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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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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끊는 이 맛, 맵게 더 맵게!

등록 2004-11-18 00:00 수정 2020-05-03 04:23

먹자골목 휩쓰는 ‘매운맛’의 유행…경기 침체, 정치적 무기력감 등 바닥을 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일까



매운데도 자꾸 손이 간다. 먹고 나면 또 먹고 싶다. ‘매운맛’ 요리가 유행하는 서울의 먹자골목들을 찾아갔다. 매운맛 중독 현상의 사회적 의미도 살펴본다.


▣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1월11일 저녁 7시 서울 숙명여대 앞 먹자골목. 가을비가 흩뿌리던 이날 한 음식점 앞에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너명 줄을 섰다. 우산을 쓰고 10여분 정도 기다리며 틈틈이 가게 안의 상황을 점검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불닭을 먹으러 온 이들이다. 안을 들여다보니 콩나물 교실처럼 에누리 공간 하나 없이 가로세로 열을 맞춰 20평도 안 돼 보이는 공간에 테이블이 60개쯤 된다. 그래도 손님들은 줄을 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찜닭을 팔았던 이곳은 불닭으로 바꾸고 난 뒤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골목 건너편에도 상호만 다른 불닭집이 성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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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고추 듬뿍 넣은 불닭, 어질어질

매운맛이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혀가 저릿저릿할 만치 매운 소스를 발라 불에 구운 불닭을 비롯해 알싸한 양념으로 무장한 매운 꼬치,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드는 매운 갈비에 매운 꽃게구이, 고추 자장면, 베트남식 매운 볶음밥, 매운 치킨버거까지. 스낵류도 질세라 볶음고추장맛 스윙칩, 매콤한 맛 꼬깔콘을 줄줄이 쏟아놓고 있다. 30년 동안 특유의 짭조름한 맛으로 ‘심심풀이 과자’의 대명사였던 오징어땅콩마저 매콤한 맛으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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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맛 유행이 가장 세게 불고 있는 것은 닭요리 식당이다. 화통한 맛만큼 유행도 화끈하게 불고 있다. 유행 아이템이 재빠르게 진을 쳤다 다음 유행에 떠밀려 서둘러 자리를 내주는 서울 신촌의 먹자골목. 걸어서 10분이면 오갈 수 있을 만한 면적에 최근 한달 사이에 불닭집이 10곳 이상 들어섰다.

‘맛의 계략이 난무하는 곳’이란 전투적인 구호로 손님을 선동하고 있는 한 불닭집에 들어갔다. 6개월 전 문을 연 이 식당 사장 김준이(33)씨는 처음 부천에서 먹어본 뒤 다음날 아침까지도 맵고도 달착지근한 맛을 잊을 수 없어 체인점을 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맵기로는 낙지볶음보다 한수 위인 불닭이라면 자극적인 맛에 두손 두발 드는 젊은이들의 거리, 신촌에서 승부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맵다는 고추장바베큐를 주문했다. 혀끝에 묵직하게 얹힌 양념소스가 점점 입 안으로 통증을 전파시킨다. 한 조각을 다 먹고 나니 혀 안쪽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차가운 맥주에 혀를 담가가며 몇 조각을 더 먹었다. “매운맛은 중독성인 것 같아요. 매운데도 자꾸 손이 가는 거죠. 먹고 나면 그 다음에 또 먹고 싶어지고요.” 김 사장은 손님 중엔 더러 음식을 앞에 놓고 침만 흘리다 너무 매워서 조금밖에 못 먹고 일어서는 손님이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맵게, 더 맵게’를 주문하는 이들이 더 많다고 했다. 그는 청양고추를 듬뿍 섞어 만든 소스가 매운맛을 내는 비결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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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닭 열풍에 불을 지핀 원조 격인 ‘홍초불닭’의 경우 2002년 신촌에서 처음 개업한 뒤 지금까지 전국에 낸 프랜차이즈점이 106곳에 이른다. 2년 전 개업할 당시만 해도 불닭이 뭔지 모르던 때라 홍초불닭의 홍성표 사장은 근처 노래방·술집 직원들에게 음식을 싸들고 가서 먹이면서 반응을 살폈다고 한다. 먹어본 이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홍초불닭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에 홍 사장은 발빠르게 체인점을 모집하면서 몸집을 불려갔다. 홍초불닭의 성공과 함께 강초불닭, 홍이불닭, 홍화불닭, 코리아불닭바베큐 등 수십개의 불닭 브랜드가 생겨나고 있는 형편이다.

