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치’ ‘환치기’거래에서 ‘증여성 위장’까지… 국내 투자여건 악화되면 자본탈출 발생 가능성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사는 한인 ㄱ씨는 최근 현지 유학생 ㄴ군한테 50만달러를 대줬다. ㄴ군은 이 돈으로 LA 주변에 있는 주택을 한채 구입했다. 대신 서울에 살고 있는 ㄴ군의 부모는 돈을 빌려준 ㄱ씨 앞으로 서울의 한 아파트를 사줬다. 이 아파트 명의자는 서울에 사는, ㄱ씨의 여동생으로 돼 있다. LA에 사는 ㄱ씨와 서울에 사는 ㄴ군의 부모 사이에 50만달러가 서로 오간 것인데, 실제로는 돈이 송금되지 않고 따라서 외국환은행을 거치지 않은 채 외화 송금이 이뤄진 셈이다. 이른바 재산 해외 빼돌리기 신종 수법으로 불리는 ‘스위치’ 거래다. 이런 불법 외환 거래는 흔히 알려진 ‘환치기’ 수법과 비슷하다. 하지만 스위치 거래는 환치기 계좌조차 없이 송금이 이뤄지기 때문에 흔적을 잡기도 어렵다.
올 1~7월 14조원이 해외로 빠져나가
금융감독원과 국세청이 최근 재산 불법 해외 유출이 심상찮다고 판단하고 해외 송금액 10만달러 이상 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상한 거래를 집중 조사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7월 중 서비스 수지의 경우 해외여행과 유학, 연수 비용을 합친 대외 지급액은 모두 65억2천만달러로 나타났다. 경상이전수지쪽을 보면 개인 증여성 송금은 1∼7월까지 41억2천만달러가 지급됐다. 이민에 따른 해외 이주비 및 재외 동포의 재산 반출을 포함한 자본이전수지 지급도 올 1∼7월 중 10억2천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8억3700만달러)에 견줘 대폭 늘었다. 결국 해외 직접투자를 빼고, △증여성 송금 △유학연수·해외여행 비용 △이민·재외동포 재산 반출을 합쳐 올 1∼7월 중 116억6천만달러(약 14조원)가 해외로 빠져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식 통계에 잡힌 해외 유출액일 뿐이다. 국내 뭉칫돈이 미국·중국 등지로 몰리면서 현지 부동산 값이 폭등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LA 한인타운에는 ‘외화 송금 알선’ 광고가 봇물을 이루고 한국인들의 ‘묻지마 투자’로 자금이 몰려들면서 주변 집값이 뛰는가 하면 한국계 은행의 예금 규모가 급속히 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해외로 나가기 위한 ‘대기성 자금’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화 예금도 급증하고 있다. 국내 외국환은행의 거주자(개인 및 기업) 외화 예금 잔액은 지난 6월 말 현재 214억달러로 지난해 말(155억달러)보다 대폭 늘었다. 이 중 개인 외화 예금 잔액은 지난해 말 44억달러에서 올 6월 말 현재 70억달러로 증가했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유학 등 외화 수요 증가로 인해 개인의 외화 예금 증가세가 뚜렷하다”며 “부자들이 한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에서 국내와 해외에 돈을 분산시켜 놓으려는 의도가 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2001년 외환 자유화 조처로 외화의 해외 송금은 완전 자유화됐다. 2002년부터는 해외 동포의 금융 자산 해외 반출도 완전 자유화됐다. 떳떳하게 세금 물면서 해외로 송금하는 건 무제한 가능한 것이다. 다만 △일반 증여성 송금액의 경우 건당 1천달러 이상 △연간 누적 송금액 1만달러 이상 △유학생 경비 10만달러 이상은 국세청에 통보된다. 이렇게 통보된 송금액은 거래 은행이 지정돼 사후 관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외환·세무 당국에 포착되지 않은 채 정해진 송금 목적과 달리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송금이 성행하고 있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법은 ‘증여성 송금’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해외로 외화를 송금할 때는 지급 증빙 서류에 계약서, 수입·수출 신고서 등을 첨부해 그 사유를 밝히는 게 원칙이다. 지급의 사유와 금액을 명확히 입증하지 않고서 보내는 돈은 증여성 송금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증여성 송금은 주로 대가 없이 친지 등에게 보내는 돈인데, 실제로는 증여성 송금액 중 일부가 본인의 해외 부동산 구입 자금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세청쪽은 “보낸 돈의 출처가 세금을 낸 정당한 돈인지, 세금을 피하고 형성된 돈인지 탈세 혐의를 추적할 수 있다”며 “자신의 연간 소득보다 훨씬 많은 돈을 송금한 사람이라면 자금 출처 조사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환치기 금액 884%나 급증
