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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뜨고, 한국방송 진다?

등록 2005-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편에선 최문순 사장의 강력한 개혁드라이브, 또 한편에선 ‘불법 녹음’파문 마무리 돼도 갈등 불씨 여전

▣ 김진철 기자 / 한겨레 여론매체부nowhere@hani.co.kr

방송가에 불어닥친 개혁 바람에 많은 이들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양대 공영방송사인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정연주 사장 취임 이후 강도 높은 구조개혁을 벌여온 한국방송은 최근 ‘불법 녹음’ 파문을 계기로 극심한 내부 분열 양상을 드러냈다. 문화방송은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부장을 거친 49살의 최문순 사장의 등장으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형국이다.

최 사장은 지난 2월25일 취임식에서 “사장 직에 응모하면서 내걸었던 개혁 과제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풀어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며 “그 방법은 고통 분담이고 재임하는 동안 임직원 전원에게 수시로 회사를 위해 뭘 내놓을 것인지 묻겠다”고 말했다. 문화방송뿐 아니라 방송계 전반이 놀랄 만한 발언이었다.

문화방송, 파격인사 뒤 봄개편 박차

취임 5일 만인 3월2일에는 파격적인 인사가 단행됐다. 문화방송 내부에서 개혁 성향을 인정받고 있는 40대 초반 초년 부장급들이 간부로 대거 발탁 기용되는 등 큰 폭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교육방송 사장 출신인 고석만 제작본부장이 영입되고, 이사진도 전원 바뀌었다. 3월7~10일 사이에는 지방 문화방송과 계열사 등 관계회사 26곳 가운데 23곳의 사장이 갈렸다. 단 3곳을 제외하고 모두 50대 초반의 젊은 사장으로 물갈이됐다. 이 과정에서 100여명의 간부들이 보직을 내놓고 위원으로 발령받는 등 조직 전반에 변화가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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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취임 뒤 한달여 걸리던 인사는 10여일 만에 일사천리로 마무리됐다. 강릉문화방송에서 기존 사장이 사퇴 철회를 요구하고 주주총회가 연기되는 맞바람도 있었지만, 크게 의미 있는 수준의 저항은 아니었다는 평가가 대세다. 기존 간부들의 상실감이 적지 않지만 구성원들의 주된 반응은 “변화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로그램 경쟁력 확보를 위한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오는 23일 봄 개편은 최 사장 취임 이후 첫 결과물을 내놓는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방송은 일단 예능 프로그램을 위주로 단기적인 성과를 내놓고, 장기적으로 프로그램 제작 능력을 확대해 이를 기초로 광고 등 외적 수입을 늘리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등 뉴 미디어 진출과 채널 확대, 프로그램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 시장 진출을 새 문화방송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 사장 취임 이후 가파르게 추진돼온 문화방송 개혁 작업이 주춤하는 분위기도 곳곳에서 엿보인다. 문화방송 바깥에서 “최 사장이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 내놓았던 대국·소팀제의 시행이 물건너가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개혁의 선봉에 서 있는 미래전략팀과 사장 비서실이 개혁 추진 과정에 대한 철저한 입단속에 나서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오는 6월께 조직 개편안을 내놓겠다는 큰 일정이 잡혀 있지만, 인사로 조직이 크게 흔들렸고 프로그램 경쟁력 확보에 역점을 두고 있는 상황이라 이런 계획이 미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팀제 도입·지역국 조정에서 갈등 시작

물론 최 사장이 강조하고 있는 ‘공영방송의 사회적 책임 확대’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한 개혁작업은 곧 서서히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임금 10% 삭감’과 ‘단일호봉제 폐지’가 추진되고, 임금 삭감으로 신입사원 채용을 늘려 조직에 새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비용 구조를 가속화하며 인적 자원의 효율성 제고의 걸림돌이 돼온 단일호봉제를 3~4단계의 호봉 체계로 바꿀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19개 지방 문화방송의 통폐합 문제는 △‘1도1사’를 중심으로 광역화하는 ‘1안’ △이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를 통폐합해 연합 채널을 만드는 ‘2안’ △공동제작 활성화 차원에서 인적·물적 교류를 확대해 실질적 광역화를 이뤄내는 ‘3안’이 나와 있는 상태다.

전국언론노조를 산별조직으로 전환하며 추진력을 인정받은 바 있는 최 사장의 문화방송 개혁 드라이브에 가장 긴장하는 곳은 다름 아닌 한국방송이다. 최근 ‘불법 녹음’ 파문 과정에서 드러난 극심한 내부 분열은 구성원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내부 갈등이 겉으로 보기엔 ‘불법 녹음’을 둘러싼 책임 공방으로 표면화됐지만, 그 이면에는 정연주 사장과 개혁에 대한 태도 차이가 극명히 드러난 것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한국방송 안에서 지난해 진행됐던 일련의 개혁 작업인 대팀제 도입과 지역국 기능조정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이 올해 초 노조 선거를 거치며 본격화된 뒤 이번 ‘불법 녹음’ 사건이 터져나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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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내부 구성원들은 이런 관점에서 단순히 이번 사태의 해결책을 찾는 일에 앞서 내부 갈등의 원인을 찾아 풀어내야 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데 뜻을 모으고 있다. 이런 구성원들의 뜻은 정연주 사장과 진종철 노조위원장이 최근 게시판에 적은 글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났다. 정연주 사장은 사내 게시판에 ‘대화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의 한국방송을 만듭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띄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갈등과 분열이 아닌 내부의 단합과 혁신”이라고 강조했다. 진종철 위원장도 노조 홈페이지에 ‘조합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올려 “이 모든 상처가 노조를 사랑하고 한국방송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빚어진 것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면서 “한 걸음을 내딛더라도 모두 함께 갈 수 있는 하나 되는 노조를 위해 더욱 열심히 매진하겠다”고 호소했다.

이번 파문은 지난 1일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의 중재안을 노사가 받아들이기로 합의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노조가 발표한 공식 입장은 갈등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노조는 이날 진종철 위원장 명의로 발표한 성명에서 “노조의 대응이 정연주 사장 개인을 공격하기 위함이고, 또 다른 사장을 데려오기 위한 음모로까지 치부될 때는 가슴이 아팠다”면서 “노조의 투쟁 방법과 한국방송의 위상 추락을 우려하는 조합원들의 노조에 대한 고언이 정 사장 지키기로 오인되는 모습을 볼 때 위원장으로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영진은 우선 합의한 6개 항 가운데 △책임 있는 인사 조치를 통해 경영 쇄신의 계기로 삼는다 △노사 관계 선진화를 위한 시스템 마련을 위해 노사 양쪽이 노력한다는 조항에 따라, 노무 시스템 혁신과 일부 임원진 교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한국방송 노조 상층부에 제기되는 의문들

그러나 노조 상층부의 이런 태도와 노선을 두고 노조 일각에서 의문이 제기되는 등 내부 갈등 요인도 남아 있어 완전한 봉합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일단 일부 협회가 노조 탈퇴를 거론하며 현 집행부의 투쟁 방식에 물음표를 던진 것은 집행부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노조 내부에서는 앞으로 노조가 추진할 각종 사업에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경영진이 계획하고 있는 지역국 활성화 등에 대해 노조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유사한 갈등 국면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영진은 그동안의 경직된 노사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고민하고 있지만, 이 또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한국방송 안팎의 평가다.

최문순 사장이 이끄는 문화방송이 방송개혁과 언론개혁의 원군으로 등장했지만, 한국방송으로서는 부담이 더욱 커진 모양새다. 문화방송에 부는 개혁 바람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방송에겐 더 큰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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