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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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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 첫삽을 뜨기 까지

등록 2004-11-12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르코산티의 역사와 미래를 찾아서… 건물과 사람이 유기체처럼 작용하는 도시를

▣ 애리조나=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1947년 이탈리아에서 뉴욕으로 가는 배 안에는 한 젊은 이탈리아 건축가가 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포연에 갇힌 이탈리아의 상황은 참혹했다. 그는 출렁이는 대서양을 바라보며 손이 얼어버릴 듯한 알프스의 추위 속에서 망치를 들던 공병 시절과 무솔리니 정권 치하에서 체포당할 위기에 처했던 자신을 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회반죽과 밀가루로 만든 빵을 배급받던 생활도. 그의 이름은 파울로 솔레리다.

건축가 라이트의 공동체에 투신

솔레리와 애리조나의 인연은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로부터 시작된다.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토리노의 한 서점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관한 책을 발견한 솔레리는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편지를 보냈다. 당시 라이트는 탈리에신 웨스트라는 곳에서 공동체를 만들며 대안적인 건축을 실험하고 있었다. 라이트에게 초청을 받은 솔레리는 1947년 뉴욕행 배를 탔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이 이방인 건축가는 35일 동안 뉴욕에 억류되는 등 모진 고생 끝에 “탈리에신, 탈리에신”만을 외치며 기차와 버스를 타고 애리조나에 도착했다.

아르코산티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탈리에신 웨스트에서 라이트의 가르침을 받던 솔레리는 점차 회의에 빠지게 된다. 특히 ‘교외’ 거주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라이트의 도시 구상에 동의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솔레리는 교외의 삶에서 자본주의의 확장욕과 공간의 낭비를 간파했다. 그는 도시의 밀집만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라이트의 공동체에서 다른 실험적인 건축가들과 경험을 쌓은 솔레리는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 다시 뉴멕시코주 샌타페이로 돌아와 한국의 풍경을 제작해 돈을 벌었다. 풍경 작업을 통해 ‘어스 캐스팅’이라는 공법을 개발하게 된 솔레리는 마침내 아르콜로지(생태와 건축의 합성어)의 철학을 바탕으로 모든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관되고 상호작용하는 도시에 대한 구상을 시작한다. “어떤 개념들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피닉스에서 북쪽으로 약 112km 떨어져 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진녹색 협곡이 있는 편평하고 사막성의 땅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르네상스 펴냄)

1956년 솔레리는 부인 콜리와 함께 비영리 교육재단인 ‘코산티 파운데이션’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솔레리의 건축과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코산티 파운데이션에는 솔레리의 철학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1970년 아르코산티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뜨게 된다. 아르코산티의 터는 거대한 암석대지 밑에 지하수가 풍부하게 고여 있어서 매우 이상적이었다.

열악한 재정상황 속에서도 아르코산티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볼트(두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개방적인 작업장)는 이곳에 세워진 최초의 건축물이다. 그 다음 ‘세라믹 앱스’(주로 풍경을 제작하는 주물 공장)와 카페 건물이 들어섰다. 초반 작업이 진행되면서 아르코산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외국의 학생들까지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건설 초기부터 지금까지 아르코산티 살림의 대부분을 관리하고 있는 일본인 건축가 도미야키 다무라도 그 중 한명이다.

아르코산티는 예술 공연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솔레이와 출판인 존 스트로마이어의 대담에는 공연에 대한 인상적인 기억도 찾아볼 수 있다. 아르코산티 건설 초기에 두번의 대규모 음악축제가 열렸다. 특히 흑인 포크가수인 리치 해븐스의 공연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리치 헤븐스가 연주를 하고 있을 때 연기가 갑자기 솟아올랐다. 관객들은 이내 128대의 자동차가 주차장에서 불타고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 화제의 원인으로 담뱃불, 자동차 엔진 과열 등이 지목됐지만 정확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 화제를 계기로 아르코산티는 미 전역의 뉴스거리가 되었다. 현재 아르코산티에는 초창기와 같은 대규모 음악축제는 열리지 않지만, 자그마한 음악회들이 정기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이 공연에는 인근 도시의 주민들도 많이 참석한다.

