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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파견’에 허가증 주나

등록 2004-09-17 00:00 수정 2020-05-03 04:23

파견직 부추기는 파견근로법 발표… ‘제조업종’ 마지막 포위한 채 대상업종 다 풀어버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정부가 9월10일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발표했다. 노동부가 정기국회에 제출하기로 한 비정규직 법안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과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으로 △현재 26개 업종(컴퓨터 전문가·청소·수위 등)만 허용하는 파견업종을 일부 금지업종(선원, 의료, 유해·위험업무 등)을 제외한 전 업종으로 전면 확대하고 △파견기간(현행 2년)을 3년으로 늘리고 △기간제근로자 계약기간(현행 1년)을 3년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정규직 압박용 가능성

가장 주목을 끄는 건 ‘파견근로 전면 확대’다. 노동계는 고용불안에 내몰린 파견 노동자의 차별을 해소하기는커녕 모든 노동자를 ‘파견 인생’으로 만드는 법안이라며 노동부 장관 퇴진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불법 파견이 만연한 노동시장의 차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오히려 차별을 합법화하는 법안이라는 것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불법 파견으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떳떳한’(?) 파견 노동자 자격증을 주겠다는 것이냐”며 “모든 노동자에 대한 이중 착취를 조장하는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파견업종 대폭 확대에 따라, 노동자의 경력 형성을 중시하지 않는 업체나 노동조합의 방어벽이 없는 중소업체에서는 정규직을 파견 노동자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길이 트였다고 할 수 있다. 사용자쪽은 “인원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인데 감원 조처로 회사를 나갈래? 아니면, 일은 계속하도록 해줄 테니 대신 파견직을 택할래?” 하는 식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을 압박할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가 사용자들의 손에 막강한 칼을 쥐어준 것이다.

정부는 3년간 파견직을 사용했을 경우 그 뒤 3개월 동안은 같은 업무에 파견직을 못 쓰도록 ‘휴지기’를 뒀기 때문에 “불편이 뒤따라” 파견근로 자체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석달간의 ‘불편’ 때문에 파견직을 쓰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는 사용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상당수 국가에서는 파견직 휴지기를 1년 정도로 규정하고 있는데, 노동부는 법안 마련 과정에서 1년, 8개월 등 여러 안을 검토하다 결국 3개월로 대폭 축소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용자들이 파견업종 확대를 계속 요구해온 배경에는 비용 절감이란 측면도 있지만 또 다른 전략도 깔려 있다. 노동자와 노조가 차별 시정을 요구할 경우 “나는 당신의 직접 사용자도 아니고 교섭 당사자도 아니다. 고용계약을 맺은 파견업체 사장과 얘기하라”는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비켜갈 수 있기 때문에 정규직을 파견 노동자로 대체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파견법의 핵심은 과연 조선·자동차·석유화학 등 제조업종에도 파견 사업의 길을 터줄지 여부다. 정부는 하청도급을 위장한 ‘불법 파견’이 횡행하는 제조업종에 대해 현행대로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업무’는 파견 노동자를 쓸 수 없도록 했다. 다만 일시적·간헐적으로 인력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업무에 대해서도 최장 6개월간 파견직을 사용할 수 있다. 비록 이번 법안에 제조업종이 빠져 있지만, 노동계는 “거의 모든 업종으로 정부가 파견 사업을 확대한 것은 제조업종을 포위하기 위한 사전 조처”라고 본다. 일본의 경우 근로자 파견사업을 도입하면서 처음에는 일부 업종만 제한적으로 허용하다가 업종을 단계적으로 확대한 뒤 최근에 제조업종까지 모두 풀어줬는데, 우리 정부도 일본을 그대로 따라갈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조만간 “다 풀렸는데 마지막 남은 제조업종도 이제 파견을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쪽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불법 파견을 일삼는 제조업종 사용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면죄부를 주는 격이 된다.

3년 주기 비정규직 확산될 듯

2003년 말 현재 노동부에 등록된 근로자 파견업체는 1114개(공식 파견 노동자는 5만3천명)다. 파견 노동자의 임금을 중간에서 합법적으로 착취하면서 이른바 ‘사람 장사하는’ 파견업체들은 그동안 제조업종까지 파견 사업을 확대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파견업이 허용된 청소·수위 업종은 임금 수준이 워낙 낮은 탓에 돈벌이가 안 돼 결국 폐업하는 파견업체도 흔하고, 일부 업체는 돈벌이가 되는 제조업쪽으로 눈을 돌려 불법 파견에 나서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 노동시장은 이제 파견직이든 계약직이든 ‘3년 주기’로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비정규직이 더 확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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