빠른 유행의 한켠에는 일찌감치 매운맛의 진가를 알아보고 독자적인 메뉴를 개발해 꾸준히 매출액을 늘려가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용 중국요리는 매워야 한다!

5년 전부터 신촌에서 중국식당 완차이를 운영하고 있는 총복자(48) 사장이 그 한 사례다. 총 사장의 아버지가 태어난 홍콩의 먹자골목 완차이에서 식당 이름을 따왔다는 이곳은 ‘매운홍콩홍합요리’를 절찬리 판매 중이다. “태어난 곳도 중국집이요, 자란 곳도 중국집”이라는 총복자 사장은 홍콩에서 가장 많이 먹는 요리 가운데 하나인 해물요리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운맛을 결합,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현재의 매운홍콩홍합요리를 만들어냈다. 홍콩식도 아니요, 그렇다고 중국에서 맵기로 소문난 쓰촨식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퓨전 아시아 스파이시’ 정도의 형용사를 붙일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홍콩의 조개요리는 별로 맵지 않지만 한국에서라면 매운 해물요리가 성공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죠.” 불닭이 혀 세포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혀 중간과 안쪽을 ‘가격’한다면 홍합요리의 통점은 혀끝에 있다. 홍합을 한점 물면 매운맛은 혀끝에서 시작해 입 안으로 퍼졌다가 날아간다. 그래도 워낙 맵기 때문에 함께 딸려나온 달걀쌀국을 연신 홀짝여야 하지만 홍합 껍질에 붙은 양념까지 핥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하루에 120접시 정도 팔리는 이 매운홍합요리는 점점 인기가 높아져 탕수육을 제치고 현재 이 식당 매출의 40%를 차지한다. 홍합요리 소스에는 사천고추, 청양고추, 그리고 곱고 탐스러운 색깔을 내기 위해 다홍고추 등 세 가지 고춧가루가 들어가는데 완차이에선 매일 고추 6kg 정도를 소비한다고 한다.


‘이열치열’의 계절도 훨씬 지난 요즘 왜 매운맛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인의 입맛이 점점 ‘핫’하게 변해가고 있는 걸까. 매운맛 중독자들은 일시적인 현상일까.

(사계절 펴냄)의 지은이 주영하(정신문화연구원 교수)씨는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의 음식은 점점 더 매워지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김치도 떡볶이도 예전보다 훨씬 매워졌다. 그런데 음식 기호라는 것은 개인의 취향보다도 식품업체의 전략이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한국인은 매운맛을 즐긴다는 자신감을 부추기는 광고·마케팅이 계속돼왔다. 또한 세계 식품업체들의 유행을 주도하는 일본에서도 90년대 초반 고추가 다이어트에도 좋고 머리도 좋아진다고 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는 사회 분위기도 매운맛을 선호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요즘에 유행하는 매운맛은 일단 맵게만 만들면 승부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경기 침체, 정치적 무기력감 등 바닥을 기는 사회 분위기가 자극적이고 매운맛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남미가 원산지인 고추가 전세계로 퍼져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회 변화가 심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지역이, 화이트칼라 계층보다는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고추를 받아들였다.”

요즘의 매운맛엔 감칠맛이 없다?

‘맛의 달인’ 김학민(출판사 학민사 대표)씨는 매운맛의 유행은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운맛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인도·타이·멕시코 사람들과 비교해 특히 더 매운 걸 잘 먹는 건 아니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매운맛은 달콤한 매운맛이지 매움 그 자체로 승부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요즘 매운맛은 이런 전통 맛과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특유의 매운맛은 매운 듯하면서도 엉거주춤한 맛, 즉 감칠맛이 있는데 요즘 유행 음식은 감칠맛이 담긴 매운맛을 강조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자극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요즘의 풍조처럼 매운 것 자체를 끊임없이 높여가려는 것이다.”


매운 맛은 영업비밀이라고요?

청양고추 캅사이신 함량 평균 고추의 6~7배… 농축액으로 더 맵게 만들 수 있어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어떻게 이처럼 매운 걸까. 이유를 물으면 매운맛 식당 주인들은 “영업 비밀”이라고 이구동성 외친다. 창업주와 공장장(소스를 만드는 공장)만이 아는 비밀이라는 것이다. 불닭에 들어가는 매운 양념 소스를 제작하는 한 식품 제조 공장에서 구청에 제조품목 신고를 한 내역을 들여다봤다. ‘고추장·고춧가루·물엿·준백당·풋고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평범한 재료다.