전체 공정의 3%만 진행

현재 아르코산티는 전체 공정의 3% 정도만 진행된 상태다. 자금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아르코산티의 건축 자금은 풍경 제작, 워크숍 수업료, 기부 등으로 충당되고 있지만, 도시 전체의 건설비용을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 오랫동안 정주하는 거주민보다는 잠시 머무르다 대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 건설을 위한 인력 보충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아르코산티 미디어담당 찰스 프로바인은 “대부분 일에 익숙해질 만하면 떠나기 때문에 건설 진행이 더딜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아르코산티는 천천히 전진한다. 파울로 솔레리는 “아르코산티 건설 작업은 두 세대 이상 걸릴 것이며,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아르코산티 건설이 완료되면 약 5천명의 주민을 수용할 수 있다. 이들은 도시가 지구에 끼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며 도시 환경의 개선에 모범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총 4060에이커(약 490만평)의 터 중 건축물들과 대형 온실은 25에이커(약 3만평)만을 차지할 정도로 밀집될 계획이다. 도시는 솔레리의 아르콜로지 철학에 따라 건물과 사람이 유기체처럼 상호작용한다. 다용도 빌딩, 그 안에 거주하며 일하는 사람,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조명과 냉난방 시스템이 복잡하게 얽힌다. 이런 건물의 복합적 구조에서 주민들은 작업장, 아파트, 사무실, 개방공단, 교육 및 문화 공간 등을 한꺼번에 접한다. 한편으로 건물 설계 단계에서부터 사생활 보호는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대형 온실은 주민들에게 정원을 제공할 뿐 아니라 겨울 난방에 쓰기 위해 태양열을 저장하는 기능도 담당한다.

아르코산티 주민들은 아르코산티의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다. 그들은 “한번 방문한 사람들은 모두 아르코산티의 철학에 영감을 받고 돌아간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미래를 앞당기는 일이 아르코산티 주민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과제다.



아르코산티의 ‘자궁’, 코산티


아르코산티와 별도로 파울로 솔레리는 애리조나 파라다이스 밸리에 ‘코산티’라는 복합적인 돔형 건축물을 건설했다. 그는 아르코산티 구상이 서기 전인 1950년대에 이미 코산티의 실험적 건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코산티 건설의 경험은 아르코산티 설계의 토대가 되었다. 코산티는 현재 솔레리와 그의 스태프들을 위한 거주공간과 작업장으로 쓰이고 있으나 독특한 건축물의 매력 때문에 방문객들도 많이 끌어들이고 있다. 솔레리는 코산티에서 풍경 등을 제작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 아르코산티를 방문한다.
코산티의 독특한 건물들은 이미 건축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아르코산티 건축에도 사용된 어스 캐스팅 공법으로 건설됐다. 흙을 파서 만든 주형에 콘크리트를 붓고, 콘크리트가 굳으면 이것을 캐내는 공법은 풍경이나 그 외 공예품을 만드는 데도 똑같이 적용된다. 때문에 많은 건물들이 땅 밑에 존재하고, 흙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형태는 자연적인 단열재의 효과를 내기 때문에 일년 내내 실내온도가 쾌적한 상태를 유지한다. ‘앱스’라는 건물은 자연적인 태양에너지 이용을 보여준다. 앱스는 라틴어로 4분의 1의 반구형을 뜻한다. 남쪽을 향한 앱스들은 코산티와 아르코산티에서 일년 내내 야외작업장으로 쓰인다. 남향 앱스는 태양광선의 각도 때문에 겨울에는 햇볕이 잘 들고 여름에는 그늘이 진다. 수영장도 남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겨울에도 그다지 차갑지 않다.
코산티의 건축물들은 이렇듯 환경친화적인 방식으로 제작됐다. 건물의 구조는 혁신적인 건축기술과 함께 매우 창의적인 디자인 요소를 반영한다. 그러나 코산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솔레리가 제작한 공예품들이다. 이것들은 판매를 실내와 실외 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그 중에서 풍경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독특한 디자인과 문양, 청명한 소리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다(방문 정보는 웹사이트 www.arcosanti.org
나 이메일 maryhoadley@arcosanti.org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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