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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대로 금융을 살려라

등록 2004-12-10 00:00 수정 2020-05-03 04:23

미국의 진보 경제학자 게리 딤스키 교수…금융 공공성은 마땅히 회복돼야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한국의 금융 역사는 ‘공공성 붕괴’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형화·겸업화 깃발에 따른 무한경쟁의 질주 앞에서 금융의 사회적 책임은 뒷자리로 멀찍이 내밀렸다.

은행들은 예대마진 확대와 갖가지 수수료 신설로 고객들의 주머니를 털어 외국계 자본을 중심으로 한 주주의 배를 불려주는 데 급급할 뿐이다.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단기주의 영업 행태는 저소득층(가계)과 중소기업(기업)을 끊임없이 소외시킴으로써 경제 양극화 확대에 톡톡히 이바지(?)하고 있다. 금융기관들이 망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넣는 예금보험제도가 운영되고 있다는 공공성의 바탕은 까맣게 잊혀지기 일쑤다.

금융노조와 중소기업의 연대

숱한 금융기관들이 외환위기 뒤 죽을 처지에 빠졌다가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났으면서도 국민경제적 과제의 조력자로 나서기는커녕 되레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금융의 공공성은 이제 박물관에 보내야 할 구시대 유물이 된 것일까?

전국금융산업노조와 금융경제연구소(소장 이찬근 인천대 교수) 주최 ‘IMF 금융위기 7년 대토론회’ 참석을 위해 12월2일 한국에 온 미국 진보학계의 대표적 금융경제학자 게리 딤스키(51)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과의 인터뷰에서 “금융의 공공성은 마땅히 회복돼야 하며,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의 공공성 회복을 위해선 시민사회적 관심을 키워내는 게 중요하다는 점에서 노조가 일정 수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형화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정리해고에 직면하고 있는 절실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노조가 한국의 중소기업체들을 끌어들여 연대활동을 통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공공성 붕괴로 가장 피해를 입는 이들 사이의 연대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금융노조와 중소기업 사이의 연대가 금방 가능해질지는 의문이다. 설사 연대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국민경제적 의미’를 띠지 못할 경우 자칫 또 다른 이기주의로 비칠 수 있다. 딤스키 교수도 이를 경계해 성급한 낙관론을 펴기보다는 “연대 활동에 앞서 계층별로 금융 서비스가 어떻게 배분되고 있는지 수치를 확보해 실증 분석 작업을 먼저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금융기관들이 저소득층과 중소기업을 얼마나 홀대하고 있는지 생생히 보여주면 (연대활동의 동력인)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도 무거운 사회적 책임 지워

금융의 공공성 회복이 한국 금융산업 선진화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법도 한데, 딤스키 교수는 “(자본주의의 첨단인) 미국에서도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의 사회적 책임을 무겁게 지우고 있다”며 1975년 통과된 지역재투자법(CRA)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CRA는 해당 지역에서 인종, 소득 수준 등에 상관없이 금융 서비스(예금, 대출 등)에 대한 접근권을 차별 없이 보장하도록 하는 장치다. 또 미국에서는 주택저당대출실적공시법을 두어 계층별 모기지(주택저당대출) 실적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금융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자는 취지에서다.”

딤스키 교수는 “과거 한국에서 은행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은, 정부와 재벌의 브로커(중개인) 또는 하위 파트너(동반자) 역할을 하는 개념이었다”며 “앞으로는 중소기업 지원 확장, 저소득층에 대한 금융 접근권 유지·확대, 지역사회 개발 참여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딤스키 교수는 미국 주류 경제학의 관점과 달리 은행의 특수성, 공공성, 사회적 역할을 중시하는 진보적 금융 이론가로 손꼽힌다. 고등학교 시절이던 1970년대 초, 금융기관에 사회적 책임을 지우는 미국의 CRA 제정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원인을 내부 모순보다 세계 투기자본의 금융 패권 전략으로 보고 있는 딤스키 교수는 합병을 통한 은행 대형화의 앞날을 어둡게 전망하고 있다. 매사추세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브루킹스 초빙 연구원 등을 거쳐 1991년부터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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