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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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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쏭바강, 가까운 혼바산

등록 2004-12-30 00:00 수정 2020-05-03 04:23

베트남 뚜이호아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소설가 이윤기, 33년 만에 처음으로 그 현장을 찾다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한겨레신문사는 지난 12월10일부터 16일까지 6박7일 동안 ‘이윤기와 함께하는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베트남전 참전군인, 독자 등 20명이 참여한 이번 평화기행단은 호치민을 비롯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참전했던 빈딘(뀌년), 푸옌(뚜이호아), 칸호아(닌호아), 나짱, 캄란 등을 돌아보았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이윤기(57)씨는 한겨레신문사가 세운 ‘한-베 평화공원’이 있는 푸옌성 뚜이호아에서 1971년 3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백마28연대 전투병으로 근무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뒤 세계 80여개국을 여행했지만, 그의 청춘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베트남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그가 감격적인 소회를 보내왔습니다./ 편집자

1971년 12월17일 오후 2시, 나는 오산 미군 기지에서 미군 소속 항공기를 타고 ‘다시’ 베트남으로 떠났다. 뚜이호아에 주둔하고 있던 전투단 본부로 귀대하는 휴가병 신분이었다. 나는 사병 신분이었음에도 귀국 휴가를 찾아먹은 약간 드문 경험의 소유자다. 오키나와 나하 기지와 필리핀 클라크 기지를 경유해서 항공기가 내린 곳은 베트남 공화국 수도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이었다.

그로부터 33년 만인, 정확하게는 7일 모자라는 33년 만인 2004년 12월10일 베트남 국적 항공기에 올랐다. 항공기가 이륙한 직후 처음으로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승무원들이 모두 젊었다. 남녀 통틀어 33살을 넘긴 듯한 승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항공기도 33살을 넘었을 턱이 없다. 33년이면 얼마나 긴 세월인가?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땅에 머문 세월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머문 세월이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33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세계로 들어와 하늘을 날고 있었던 셈이다.

총 들고 다니던 땅에 카메라를 들고…

이륙한 지 6시간 만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대도시 ‘호치민시’의 ‘떤선’ 국제공항에 내렸다. 나라 이름, 도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항 이름이 더 이상 ‘탄손누트’가 아니라 ‘떤선’이라는 것은 내리고 나서야 알았다. 베트남 답사가 계속될 동안 나는 영어식 고유명사와 베트남식 고유명사를 동일시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입국장에서 받은 충격은 조금 더 컸다. 여권 사진과 얼굴을 대조하느라고 입국장 관리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그 눈초리가 한마디로 섬뜩했다. 자그마한 체구, 가무잡잡한 피부, 앙다문 입술, 날카로운 눈매….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북베트남군의 모습, 우리가 그토록 한사코 만나지 않으려던 베트콩의 모습이었다. 좌악 찢어서 활짝 웃어 보이는 일이라면 꽤 훈련되어 있는 내 입술도 그 앞에서는 찢어지지 않았다. 나는 잠깐 동안이지만, 33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 그 입국장의 젊은 관리 앞에서 전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잔뜩 긴장한 채, 총 들고 다니던 땅 베트남에 카메라 들고 입국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나는 33년 전에 배운 매우 슬픈 베트남 노래 을 흥얼거려보았다. 목이 잠기려고 했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따라 불렀다. 베트남 말로 된 가사, 우리 안내인 구수정씨가 베트남에서 번역, 전송해주었다.

우리는 꺾었네, 한 다발 히스 꽃을

그대 기억해주오, 가을은 이미 죽었네

가을은 죽었네, 그대 기억해주오

가을은 죽었네, 이미 죽었네

우리 둘은 이제 만날 수 없네

이승에서는…

그날 오후 호치민시의 전쟁박물관을 둘러볼 즈음에야 나는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이었다. 한국인 안내인은, 지금의 베트남인들은 전혀 미국인들을 적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꽤 엄숙해야 할 전쟁박물관이어서 우리 일행은 반바지를 일절 입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많은 미국인들 중에 긴 바지를 입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나같이 반바지 차림이었다. 미국인들 중에는 알몸이 거의 드러나는, 수영복 비슷한 옷차림으로 박물관을 누비는 여성도 있었다. 내 눈에는 무례해 보였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그날 안내인으로부터, 베트남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적의를 갖고 있기는커녕 호의를 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긴장을 얼마간 풀 수 있었다.