개인 또는 개인 사업자들이 ‘해외 직접투자’라고 신고한 송금액 중에도 실제로는 투자가 아니고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기 위한 자금이 섞여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부동산·서비스업 해외 투자는 올 상반기에 266건(2억5백만달러)으로 지난해 상반기(153건·1억5천만달러)보다 대폭 늘었다. 올 2분기 해외 직접투자 가운데 50만달러 이하의 소규모 투자는 774건으로 전체 투자 건수의 92.6%를 차지한다. 한국수출입은행쪽은 “개인 또는 개인 사업자의 올 2분기 해외 직접투자는 407건, 1억200만달러로, 분기 실적으로 최고 수준”이라며 “직접투자라고 신고하고 나간 자금 중에서 실제 목적과 달리 투자가 아닌 개인 해외 부동산 구입 자금으로 흘러들어간 돈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만 합법적인 해외 직접투자라고 신고했을 뿐 이 자금으로 다른 사람 명의로 해외에서 부동산을 구입하는 사례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환치기’는 아예 당국의 외환 거래망을 피해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키는 방식이다. 환치기는 원화와 외화를 거래하는 사람끼리 두 나라 사이에 각각 환치기 계좌를 터놓고 외국환은행을 거치지 않은 채 서로 돈을 주고받는 수법이다. 예컨대 제3자 명의로 된 국내 환치기 계좌에 원화를 입금하면 인터넷 뱅킹으로 입금내역을 확인한 뒤 서로 미리 합의한 환율을 적용해 미국 현지에 개설된 환치기 계좌를 통해 달러로 지급받는 식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환치기를 이용한 불법 외환 거래는 올 상반기에 245건, 826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건수로 79%, 금액은 884%나 급증했다. 관세청 외환조사과쪽은 “환치기는 세무 조사 등을 우려한 부유층이 송금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자금을 국외로 빼돌리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라며 “요즘 일부 기업들이 조세 피난처를 통해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킨 혐의를 잡고 조사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부유층 개인들의 재산 해외 도피뿐 아니라 기업 및 개인 사업자들의 재산 빼돌리기도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은행 해외이주센터 박찬용 차장은 “LA의 집값 급등 현상은 개인들의 해외 송금액으로는 답이 안 나오고 환치기 또는 기업들을 그 원인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경우 수출입과 로열티 지급 등을 가장해 자금을 빼돌리고, 개인 사업자들은 물품이 오가지 않는 서비스 거래 명목으로 자금을 도피시키는 방식을 주로 쓴다. 수출 대금을 회수하지 않고 현지에서 받아 해외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수출입 가격을 부풀리거나 낮춰 이면 계약을 한 뒤 그 차액을 국외로 빼돌리기도 한다. 실제로는 돌멩이 몇개 실어오면서 무역 대금을 가장해 거액을 해외로 도피시키는 사례도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전상준 연구위원은 “증여성 송금 등 개인 자금의 해외 유출이 증가하고 있지만 정치·경제적 상황 악화에 따른 자본 탈출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며 “그러나 향후 국내 투자 여건이 악화될 경우 진정한 자본 탈출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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