적인 승리에 대한 자기 도취와 자만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일성을 토하고, 서로 방법이 달랐을지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체를 위해 기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힘을 모아 새로운 조국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자고 역설했다. 베트남의 공식 역사에서 기억하지 않았던 즈엉반민, 응웬흐한 등 ‘제3세력’까지 껴안는 전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 그 힘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베트남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베트남전 종전 30주년이 우리의 역사를 한번쯤 반추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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