함부로 쓰기 두려운 ‘학살’이라는 말

박물관 전시물은 베트남 민족의 끈질긴 투쟁을 선전하고, 프랑스와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잔혹한 모습을 담아낸 사진들이어서 나는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한 바퀴 도는데 욕지기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전시실을 나와, 마당에 전시되어 있는 미군 장갑차 캐터필러 뒤에 몸을 숨기고는, 점심 때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그날 밤 전쟁박물관 관장으로부터 고엽제 후유증이 대(代)를 물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자리에는 사지 가운데 손 하나밖에 없는 소년도 동석했는데, 고엽제 살포 책임이 없는 나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안내인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 자리에서 을 불렀다. 여행 중 도합 열번은 불렀을 것이다.

다음날, 중부지방 빈딘성(省) 푸캇 공항에 내렸다. 푸캇 공항이라면 한국인이 주둔하고 있던 퀴논과 가깝다. 하지만 퀴논도 더 이상 ‘퀴논’이 아니었다. ‘뀌년’이라고 했다. 따이빈 마을로 들어가는 우리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 거기에 증오비(憎惡碑)가 세워져 있다고 했다. 한국군의 양민 학살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세운 비석이 있다고 했다.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양민 462명의 이름이 거기 새겨져 있다고 했다. 때 아니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앞에 섰다. 비석에는 과연 “미군의 꼭두각시 남다오띠엔(南朝鮮) 군대를 증오한다”는 내용의 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서서 마을로 들어섰다. 약간 취한 듯한 한 베트남인이 나에게 자기네 집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조금 무서워서 망설이자 사내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그만 종지를 들고 나와 마시라고 했다. 좋다, 하고 마셨다. 술이었다. 아,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놓아도 되겠구나 싶었다.

‘학살’이라는 말 함부로 쓰기가 두렵다. 한국전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관련자인 미국인 데일리씨가 2000년 한국으로 와서 피해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하지만 데일리씨는 학살을 시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 당시 나는 한 신문에다 그런 데일리씨를 향해 다음과 같은 글을 총 쏘듯이 쓴 적이 있다.

유격대 여단장과의 만남

“데일리씨, 당신의 슬픈 세월에 묻어 있던 노근리 회한이 어제 피해자들 앞에서 흘린 눈물에 씻기었기를 바래요. 나는, 가해자로서 눈물을 흘린 당신 역시 역사의 피해자 중 하나라고 여긴답니다. 이렇게 여기는 데엔 실로 까닭이 있지요. 노근리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커니 못한다커니 한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나는 이 문제의 쟁점이 어디로 모이게 될 것인지, 귀신같이 짐작했어요. 학살의 주체가, 군인 신분이어서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뻗댈 것으로 짐작했던 것이지요. 이런 문제의 쟁점은 대개 그리 모이게 되어 있답니다. 어째서? ‘군인 신분’과 ‘상부 명령’이라는 페인트 분식(粉飾)을 긁어보면 무엇이 나오겠어요? ‘양민 학살의 합리화에 필요한 공식’이 나오겠지요. 인류가 군인에 의한 양민 학살의 내역을 그렇게 설명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랍니다.

말꼬리 잡자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군인이었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기자 질문에,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대답하더군요. 당신네 미국인들이 잘하는 빈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거 문제예요. 당신네 동아리 사이에 “노근리를 입에 올리지 않는, 일종의 묵계가 있었다”는데, 그런 예비역은 군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겨서는 안 되지요. 49년 동안 침묵을 지켰고, 가족들에게 노근리 얘기를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면, 당신은 자랑스러운 예비역이 아니지요. 진실을 알고 싶다는 기자에게,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입을 여는 순간에야 당신은 자랑스러운 예비역이 되는 거지요.