외국 사람들이 그토록 놀란다는,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먹는 한국 사람의 괴력은 사실 우리나라 고추와 고추장이 복합적인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추 자체가 매우면서도 단맛을 가지고 있고, 고추장 또한 콩에서 오는 맛이 짙기 때문이다. 매운 고추의 대명사인 청양고추의 경우 매운맛을 내는 물질인 캅사이신 함량이 300mg/%이다. 미국 고추시장에서 가장 맵기로 이름난 품종인 아바네로가 400mg/%인 것에 비춰보면 ‘충분히’ 맵다. 다만 평균적으로 우리나라 고추는 40~50mg/% 정도로서 이는 세계 고추시장에서 매운 정도가 ‘중하’ 수준이다.

하지만 요즘엔 매운맛도 얼마든지 조절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고추 생산량이 많은 인도·미국 등에선 매운맛의 수준, 색소 등에 따라 필요한 것을 따로 추출해 쓰기 때문이다. 조경현 문옹네식품 사장은 “캅사이신 농축액을 쓰면 얼마든지 매운맛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단, 캅사이신이 지닌 매운맛은 화학적으로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전북대 식품공학과 신동화 교수는 “겨자 성분인 아릴아이소시아네이트 같은 것은 화학적인 제조가 가능하지만 캅사이신은 합성이 어렵다”고 말했다.




고추 먹으니 엔도르핀 나네

알쏭달쏭 매운 맛 의학지식… 니코틴 제거하고 항암효과 내지만 지나치면 위장병

▣ 전세일/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원장

맛을 보는 미각도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에선 미각을 5개로 본다. 단맛, 쓴맛, 짠맛, 신맛, 그리고 매운맛이 그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맛의 종류를 4개로 간주한다. 매운맛은 미각 축에 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맛은 입 안에서 봐야 하는 것인데 매운맛은 아무 데서나 느끼는 감각이기 때문에 맛이 아니라는 것이다. 매운 감각은 손에서도 느낄 수 있고 피부 어디에서도 느끼는가 하면 심지어는 항문에서도 느낀다는 말이다. 설탕이나 소금을 항문에 갖다대도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다나. 그래서 그들은 매운 것은 통증에 가까운 자극적 감각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맛이 6개나 된다. 떫은맛이 하나 더 추가되기 때문이다.
고추에서 매운맛을 내는 것은 캅사이신(capsaicin)이라는 성분인데 고추에 0.2~0.4% 정도가 포함돼 있으며 고추씨에 가장 많이 들어 있고 나머지는 껍질에 있다.
옛날에 일찍이 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 사람들이 흔히 “한동안 매운맛을 못 봤더니 눈이 침침하고 정신이 안 난다”고들 했는데 이 말에도 일리가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캅사이신이란 성분은 다양하게 우리 인체의 생리를 자극하고 있다.
우리 몸에는 싸우거나 도망가기 위해 활성화되는 교감신경과 마음이 안정되고 느긋할 때 활성화되는 부교감 신경이 있는데, 캅사이신은 교감신경을 가볍게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땀이 나고 정신이 번쩍 나는 기분이 든다. 매운맛 자체는 통증에 가까운 감각을 유발하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불쾌감이나 짜증을 나게 한다. 그러나 캅사이신은 통증의 원인 성분인 ‘P물질’을 억제하고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의 차단 역할을 하여 일종의 진통과 마취효과를 낸다.
우리 몸 안의 생리적 환경을 조절하는 물질이 호르몬인데 이 중에는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게 20여 가지나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엔도르핀이다. 그런데 엔도르핀은 기분 좋을 때만 솔솔 분비되는 것이 아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스트레스를 느끼거나 아픔이 있을 때도 우리 몸은 이를 다스리기 위해 엔도르핀을 내보낸다. 매운맛이 뇌에서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한다. 어쨌든 엔도르핀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몸은 편안함을 느끼고 기분이 좋아진다. 캅사이신은 엔도르핀을 비롯한 호르몬 유사물질의 분비를 촉진해 폐 표면에 붙어 있는 니코틴을 제거해주기도 하고, 암세포에 특이하게 세포 자살을 자극하기 때문에 고추의 항암효과는 이미 밝혀져 있다. 또 면역 증강 작용도 있고 살모넬라나 헬리코박터 같은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도 있으므로 염증을 다스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캅사이신은 비타민A와 C가 풍부하고, 대사작용을 활발하게 하여 지방이 축적되지 않도록 하므로 비만을 억제할 수 있고, 식욕과 더위와 추위를 견디는 내력도 증강해준다는 사실을 안다면 왜 여성들이 특히 매운맛을 좋아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좋은 것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병통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나치게 매운 음식을 먹으면 위를 해치고 여러 가지 위장병을 일으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무엇을 하든 제대로 할 때에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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