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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장님? 얼라들이 무슨…”

등록 2005-04-12 00:00 수정 2020-05-03 04:24

‘선생님 따까리’ 취급당하는 중·고교 학생회… 기본권 쟁취를 위해 10대들이 당당한 저항을 준비한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서울 ㅇ여고에 머리카락 길이 기준이 생긴 것은 올해 3월부터다. 어깨 높이부터 밑으로 10cm. 느닷없이 결정된 한밤의 ‘거사’에 성난 학생들은 자신들이 ‘대표’로 뽑은 총학생회장 ㅈ(19)양에게 몰려갔다.

“그게 무슨 일이래?” 사전에 학생들에게 아무런 의견도 묻지 않은 채 결정된 교칙 변경에 ㅈ양과 학생들은 분노했다. ㅈ양은 성난 동기들과 후배들을 달랜 뒤,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교무실로 쳐들어갔다. 교사라는 압도적 권위에 대한 생애 최초의 ‘저항’에 ㅈ양과 친구들은 긴장했다. 다행히 학생주임은 “교칙 변경의 사전 통보조차 없었던 것은 잘못인 것 같다”며 “교칙 재개정을 검토해보겠다”고 학생들을 달래 돌려보냈다.

학생회를 ‘특별활동’으로 못박다

일주일 뒤 겪은 것은 쓰라린 ‘배반의 경험’이었다. 학교로부터 받은 최종 답변은 “머리카락이 길면 지저분하고 혐오감을 줘 교칙 재개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선배들의 긴 머리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줬던 것이냐”고 캐묻는 ㅈ양 앞에 돌아온 대답은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애정 어린’ 가르침이었다. ㅈ양은 “교칙이 곧 폐지될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전했는데, 총학생회장이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한 꼴이 됐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자치모임인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이하 ‘희망’)의 연미림(29) 학생회지원사업부장은 “교사들이 아이들의 대표기구인 학생회를 공식적인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고 지도해야 하는 객체로 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은 교사·학부모와 함께 교육현장의 3대 주체이지만, 단지 어른이 아니라는 이유로 △머리카락 길이 △야간 자율학습 △보충수업 △축제 진행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문제에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학생회를 선생님들의 심부름을 하는 ‘따까리’로 보는 거죠. 대의원대회를 열어 의견을 정하면 나중에 선생님들이 일을 다 가로막는다니까요.” 전누리(19·서울 구로고 부학생회장)군은 지난해 가을 축제 때 있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고 했다. 전군과 학생회 임원들은 지난해 가을 축제 마지막 날 운동장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대동제를 열 계획을 세웠다. 불을 잘못 다루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소방서나 구청에 문의해 안전지도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 학생회 담당 교사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고, 학생들은 제 손으로 모닥불을 피울 생각에 축제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지만 막판에 교장 선생님의 개입으로 그동안의 학생들의 수고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다. 운동장에 불을 피우면 “소방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소방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저희가 소방서와 구청에 다 확인했거든요. 솔직히 캠프파이어를 못한 것보다, 우리를 둘러싼 중요한 일들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게 더 답답했죠. 처음부터 선생님들끼리 일을 정하려면 애초에 학생회를 만들지 말던가요.”

학생들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는 일선 학교의 학생회칙은 교육인적지원부가 전국 중·고등학교에 내려보낸 학생회칙 시안을 대부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교육부 시안을 보면, 학생회의 목적은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학생의 취미 및 특기 신장과 자치 능력을 배양해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학생회를 학생들의 자치기구가 아닌 태권도·글짓기·합창·보이스카우트 같은 ‘특별활동’ 가운데 하나로 못박고 있는 셈이다. 또 학생회 운영과 관련된 모든 사항이 교직원으로 구성된 학생지도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돼 있어, 학생 자율성이 숨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마저 앞뒤로 가로막혀 있다.

‘선거’라는 민주적 정당성은 확보했지만, 이를 구체화할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한 이 기묘한 결함은 학생들을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는 ‘객체’로 보는 우리 교육 현실의 필연적 부산물이다. 지난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서울 대광고 전 학생회장 강의석(20)씨의 46일 동안의 단식 투쟁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예배 선택권을 달라”는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가 학생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에 불과했다.

구정인(34)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준비위원장은 “우리나라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며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언제라도 기본권이 유린될 수 있는 ‘약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10대들이 스스로 나서 “어른들이 정한 규칙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다”고 당당히 선을 긋고 있는 점이다.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와 ‘희망’쪽에서는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을 통해 현행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 학생회에 학생들의 대표기관에 걸맞은 ‘자치조직’의 권한을 달라고 법 개정안을 제시한 상태다.

자치화 첫걸음,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학생회가 자치조직으로 법제화되면, 학생회는 학생들의 대표기구로 자율적 자치활동을 보장받고 학생들이 지켜야 할 학생회칙이나 생활규정 개정도 학생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학생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나아가 학교 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회 대표가 당당한 학생 대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가 지난해 9월 조사한 전국 152개 중고등학교 ‘학생회 운영 현황 보고자료 분석’을 보면, 학생들이 학교운영위원회에 참가하는 학교는 전체의 4.3%인 6개에 불과했다.