당신이 열아홉 꽃 같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싸웠듯이 나도 스물셋 꽃 같은 나이에 베트남에 가서 싸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싸웠어요. 귀국 직후, 친구들은, 양민을 학살하고 온 것도 아닌 나에게 부끄러워하기를 요구했어요. 나는 완강하게 버티었지요. 나는 군인이었다, 명령 받고 갔다, 명령 받고 싸웠다,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냐, 이러면서 버티었어요. 그런데 한 3년을 버티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지더군요. 하수인에게는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없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약혼녀와 함께, 참전의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한 보따리 싸들고 국립묘지로 갔어요. 그 보따리가 있을 곳은 거기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내 아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베트남전 참전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답니다.”

내게는, 한국군에 의한 따이빈 양민 학살이 사실인지, 아니면 베트남인들이 과장한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사실일 개연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른바 ‘학살’ 당시 한국군은 북쪽의 정규군과 싸운 것이 아니었다. 한국군의 상대는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었다. 그들은 정규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12월12일, 뚜이호아 인민위원회를 찾았을 때 나는 한국군과 교전한 적이 있는 당시의 유격대 여단장을 만났다. 그는 한 한국인의 입에서 ‘정규군’이라는 말이 나오자 단호하게 응수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이 지역 여단장이었던 내가 확인하오. 당신들과 싸운 사람들은 북에서 내려온 정규군이 아니라 이 뚜이호아 현민(縣民)들이었소, 농부들이었소. 나는 그들의 지휘관이었소.”

여단장의 말이 옳은 것 같다. 신분이 현민들이어서, 농부들이어서 베트콩은 어디에든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글자 그대로 신출귀몰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광경을 쉽게 상상해낼 수 있다. 자, 한국군 부대가 작은 마을을 지난다. 인기척이 없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로켓포가 날아온다. 몇명의 한국군이 쓰러진다. 이어서 마을쪽에서 몇발의 총탄이 날아온다. 그 총탄 수만큼의 한국군이 쓰러진다.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총탄 하나 날아올 때마다 한국군이 하나씩 쓰러진다. 나 같았어도 총탄 날아온 방향으로 수류탄을 던졌을 것이다. 로켓포를 쏘았을 것이다. M-79 유탄 발사기로 유탄을 발사했을 것이다. 명령?

병사들의 귀가 소리를 듣지 못할 때

이 경우,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다. 공포다. 공포에 하얗게 질린 병사들, 총소리, 로켓포 소리에 일시적으로 귀먹어버린 병사들에게 명령은 들리지도 않는다. 총소리도 수류탄 터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전쟁영화에, 소리가 일절 삽입되지 않은 슬로모션 화면이 자주 등장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로켓포와 수류탄이 몇발 터지면 병사들의 귀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한다. 하노이 지역 해방전선 출신 화가 릉 쑤언 도안(54)씨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폭격기가 폭탄을 쏟아부었어요. 전사들이 내 주위에서 픽픽 쓰러졌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그런 와중에도 땅바닥의 작은 버섯들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보였어요. 연두색, 보라색, 구별할 수 있었지요. 날아가는 벌도 한 마리 한 마리 또렷하게 보였어요.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호치민시에서 만난, 역시 해방전선 출신인 시인 반레씨의 소설 이라는 책에도 귀먹어 듣지 못하는 병사 이야기가 등장한다.

“너는 어느 분대지?” “지에우 녀석이 죽었어요.” “너는 어느 분대야?”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저는 급히 벙커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놈과 함께 죽지 않았어요.”

전 여단장은 한국군은 베트남 전에 참가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참전한 베트남 전쟁을 ‘불행한 전쟁’이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불행한 전쟁이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 일행에게 일장 훈시를 하고 난 뒤에 나에게 물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이런 말이 오갔다.

“솔직하게 말해주시오. 당신네들은 우리를 왜 그렇게 증오했소?” “베트콩을 증오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전우들을 더 사랑한 것뿐입니다.” “이제 지나간 일이오만, 당신은 우리의 전력을 어떻게 평가했소?”

“실탄 낭비하는 법이 없더군요. 어떻게 사격이 그렇게 정확할 수 있지요?” “낭비할 실탄이 없었소. 게다가 한국군은 덩지가 큰데다 수가 너무 많았소.”

분위기가 아무래도 이상해질 것 같아서, 코가 큰 그에게 내가 농담을 던졌다.

