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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개방 유예 협상은 성공적인가

등록 2004-11-05 00:00 수정 2020-05-03 04:23

10년 미루되 8% 의무 수입으로 방향 잡은 정부…협상 결렬 두려워 말고 6%로 막아야 한다는 지적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국내 쌀시장 개방 확대를 둘러싼 국제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정부는 지난 5월부터 미국·중국·타이 등 9개 이해당사국과 추가 개방 일정과 범위 등 쌀 관세화 유예협상을 잇따라 벌여온 데 이어 11월 중 장관급 대표단을 미국과 중국에 보내 최종 담판을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11월 말쯤엔 잠정 합의 사항을 일반에 공개해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도 거칠 방침이다.

관세화 하든 안하든 별 차이 없어

윤장배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은 “아직 몇몇 쟁점이 남아 있지만, 이견을 많이 좁힌 상태”라며 “지금은 우리가 수용하느냐 마느냐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쌀 협상은 우리나라가 지난 1994년 맺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에 따라 쌀의 관세화(수입 자유화) 유예 연장을 위한 협상을 올해 안에 마무리짓도록 한 데 따라 진행돼왔다. 당시 협정은 10년간 관세화를 미뤄주는 대신 일정 규모의 외국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도록 했다. 지금은 1986~88년 평균 국내 소비량(513만t)의 4%(올해 20만5천t)에 이르는 쌀을 수입하고 있다.

정부는 관세화 유예를 목표로 삼아 협상을 진행해왔다. 지금까지 진행된 협상도 이런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미국과 벌인 협상에서 정부는 쌀 수입 자유화를 10년 동안 미루되 최소 시장접근(MMA) 물량을 지금의 두배인 8% 수준으로 점차 늘리는 쪽으로 잠정 합의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화 유예가 애초 목표였으니, 정부의 협상은 성공적인 것으로 봐야 할까?

농촌경제연구원은 쌀을 관세화하는 경우 2010년 MMA 물량이 37만3천t(개발도상국 지위 유지 때)으로, 평균 국내 소비량(1999~2001년 기준)의 8.2%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현재 진행되는 협상대로 MMA 물량을 늘릴 경우 관세화를 하든 않든 간에 실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게 되는 셈이다.

더욱이 관세화 유예 때 적용되는 MMA 물량의 기준 연도는 1986~88년이어서 실제 비중은 8%를 훨씬 넘게 된다. 쌀 소비량이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는 쌀의 양은 1990년 120kg, 95년 109kg에서 지난해에는 83kg까지 떨어졌다. 예전 기준에 따른 MMA 물량이 현재 소비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그만큼 올라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박진도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쌀 소비 감소 추세로 보아 2013년쯤이면 실질적인 MMA 물량이 국내 소비량의 13% 정도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양적인 문제와 함께 쌀 개방의 질적 내용이 달라지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쌀을 수입하더라도 쌀과자 등 ‘가공용’으로 제한하고 있는 반면, 현재 진행되는 협상에서는 MMA 물량 가운데 일정 부분(30~40%)을 시중에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에 합의를 이뤄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동네 할인점에서 값싼 외국 쌀을 살 수 있게 되는 셈이어서 쌀값 하락에 따른 농가 경제 부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국내 쌀값은 국제 가격의 4~5배 수준인데다 쌀소득은 전체 농업소득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협상 결렬되면 바로 수입 자유화?

정부는 나름대로 충격 완화 대책을 마련 중이다. 외국 쌀을 정부가 전량 수입한 뒤 민간에 공매하는 방식을 채택해 수입쌀이 한꺼번에 시중에 풀리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또 국내 농가에 대한 재정 지원을 통해 최근 3년간 평균 수준인 쌀 80kg당 17만원 정도의 수입을 보장하는 방안도 마련 중이다. 그렇지만 쌀값 하락폭이 클 경우 재정 부담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쌀 관세화는 처음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방안이었는데, 정부가 관세화와 관세화 유예의 실익을 비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상황을 호도하고 스스로 입지를 좁혔다”고 비판했다.

“지난 8월 세계무역기구 일반 이사회는 올해 말로 잡았던 새로운 도하개발어젠다(DDA) 시한을 연장하기로 하고, 내년 12월 홍콩에서 각료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앞으로 수입쌀에 대해 300%대의 관세를 매길 수 있을지, 200%대의 관세를 매길 수 있을지에 대한 세부 원칙(Modalities) 협상 타결이 올해 안에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송 변호사는 “이 때문에 쌀 협상은 애초부터 관세화를 유예하되, MMA 물량을 얼마로 할지를 둘러싼 것이었다”며 “관세화 유예 자체를 협상의 성공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 협상은 최종 타결에 이르지 않아 결과를 못박아 장담할 수 없다. 협상 시한을 넘겨 내년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관측이 있고, 이 경우 정부의 설명과 달리 곧바로 관세화 의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또 정부 차원에서 합의를 이루더라도 협상 결과에 따라선 농업계와 국회의 반대로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

만약 협상 시한으로 제시된 올해 말까지 쌀 관세화 유예 협상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내년 1월1일부터 쌀 관세화 유예가 중단되고, 우리나라는 농업협정의 일반원칙(4조 2항)에 따라 쌀 수입 관세화로 곧바로 전환해야 하는 것일까?

근본적 과제는 국내 농업 혁신

농촌경제연구원의 임송수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와 협상 상대국이 서로 관세화 유예 조건에 관해 만족하지 못하고 합의에 실패할 경우 우리나라는 농업협정에 따라 관세화를 시행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세화 유예’는 반드시 협상을 거쳐 합의해야 하는 사항인 반면, ‘관세화’를 규정하는 부속서 5조 10항은 ‘특별 조처(관세화 유예)를 지속하지 않기 위한 결과’라고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관세화는 ‘우리 스스로 관세화를 선택한 결과’와 ‘관세화 유예를 위해 협상했지만 이에 합의하지 못한 협상 결렬의 결과’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임 위원은 “다만, 관세화를 시행하려면 국내법 개정 등 소정의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내년 1월1일부터 관세화가 곧바로 단행되는 것은 아니다”며 “따라서 ‘자동 관세화’보다 ‘관세화 의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송기호 변호사는 “협정문을 우리에게 너무 불리하게 해석한 것”이라며 “부속서 5조 10항의 ‘특별 조처를 지속하지 않기 위한 결과’는 ‘(협상 당사자간에) 조건이 맞아 관세화하기로 합의한 경우’를 일컫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와 농촌경제연구원이 자동관세화론을 펴다가 8월부터 관세화의무론으로 돌아섰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의 주장은 뭐였냐”고 반문했다. 결국 협상 결렬에 따르는 파장을 과도하게 부풀려 위기를 조장하기보다는 시간이 남아 있다는 점을 지렛대로 삼아 농가 경제에 끼칠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진도 교수는 “협상에는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우리쪽 주장만 일방적으로 관철할 수 없겠지만, 관세화 유예의 실질적인 효과를 약간이라도 보려면 MMA 물량을 6% 정도에서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인 과제는 관세화 유예 기간 동안 국내 농업의 혁신을 이뤄 개방에 대한 내성을 키우는 것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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