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청와대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 완성… 우리도 ‘시스템 후진국’ 오명 벗나</font>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미국 정부는 전쟁 상황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이 같은 곳에 함께 있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해, 위기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을 상세히 구비하고 있다. 핵무기 통제장치가 든 핵가방 관리 매뉴얼도 물론 포함된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가정보원장, 박재규 통일부·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등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 중이었다. 이한동 당시 국무총리는 ‘혹시라도 대통령 일행에게 유고가 생긴다면…’ 하고 걱정했다. 이 총리는 유사시 총리가 해야 할 일의 순서와 절차를 청와대에 물었다.
10월 완료 목표로 실무 매뉴얼도
당시의 청와대는 답변이 궁했다. 위기 상황에 대비한 아무런 매뉴얼도 마련되지 않았던 탓이다. 결국 “헌법상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있으며…”라는 원론적 답변을 총리에게 하고 말았다. 1979년 10·26 사건 직후 총리와 각료들이 우왕좌왕했던 경험이 있는데도, 유사시 대응 시스템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는 이에 따른 국가 위기관리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모두 32개 상황에 대한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을 완성하고 올해 10월 완료를 목표로 300여종의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 위기관리센터(센터장 유희인 공군 준장)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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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C의 작업은 현 정부 출범 첫해 물류파업 등 갖가지 사회 갈등이 분출하면서 문제의식이 싹텄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회 갈등을 시스템 차원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해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NSC는 청와대 비서실 부서간 업무분장을 분명히 한다는 차원에서 ‘대통령 비서실 상황대응 매뉴얼’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범정부 차원의 ‘유형별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로 일을 키울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유희인 센터장은 설명했다.
그 결과 완성된 표준 매뉴얼은 우선 전통적 안보 분야에서 △북핵 우발사태 △서해 북방한계선(NLL) 우발사태 △개성공단 돌발사태 △대통령 권한공백 △재외국민 보호 △소요·폭동 △파병부대 우발사태 △테러 △기타(4건) 등에 걸쳐 있다. 이 가운데 ‘대통령 권한공백’은 대통령 궐위 또는 사고에 따른 국정혼란에 대비한 범정부적 대응체계와 기관별 조치사항을 규정했다. 지난해 국회의 대통령 탄핵 의결이 이뤄졌을 때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첫 행보로 NSC 상임위원회를 소집했는데, 이를테면 그런 수순들이 매뉴얼에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어니어 침몰 때 이미 작동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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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돌발사태’는 개성공단 건설·운영 과정에서의 돌발사태 발생에 대비한 범정부적 대응체계와 기관별 조치사항을 규정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안보상 이유로 공개되기 어렵다고 한다. 다만 개성공단에 진출한 남쪽 인력에 대한 안전확보 조처를 최우선적으로 취하되, 기관별 역할 등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북핵 우발사태’ 등도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재난 분야에선 △풍수해 △지진 △산불 △고속철도 대형사고 △다중 밀집시설 대형사고 △수질·해양 등 대규모 환경오염 △화학 유해물질 유출사고 △지하철 대형 화재사고 △공동구 재난 △전염병 △가축질병 등에 관한 매뉴얼이 마련됐다. 이 가운데 ‘산불’의 경우, 국무조정실이 주무 기관으로서 중앙안전관리위원회를 통해 정책을 조정한다. 농림부(산림청)는 진화, 위기경보 발령 등을 맡는다. 행정자치부(소방방재청)는 지방자치단체 지원을 담당한다.
관련 부처들이 재난에 합동 대처한 것은 매뉴얼이 없을 때도 해왔다. 그러나 매뉴얼을 만들어 범정부 차원에서 공유함으로써, 사태 발발 초기에 소관을 미루거나 다투는 일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국가 핵심기반 분야에선 △사이버 안전 분야 △전력 △원유수급 △원전 안전 △금융전산 △육상 화물운송 △식·용수 △의사 파업 등 보건의료 △정보통신 등의 유형별 매뉴얼을 만들었다. 원유수급 매뉴얼은 주요 산유국에 정정 불안이 일어날 때 ‘관심’이라는 위기경보를, 정정 불안 진행에 따라 △주의 △경계 △심각 등으로 경보 수위를 올리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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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매뉴얼은 이미 작동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지난 1월20일 북한 수역에서 남쪽 화물선 파이어니어호가 침몰했다. 이에 해양경찰청은 사고 발생 1시간여인 오전 7시23분 통일부를 통해 북한에 경비함정과 항공기 투입 승인을 요청했다. 사고 발생 5시간여 만인 오후 1시20분 함정 진입을 허용한다는 북쪽의 통보가 왔고 분단 이후 최초로 남쪽 무장선박인 구조구난함이 북쪽 수역에서 구조활동을 벌이게 됐다. 유희인 센터장은 “정부 기관들이 우왕좌왕하지 않고 위기대응 매뉴얼대로 움직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영남지역 폭설 때는 도로 통제가 늦어지면서 수많은 여행객들이 고속도로 안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몇 시간씩 고생했다. 그 뒤 올해 초 영남지역 폭설 때는 도로공사가 도로 중앙분리대를 재빨리 크레인으로 들어내 차량을 유턴시킴으로써 고속도로 진입을 막았다. 따라서 1년 전보다 혼란이 줄었는데 이 역시 매뉴얼대로 움직인 결과라고 한다.
NSC 위기관리센터는 기획팀이 관련기관들과 협의해 매뉴얼을 만들어내는 일 외에 자체 상황실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항공, 해양, 치안, 기상, 수질, 대기오염, 도로, 해양 등 각종 관측 정보들이 집대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고질적 부처간 영역 다툼 줄어들 수도
김대중 정부 때까진 국방부 장성이 서해 NLL 교전 등의 상황판을 옆구리에 끼고 청와대에 보고하러 달려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그때도 전화나 팩스로 실시간 상황보고는 했다. 그러나 종합적인 윤곽을 보고하려면 역시 비닐을 씌운 베니어 상황판을 들고 뛰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 상황실의 설비는 전화와 팩스 몇대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청와대에 실시간으로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지하 워룸(war room)에 들어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전쟁 상황을 통제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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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체계들이 마련된 것은 노 대통령의 ‘시스템 마니아 기질’ ‘혁신 취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최근 매뉴얼 후속 작업을 보고받은 자리에서 “매뉴얼을 시행하면서 사례를 축적하고 보완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또 “위기관리학이라는 학문 체계가 세워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학술 세미나 개최 등 학문적으로도 보완하라”고 지시했다.
어쨌든 이런 작업의 결과로, 우리 정부도 시스템 후진국의 오명을 어느 정도 벗게 됐다. 고질적인 부처·기관간 영역 다툼, 미루기도 다소 줄어들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이 탁상 매뉴얼에 그칠지, 아니면 종합적으로 실효성이 발휘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32개 표준 매뉴얼, 300여개 실무 매뉴얼의 방대함과 우아함, 세련미보다는 실제 상황에서 힘을 쓰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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