“나는 당신처럼 코 큰 베트남인은 처음 봅니다. 젊을 때도 미남이었을 것임에 분명한 당신에게는 여단장 노릇보다는 배우 노릇이 더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나의 말에 여단장 역시 부드러운 말로 응수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영화에는 출연한 적이 있지요. 이라는 영화였지요.”

10년보다 길었던 그 1년

그 드라마의 원작자 박영한 교수가 나의 가까운 친구라고 응수하자 여단장의 두툼한 손이 테이블 위를 건너왔다. 그의 손은 베트남인의 손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크고 부드러웠다.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하지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음식점에서 우리 부대 자리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거리, 흔적이 남아 있을지,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안내를 맡은 푸옌성 박물관장은 있다고 단언했다. 가는 길이 낯익었다. 도중에 한겨레신문사와 푸옌성이 공동으로 조성한 ‘한-베 평화공원’이 있었다. 기념비가 서 있는, 그리 크지는 않으나 아름답고 고요한 공원이었다. 그 지역이 빠른 속도로 공업화하고 있어서, 머지않은 장래에 공장 지대 한 중간에 섬처럼 떠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장은, 벙커를 보려면 거기에서 10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어느 부대의 벙커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버스에 다시 오르는 순간부터 가슴은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의 소회가 사적으로 조금 기울더라도 양해하기 바란다. 겨우 1년간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1년은 나에게 10년 이상으로 길고 버겁고 힘든 세월이었다.

백마 28연대, 속칭 ‘도깨비 부대’는 강과 바다를 등지고 있었다. 부대 뒤로는 남지나해와 합류하기 위해 다농강이 바다와 나란히 흐르고 있었다. 강폭은, 내가 두 번 헤엄쳐 건넌 가늠으로 200m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강 너머로는 기나긴 모래언덕이 있었다. 이 모래언덕을 당시 우리는 ‘롱 비이치’라고 불렀다. 모래언덕 너머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들의 눈물을 뿌리게 하던, 일망무제의 남지나해였다. 강변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부대는 ‘제100 군수사령부 209이동외과병원’이었다. 그 병원에 딸려 있던, 멀리서 보면 음산해 보이던 건물을 나는 가장 진하게 기억한다. 영현실, 쉬운 말로는 시체 안치소였다. 내가 몇 차례 술에 취한 채 영현 보초를 선 적이 있는 바로 그 건물이었다.

남지나해도 아름다웠지만 다농강도 아름다웠다. 모래언덕은 거북의 산란장이기도 했다. 거북은 육안으로도 보였다. 우리는 다농강을 건너 모래언덕으로 올라가 거북을 붙잡아온 일도 있다. 우리가 붙잡아 고무보트에 싣고 온 거북은 병사 셋을 등에 태우고도 너끈하게 기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한국인에게 거북은 요릿감이 아니라 영물이었던 것이 다만 다행스러울 뿐이다. 그 거북에게 우리가 한 짓이 한심하다. 거북에게 근 한 양동이의 밥과 24캔들이 맥주 한 상자를 먹이고는, 지렛대를 배 밑으로 넣고 몸을 뒤집어 허연 뱃바닥에다 매직팬으로 ‘승전기원’이라고 쓴 뒤에 놓아주었으니 한심하다. 강변 휴양소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이 있었다. 은 내가 거기에서 배운 노래다. 그 음식점에서 그 노래를 베트남 말로 여러 차례 불렀다. 종업원으로 일하던 베트남 아가씨들이 퍽 좋아했다. 그들은 ‘죽은 가을’ 때문에 나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추억은 다만 여기까지다.

