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간첩 사건은 북의 체제유지에 대한 불안감 반영…협력정책 유지한 서독의 사례 참고해야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간첩’이란 단어는 다소 생소하게 들린다.
실제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 체포 건수는 거의 없었으며, 북한에서도 북파 공작원을 문제 삼은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이는 남북 당국간 ‘신뢰의 정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로 신뢰하거나 신뢰 구축이 진행되고 있는 관계에서 상대방에 대한 간첩 파견은 무모한 행위로 비친다. 오히려 엄청난 역풍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신뢰를 먼저 깨는 쪽이 받을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큰 탓에 과거 냉전시대와 같은 공작원 파견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고 정보기관 관계자는 솔직히 토로한다. 그러나 의사소통 통로가 막히고,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시점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정보기관의 속성상 어느 쪽이든 비밀스런 첩보활동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북한 당국의 치밀한 공작은 아닌 듯
국가보안법 폐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한 미묘한 시점에 북한의 탈북자 위장 간첩 파견 논란이 여론을 달구고 있다. 정부는 탈북자 가운데 71명을 특수관리 대상자로 지정해 해외여행시 여권심사를 강화하고 간첩활동이 의심되는 6∼7명에 대해선 출국금지 조처를 취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 탈북자는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검찰의 불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국가정보원은 12월2일 국내 정착 뒤 북한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재입국해 조사 중인 이아무개(28)씨가 올해 5월19일 국내 입국 뒤 간첩활동 없이 관계당국에 자수했다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을 두고 한목소리로 “올 것이 왔다”고 말한다. 탈북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면서 이전에 견줘 국내 입국 탈북자들에 대한 사후 관리가 눈에 띄게 느슨해진데다, 이들이 중국 등지에 오래 머물면서 다양한 처세술을 터득한 탓에 좀처럼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정부의 담당관들은 실토한다.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는 지난 9월 말 현재 4800여명에 달한다. 또 일부 탈북자들은 벌써 몇년 전부터 국내뿐 아니라 중국-북한 국경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들락거려온 무용담을 전하면서 관계자들을 긴장시켜온 것으로 알려진다.
구체적인 조사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관계당국이 밝힌 이씨의 드러난 행적은 북한 당국의 조직적 개입과 치밀한 공작으로 보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이씨는 앞서 1997년 탈북해 중국에서 구두닦이 생활 등을 하며 불법 체류자로 머물다 중국 공안에 잡힌 뒤 강제 북송됐다. 그 뒤 보위사령부 중국 지역 공작원으로 포섭돼 활동하다가 2002년 11월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진입해 2003년 1월 국내에 들어왔다. “이씨는 2003년 입국 뒤 국내에서 결혼을 하는 등 평범하게 살다가 북한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입북하던 중에 잡혀 위압 속에서 국내 사정에 대해 보고하고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관계당국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관계당국은 “북한의 지령에 따른 간첩활동은 없었던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4월20일부터 5월 초까지 평남 평성시에 있는 국경경비총국 초대소의 보위사령부 소속 대남공작 지도원과 신의주시의 초대소에서 대남공작 지도원에게 교육을 받고 5월 중순 국내에 재입국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북한 당국으로부터 탈북자동지회와 통일 관련 단체 등에 가입해 활동한 뒤 회원증을 증거물로 갖고 재입북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씨는 국내에 입국한 뒤 중국 내 북한 연락책에게 무사 도착 보고를 한 뒤 불안감을 느끼고 관계당국에 자수해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탈북자 동향에 촉각 곤두세워
