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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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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너무 민감하다

등록 2004-09-17 00:00 수정 2020-05-03 04:23

양강도 폭파사건을 계기로 돌아본 북-미… 부시 행정부의 자극에 판단력 흐려지면…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북한 양강도 김형직군 월탄리에서 9월8일 대규모 폭발이 일어난 징후가 포착되면서 한반도가 뒤숭숭하다.

지난 4월 발생한 용천역 열차 폭발 사건이 그러했듯이, 이번 사건도 온갖 그럴듯한 설만 남긴 채 명확한 원인 규명 없이 꼬리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 이번 사건을 놓고 핵실험 가능성, 미사일 발사 관련 사고설, 반김 세력에 의한 거사설 등 온갖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으나 어느 주장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나아가 실제 대형 폭발이 발생했다는 증거도 아직은 그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마침 이런 터에 나온 백남순 북한 외무상의 해명이 눈길을 끈다. 백 외무상은 이번 폭발이 수력발전 건설계획의 하나로 산 하나를 계획적으로 폭파한 것이라고 북한을 방문 중인 빌 라멜 영국 외무차관에게 해명한 것으로 영국의 가 9월13일 보도했다. 이는 베이징 소식통이 폭발이 발생한 지점에서 대규모 공사가 있었다는 점을 들어 공사용 폭약의 폭발로 인한 단순 사고일 가능성도 있다고 전한 대목과 일치한다. 이 소식통은 직경 3~4km의 버섯구름이 발생하고 용천역 사고보다 규모가 컸다면 중국 집 안에서 폭발음과 구름이 관측되고 유리창 진동 등 영향이 감지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내 지진관측소 관계자도 지난 8일과 9일 사이 지진이나 폭발로 인한 진동 신호는 없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와 교류, 미국과 전쟁?

그러나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사실은 8일 밤 현지로부터 지진파가 관측됐고, 그 다음 현상으로 9일 아침에 상당히 많은 양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이상징후가 관측됐다는 것이다. 이런 엇갈린 해석 사이에서 백 외무상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한 증거도 확보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폭발이 일어나긴 했으나 언론보도에서 알려진 만큼 대규모 폭발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또 폭발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럴듯한 추론이 가능한 대목은 과거의 전례로 보아 북한이 갈수록 강화되는 미국의 군사적 공세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정보 계통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응 무기가 핵인지 미사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북한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막강한 무력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과정에서 고의든, 그렇지 않든 이런저런 사고 발생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들은 북한의 초조감이 오판을 불러올 수도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이번 폭발 사고는 매우 불길한 징조라고 귀띔한다.



북한은 지난 8월16일 을 통해 “우리 공화국(북)을 노린 미국의 핵 선제공격 기도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며 “우리나라(북)와 미국이 기술적으로는(정전 협정상으로는) 아직도 전쟁 상태에 있는 조건에서 선제공격은 미국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는가 하면, 올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더욱 예민한 반응들을 내보이고 있다. 은 9월10일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소식을 처음으로 상세히 전하면서 미국의 첫 번째 해외 침략 공격 대상은 북한이고 미국도 이를 감추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나온 발언들은 “부시 공화당의 재집권 4년이 허용될 때 인류는 과연 어떤 전쟁의 악몽 속에 말려들 것인지 앞날에 대한 깊은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사실 오늘날 북한은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장경제 정착을 위해 국제사회와 교류 협력을 강화해나가는 한편, 미국과는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호전성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 최근 평양에 다녀온 주한 유럽연합(EU) 대표부 관계자는 북한이 2002년 7월1일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단계적으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며 관련법 개정 등 후속 조처를 곧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8월31일부터 9월4일까지 북한의 시장경제 이행 문제를 다루는 북한과 유럽연합 사이의 대규모 워크숍이 평양에서 공개적으로 열렸다. 이 자리에 북한쪽에서는 외무성 등 관련 부처, 기관, 연구소, 대학에서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미국 심리전에 말려들고 있나

실제로 북한은 팽팽한 전선을 형성하는 미국과의 관계를 빼면 다른 나라들과는 그 어느 때보다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9월8일 북한 양강도 지역 대규모 폭발 사건으로 국제사회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13일에도 평양에는 중국과 러시아, 영국 등 3개국의 고위급이 동시에 평양을 방문 중이었고, 국제영화제와 도서전을 열어 많은 외국 손님들을 유치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는 9월9일 국제사회가 2002년 경제 개선 조치로 과도기를 겪는 북한을 지원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한 현실적 방안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유독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사뭇 다른 긴장감이 감지된다. 미국의 부시 정권은 북한의 긍정적 변화는 거의 무시하면서 북한을 자극하는 정책만 취하고 있는 모양새다. 북한은 ‘작전계획 5027-04’, 미 해군 스테니스 항모 전단의 한반도 근해 배치계획, 미국의 주한미군 무력 증강 계획, F-117 스텔스 전략폭격기·F-15E 전폭기, 을지포커스렌즈 한·미 합동군사훈련, 미 의회의 북한인권 법안 통과 움직임 등에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바싹 긴장할 만한 일련의 사태가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북한의 경계심을 통상적 엄살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사태가 그렇게 간단치 않은 셈이다. 미국은 북핵 문제의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면서도 모든 수단을 강구할 수 있다는 경고를 잊지 않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은 지난 8월8일 미국은 북한 핵 프로그램을 분쇄하기 위해 ‘은밀한 조치’를 포함해 많은 수단들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힌 바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북한의 갈지자 행보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문가들은 지금 북한이 미국의 고도의 심리전에 말려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시한다. 정보기관의 한 전문가는 “사실 약소국의 입장에서는 실제 전쟁보다 그 이전의 심리전이 더 두려울 수 있다”면서 “북한은 피를 말리는 긴장이 지속되면서 판단력이 흐려져 자신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즉, 미국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이를 받아들이는 약소국은 극도로 예민하게 대처함으로써 악수를 둘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너무 신중하다 보니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각종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또 미국이 비록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고 해도 북한은 그냥 부담 없이 6자회담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얻을 것이 많음에도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행태 등은 북한의 과민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사고’를 예방하는 방법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11일 남한 과학자들의 핵 관련 실험에 대해 미국의 이중 기준을 문제 삼은 뒤 6자회담 개최까지 결부시키는 행위 등도 올바른 선택은 아닌 셈이다. 북한이 6자회담에 참석해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지속적인 성의를 보이는 행동은 대미 관계에서 큰 진전이 없더라도 국제사회으로부터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내심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중국, 러시아 그리고 남한과도 경제적 실리를 챙기면서 상호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다질 수 있다. 그러면서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는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일거수일투족에 과민하게 대응함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다 놓치는 우를 범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으로서는 북한의 민감도를 낮추는 게 또 다른 ‘사고’를 예방하는 지름길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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