울지 않을 수 없었네

막사의 일부는 다농 강변, 일부는 거기에서 가까운 사막에 있었다. 전투단 소속 전투대원의 일부인, 대대 규모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해 있었는데도 그 해변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거의 없었다. 드럼통을 하나 묻고 그 위에다 발판을 얹은 다음, 차일막을 하나 세우면 그것이 곧 가설 변소였다. 드럼이 다 차면 그 옆의 모래를 파고 다른 드럼을 묻고, 발판을 옮기고 차일막을 들어다 덮으면 그것이 곧 새 가설 변소였다. 변소에 벌레가 많이 끓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경유를 부어, 벌레를 없애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벌레는 경유에 대한 면역성이 강했다. 그래서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많은 양의 경유를 부어넣지 않으면 안 되었고, 우리는 변소에 들어갈 때마다 구린내와 기름 냄새와 벌레가 썩는 냄새가 어우러진 매우 복잡한 악취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찾아간 전투단 본부 자리에서, 눈을 잘 의심하지 않는 나도 나의 눈을 의심했다. 정체불명의 벙커는 본부 정문의, 벙커를 겸한 기단부였다. 한국인 안내인은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다음날 나는 같은 설계도로 세워졌음에 분명한, 그래서 아주 똑같은 백마 사단 사령부 정문의 기단 겸용 벙커를 보여줌으로써 이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 벙커 하나, 돌로 쌓은 관망대 하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부가 있던 자리에는 베트남군 부대가 버티고 서 있었다. 감시하는 병사가 있어서 그쪽으로는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었다. 그 부대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버려진 땅이었다. 다농강으로 접근해보았다. 강폭은 600, 700m로 넓어져 있었다. 모래언덕을 보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강을 넓힌 것이라고 했다. 강은 본부 쪽으로 2300m 들어와 있었다. 보다 넓고 높아진 모래언덕 너머로 남지나해가 보였다. 내 눈에 익은, 파란 바다는 더 이상 아니었다. 남지나해에서 고개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른쪽으로 90도 돌렸다. 야트막한 포대 고지가 보였다. 아군의 관측소와 무반동포가 있던 바로 그 고지였다. 바로 그 너머가 초승달 모양의 ‘크레슨트 비이치’였다. 초승달 해변에서 베트콩들의 기관총 사격에 전우들을 잃고 구사일생, 포대 고지로 올라왔던 한 참전군인에게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천천히 눈길을 오른쪽으로 더 돌렸다. 혼바산, 다비아산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다비아산은, 꼭대기 바로 아래 거대한 비석 같은 바위가 하나 서 있어서 ‘비석 바위산’이라고도 불리던 곳이었다. 무수한 한국군이 희생된 산이었다. 여러 사람들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눈물을 보이면, 동행한 TV 카메라가 접근할 것 같아 한쪽으로 가서 많이 울고 왔다.

우리로 말미암아 죽은 그 강변!

거기에서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90도 돌리면 우리들에게는 공포의 산이었던 혼사레오, 90도 더 돌리면 다시 다농강이었다. 다농 강변은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그 희고 곱던 모래는 해초와 시커멓게 뒤엉킨 채 썩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수천수만 드럼의 경유로 해변을 오염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거북이 모래언덕으로 알을 낳으러 올라온 것은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라고 했다. 한국군이 파묻은 폐유와 경유의 침출물, 새로 들어선 공장이 방류한 폐수 때문에 인근 수역으로는 고기가 잘 모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강변과 해변을 일별하는 일은 내 예감의 슬픈 확인 절차였다. 우리가 죽이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로 말미암아 죽은 그 강변, 그 강변을 끼고 있는 모래언덕, 모래언덕 너머로 펼쳐진 바다의 죽음을 확인하는 슬픈 절차, 인간과 자연의 비극적 관계를 확인하는 또 하나의 슬픈 절차였다.

그렇지 않고? 닌호아에서 나는 확인했다. 다음날, 1번 국도를 타고 닌호아로 내려왔다. 백마부대 참전 기념탑의 동판은 뜯겨져 닌호아 전통관(傳統館)에 보관되어 있었다. 사단 사령부의 정문 기둥은 남아 있었다. 사령부로 오르는 도로의 포장도 심하게 훼손되기는 했지만 일부는 남아 있었다. 연병장 앞의 국기 게양대, 게양대로 오르는 계단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령부 기지는 쓰레기 분리 수거장이 되어 있었다. 사령부 뒤의 야트막한 오가산은, 한 한국 기업이 갖다버린 폐수 때문에 악취가 풍겨 접근이 어렵다고 했다. 뚜이호아의 도깨비 부대, 닌호아의 사령부 자리는 베트남인들에게 버려진 땅, 잊을 수 없는 땅이었다.