그러나 북한이 체제 유지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첩보 수집의 중요성은 더해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북한은 탈북자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게 정보당국의 설명이다. 이씨 사건이 이전과 두드러지게 차이를 드러내는 대목도 북한 당국이 탈북자 동향보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탈북자 단체인 ‘숭의동지회’가 지난 10월 발간한 계간지 에는 중국에서 입수한 북한 내부 문건 내용을 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2월 남한에 입국해 정착한 탈북자들 속에 북한 공작원을 침투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문건은 김 위원장이 국내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인 ‘자유북한방송’에 대해 “해당 부서에서는 이러한 방송 장난을 하려는 자들만은 용서치 말아야 한다”면서 “인민의 이름으로 응당한 징벌을 안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김 위원장은 이어 “경계할 것은 우리 사람들이 직접 나서지 말고 3자들을 동원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말밥에 오르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라고도 주문했다. 물론 이 문건의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씨 사건은 탈북자 문제를 바라보는 북한 당국의 예민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북한은 요즘 미국의 북한 인권법 통과 이후 외부 불순세력의 침투와 연계 차단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심리전 차원의 북한 체제 흔들기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북한 은 12월1일 미국의 북한 인권법 제정 소식을 전하면서 “(법안은) 반공화국 모략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소형 라디오를 우리 공화국 영내에 대량 투입하고 북부 지역에 대한 방송시간을 늘리는 데 해마다 200만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담고 있다”며 강한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동·서독 사례는 오늘날 남북 관계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1970년부터 시작된 서독 정부의 대동독 긴장완화 정책 추진에도 불구하고 동독 정부의 서독에 대한 간첩활동은 줄어들거나 그치지 않았다. 연방내무성 산하 헌법보호청이 펴낸 ‘1976년 연례보고서’는 동독이 서독의 긴장완화 정책을 역이용해 인적·물적 왕래에 편승함으로써 간첩활동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동독의 대서독 간첩활동은 국가보위부(STASI) 산하 중앙경찰국에서 담당했다. 서독 헌법보호청은 74년 당시 약 1만1천명의 동독 간첩이 암약한 것으로 추산했다. 동독은 첩보활동을 동서 체제간 경쟁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평화공존 논리에 따르면 국가간 대화나 협상이 진행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공산당과 자본주의 국가간 이데올로기적 공존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관철을 위한 투쟁의 도구로서 첩보활동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동독, 피난민 납치하기도
당시 동독의 첩보활동 대상은 서독의 정치, 군사, 산업, 학원 첩보 활동을 비롯해 동독에서 온 피난민, 합법 이주자들이 묵고 있던 임시수용소와 정착지 그리고 동독 출신 향우회 등 동독 출신자들에 대한 첩보활동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동독은 1962년 처음으로 자국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합법적으로 허용했으나 이주가 극히 소수에게만 해당되자 많은 동독인들이 필사적으로 서독 탈출을 감행했다. 동독 정부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동독 탈출자에 대한 첩보활동을 강화한 적이 있다. 동독 첩보기관은 탈출한 피난민을 서독에서 강제로 납치해 송환한 뒤 탈출 방조자와 탈출 경위 등을 캐묻기도 했고, 일부러 난민을 가장해 서독으로 탈출시킨 뒤 이를 추적해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정치적 이유로 서독으로 탈출한 것으로 가장한 간첩들은 서독에서 장기간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서독 공안당국의 관심이 없어질 즈음 애초에 의도했던 임무를 수행하는 장기전을 펴는 간첩도 많았다.
당시 슈미트 집권 아래의 사민당 정부는 화해협력 정책이 다른 수단을 동원한 동서 체제간 경쟁의 연장이며, 동·서독간 상이한 체제에 기인하는 이데올로기적 적대감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는 상황의 이중성을 직시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펴는 데 주력했다. 당시 서독 정부는 강한 유감의 뜻을 동독에 전하면서도 동·서독 주민들의 복리와 분단 고통 완화에 기여할 각 분야에 걸친 후속 협약을 체결하는 등 교류협력의 제도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남북한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지속적인 교류협력이 냉전적 정보기관이 갖기 쉬운 불순한 유혹을 떨쳐버리게 하는 가장 유용한 처방임을 인식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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