학생의 자치권에 대한 고민은 민주주의 근본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재성찰을 요구한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평균적인 인간의 능력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의 초기 민주주의자들은 성인 남자로 범위를 제한하긴 했지만, 제비뽑기에 의해 공직자를 선택했다. 직접민주주의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현대에도 사회의 중요한 결정은 ‘다수결’이라는 독특한 의사결정 방법을 통해 이뤄진다. 학생들이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란 교사와 학부모들의 ‘생각’이 편견은 아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볼 때가 된 것 같다. 김종민 ‘희망’ 학생회 지원사업부 간사는 “처음에는 학생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다스리면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언제나 교사의 압도적 승리여야 하는가

‘위태로운’ 청소년기를 다룬 성장 드라마를 보면, 학교 축제를 앞두고 학생과 교사가 갈등을 빚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둘의 싸움은 대개 교사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는데,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안온한 공동체는 어른들이 정한 ‘규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끔히 정리되곤 한다. 세계에 저항하고 마침내 패배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꼭 한뼘씩 마음의 키가 자란다. “왜 선생님들은 자신들은 청소년기를 겪지 않은 것처럼 완고하게 변해버리는 거죠?” ㅈ양이 물었다. 1960년대 유행했던 ‘얄개’ 시리즈부터 최근 방영이 끝난 <학교>까지 학생들의 지난한 패배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늘 조마조마하고 불편한 일이다.



중앙선관위, 학생회에 재뿌리다

서울 ㄷ고에서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설 수 있는 학생은 “전 학기 성적이 상위 30% 이상이 되는 사람”으로 한정돼 있다. 아무리 리더십이 뛰어나고 인기가 많아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학생회장이 될 수 없도록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해둔 셈이다.
성적 제한은 최근 들어 사라져가는 추세지만 ‘상위 5~30%’ 선에서 학생회장 출마 자격 제한을 두는 학교는 여전히 많다.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가 지난해 9월 전국 중·고등학교 152곳의 학생임원 선출 방식을 조사한 결과, 성적 제한을 두는 학교는 전체의 30.9%인 47곳이나 됐다.
차별 실태는 서울보다 지방에서 심각했다. 지방 고등학교의 경우 조사대상 27개 학교 가운데 1곳을 뺀 26개 학교에서 선거 출마에 성적 제한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서는 조사대상 49개 학교 가운데 성적 제한을 두는 학교는 10%에 조금 못 미치는 9개밖에 없었다.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가 지난 2003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167개 학교 가운데 61.1%인 102곳이 임원 자격을 성적 5~30%로 제한하거나 교사 추천과 부모 동의를 받도록 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 전문 인터넷 뉴스 포털 ‘바이러스1318’ 윤수근 편집장(28)은 “학생회장을 지내면 대입 때 가산점을 주거나, 특별전형 지원 자격을 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학생들에 견줘 상대적으로 학력이 떨어지는 지방의 우수 학생들을 위한 학교쪽의 최소한의 배려란 얘기다.
문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같은 국가기관에서조차 성적 제한 규정을 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선관위가 전국 중·고등학교에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학생회 임원 선거 규정’을 보면 입후보 자격(6조)을 “전 학기 성적이 학년의 30% 이내인 학생”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미경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 정책실장은 “평등권을 해치는 성적 위주의 임원 선출은 학생 다수를 자치활동에서 수동적으로 만들고 특정 학생의 점수 보태기로 변모할 우려가 높다”고 지적했다.




우리 학교 ‘모범회칙’ 보실래요?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는 학생들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모범 학생회칙을 가진 학교로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꼽았다.
지난 2002년 개정된 중앙고 학생회칙은 교사들이 학생회 활동에 무제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장치인 ‘지도위원회’를 폐지하고, 학생회 활동에 대한 자문과 조언에 머무는 ‘자문위원회’를 신설했다. 또 학생회의 목적을 “학생들의 자율적 자치 능력을 배양해 민주 시민으로서 자질을 함양하는 것”(1조)이라고 못박아 학생회 활동을 단순한 특별활동이 아닌 학생들로부터 대표성을 부여받은 ‘자치활동’임을 분명히 했다. 학생회 예산 편성권(31조)과 학칙 개정권(35조)도 학생들의 몫이 됐다.
이런 ‘진보적인’ 학생회칙이 가능했던 것은 학생회 담당교사를 지낸 노년환 교사(사진·전교조 서울지부 사립중서부지회 종로지구장)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 교사는 “학생들의 자치 능력을 길러준다는 학생회의 취지와 무색하게 회칙이 학생들의 의무만 열거하고 권리를 보장하지 않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노 교사는 당장 학생회 대의원들을 불러 “회칙에서 문제가 되는 점을 꼽아보라”고 의견을 모아 새로운 학생회칙을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는 게 아니냐”는 일부 교사들의 ‘딴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신선하다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곧 회칙이 바뀌고 학생회에 이전보다 더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
당시 2학년으로 회칙 개정 작업에 참여했던 김종민(21)씨는 “이전에는 교칙에 교실에서 휘파람을 불거나 떠들면 벌점을 준다는 불합리한 규정이 많았다”며 “이런 것들을 하나씩 바꿔나가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실험은 절반의 성공이었다는 평가다. 회칙 개정이 학생들의 자발적인 요구로 이뤄진 게 아니라, 학생 자치모임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교사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외삽된 민주화’ 논란이다. 김씨는 “학칙 개정으로 학생들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졌지만, 학생회 활동에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며 “돌이켜보면 제도의 장점을 잘 못 살린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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