마지막 날 반레 시인 만난 일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열일곱살 나이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자원 입대한 사람, 함께 입대한 300명의 동료 중 단 5명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레다. 그는 전사한 295명의 삶을 대신 산다고 했다. ‘반레’는 그의 본명이 아니다. 시인 되기가 소원이었던 전우, 하지만 시인이 되지 못하고 전사한 전우의 이름이란다. 그는 그 이름으로 그 전우의 삶을 시인으로서 살아주고 있단다. 그의 아름다운 소설 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다.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 읽는 일은 전쟁 통에 상처받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그 책에서 보여준 통일의 열정과 도덕적 순결 앞에서 여지없이 부끄러워지면서 나 자신이 한없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어쩔 것인가, 이 부끄러움을. 그들은 우리를 포함한 외세를 몰아내고 힘겹게 통일을 이룬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통일은커녕 30년 전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느라고 또 다른 나라에서 외세의 일부 노릇을 하고 있다. 어쩔 것인가?

나는, 우리 정부가 베트남에 대해 불행했던 과거를 사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 정부도, 한국인에 대해 더 이상의 적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화해할지언정 잊지는 않을 것이다. 무수한 지방 전통관이나 전쟁박물관에서 나는, 잊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읽었다.

으로 유명한 저 강 이름, ‘쏭바’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어머니 강’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그래서 베트남인들에게 신성한 모든 강은 ‘쏭바’다. 뚜이호아를 내려다 보고 우뚝 서 있는 저 산 이름 ‘혼바’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어머니 산’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그래서 베트남인들에게 선성한 모든 산은 ‘혼바’다. ‘바’(어머니)로써 베트남인들은 신성한 모든 ‘쏭’(강)과 신성한 모든 ‘혼’(산)에 애정 어린 모성을, 다정한 육친성을 부여한다.

쏭바강은 우리에게 ‘머나먼 쏭바강’이다. 하지만 그 쏭바강은 멀리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베트남에는 약 2만5천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단다. 우리로서는 베트남인들이, 양민 학살이 있었든 없었든 과거를 잊고 한국인에게도 그런 육친성을 부여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베트남인들도 한국인들이 한국에 있는 베트남인들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한국의 베트남인들이 한강을 ‘쏭바’, 도봉산을 ‘혼바’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그런가?

베트남인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죄의식을 지니고 있는 나는, 한국으로 오는 베트남 노둥자들이 처음 배우는 한국어 중에, “사장님, 때리지 마세요”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베트남 처녀 중매를 선전하는 현수막에 ‘절대 도망 안 감’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죽는’ 줄 알았다.

이밤, 낀까에게 술을 권한다

한국으로 떠나는 동생 까오 쑤언 띤을 배웅하면서 시인 까오 쑤언 선이 썼다는 눈물겨운 시 한편을 덧붙인다. 베트남에 유학 중인 하재홍씨의 번역으로 이라는 계간지에 실려 있던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낀카’는 어려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웃나라로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켜세운 고대 중국 사람의 이름이란다. 무너지는 집안의 생계를 위해 무더운 베트남 땅 전쟁에 목숨을 걸었던 과거의 한국인들을 생각하면서 읽어주면 더욱 좋겠다.

지도는 그만 쳐다보거라

기울어진 시차를 추슬러야지

저 너머 한국, 넒은 땅이다

당연히 우리나라가 아니지. 그럴 뿐이지.

한국은 춥단다, 얘야

하지만 어쩌겠느냐, 그들의 땅과 하늘인 것을

내일이면 너도 낀카처럼 될 거야

이 순간을 지나 궁핍의 날을 넘어서야지.

계곡 물에 발바닥이 이미 닳았지

몇년간의 군대생활, 바람과 안개 너무 충분했지.

더한 것도 무릅써야 해, 그래, 인생길의 한 지점

철없는 아이 순진한 아내를 불쌍히 여겨봐야 소용없구나

삶은 옷과 밥 아주 무겁지, 가거라

낡은 배낭이라도 좋다면 그저 가져가거라

네게 당부할 말은 건강이 황금이라는 것

추운 이국 땅, 지나치게 힘을 쏟지는 말거라

길흉을 어느 누가 알겠느냐,

이 밤, 나는 낀카에게 술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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