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인질극 ‘비인도적 진압’ 비난 일어… 러시아 정부 ‘테러와의 전쟁’도 명분 상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박현봉 전문위원 parkhb_spb@yahoo.com
미국에서의 지난 2001년 9·11 테러 사태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에서 두대의 여객기가 거의 동시에 공중 폭파되고 대규모 인질 사태 등 테러가 이어지면서 전세계를 테러 공포로 다시 내몰고 있다.
러시아를 테러 정국으로 몰아갔던 잇달은 테러는 지난 9월3일 체첸 반군 테러범에 의해 인질극이 벌어지던 러시아 남부 북오세티야 지역 제1소학교에 러시아 특수부대 요원들이 진입해 1천여명의 대규모 사상자를 내고 종결되면서 겉으로는 일단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영 는 이날 끔찍한 인질극 사태 장면을 보여주며 “정부가 고의로 학교에 인질로 잡혀 있던 학생과 학부모, 교사 수를 줄여 발표했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증언을 방영해 파문을 확산시키고 있다. 크렘린의 정치 자문역 글레브 파블로프스키는 “그것(거짓말)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짓말은 우리를 약화시키고 테러리스트들을 더욱 폭력적으로 만들 뿐”이라고 날선 비판을 내놓았다.
연이은 테러, 공포의 도가니
우연하게도 테러 진압 다음날인 9월4일은 1999년 모스크바와 볼고돈스크 및 부이나스크 일대 아파트 폭파 사건 등 체첸 반군의 대규모 테러 행위가 일어난 지 꼭 5년이 되는 날이었다. 5년 전 당시 체첸 반군이 저지른 아파트 폭파 테러 사건은 옐친을 정치적 위기로 내몰아 그해 말 갑작스레 사임케 하는 데 일조했다. 반면에 이 테러 사건은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을 권력 실세로 등장하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뒤 푸틴의 정치적 행보는 이른바 ‘체첸 정국의 프리미엄’을 안고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리고 5년 뒤 푸틴은 집권 2기를 맞이했고, 대내외적인 안정이 정착되는가 싶더니 참혹한 테러가 터지는 바람에 그에게도 적잖은 시련과 후유증을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 자신이 과의 회견에서 지적했듯이, 10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러시아는 전쟁과 테러와는 전혀 무관한 초·중등학교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대규모 테러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사실 그간 언론에서는 잠잠했지만 체첸 지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체첸 반군의 게릴라식 공격이 소나기처럼 감행돼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체첸 지역에 평화를 선포하고 민선 대통령을 선임하는 등 러시아 연방의 적극적인 평화 공세에도 당국의 공식 발표와는 달리 완전한 평화와는 거리가 먼 상태가 이어졌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지난 5월9일에는 옛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식장에서 당시 친러시아계로 알려진 민선 체첸 대통령 아흐마드 카디로프(53)가 폭사당하는 변을 겪기도 했다. 최근에는 8월21일 대통령 보궐선거를 8일 앞두고 체첸 수도 그로즈니의 경찰서와 선거관리위원회가 습격당해 수십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이때 푸틴 대통령은 사건이 일어난 지 몇 시간이 채 경과되지 않은 시점에 현장을 전격 방문하는 등 푸틴 특유의 무용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승승장구 푸틴, 악재 만나다
그러나 이런 푸틴의 과감성과 무용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8월24일 모스크바를 떠나 각각 러시아 남부 휴양지인 소치와 볼고그라드로 향하던 투플레트 여객기 두대가 거의 동시에 공중에서 연쇄 폭파되면서 러시아는 이후 10일 동안 잇달은 테러 공세에 전국민이 몸을 떨어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객기 폭파 사건 조사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 8월 말 모스크바 시내 리지스키역과 지하철 역사 리지스카야 가까이에 주차돼 있던 두대의 차량이 또 연쇄 폭발함으로써 테러의 악몽이 전 러시아로 번졌다. 그 다음날 러시아 당국이 여객기 폭파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2명의 여성 가운데 나가예바라는 성을 가진 테러범의 여동생이 지하철 역사 주변 테러범일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면서 체첸 반군의 이른바 ‘가미가제식 테러’에 대한 우려와 경계가 확산됐다.
이처럼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더니 9월1일 마침내 초·중등학교에서 대형 참사가 터진 것이다. 이날은 가을학기에 새 학년이 시작되는 러시아에서 이른바 ‘지성의 날’로 전국이 축제 분위기에 접어드는 시점이다. 러시아 남부 북오세티야 제1초·중등학교가 테러범들로 추정되는 일당에게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짐으로써 러시아 전국은 다시 한번 테러 공포에 휩싸이게 됐다. 무려 52시간여 만에 인질극은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계획적이라기보다는 우발적인 인질의 탈출로 비롯된 러시아 특수부대 요원들의 강경진압 작전으로 9월3일 오후 일단락됐다. 그러나 짧은 시일 동안의 연쇄 테러극, 특히 무고한 아동들이 대부분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 정부가 인질의 생명보다는 테러범 처단에 더 초점을 맞춘 듯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테러에 대항하는 러시아 정부의 태도가 비인도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푸틴의 테러범에 대한 강경 태도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또 일관성이 엿보인다. 1994년 1차 체첸 전쟁이 발발하고 6개월 남짓 흐른 뒤 체첸 반군은 러시아 남부 체첸 인근 지역인 부도노프스크의 한 병원을 점거해 2천여명의 인질을 잡고 있었다. 이때 러시아 정부군은 6일 동안 인질범과 대치했는데, 당시 옐친 대통령은 너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여론이 크게 악화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푸틴은 일찍이 연방보안국 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부터 체첸 반군에 대해 일대 전쟁을 선포하는 등 지금까지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표방해왔다. 그 결과 나라 안팎으로 옐친 시절의 나약한 러시아에 염증을 느낀 러시아 국민들의 총아로 떠오른 푸틴은 이른바 ‘체첸을 넘어 대권까지’ 순조로운 정치적 상승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집권 1기 동안 안보 관련 부서들을 완전히 장악한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인사들을 측근으로 중용해 정치와 행정 분야 등에서 안정을 누렸다. 또 그는 옐친 정부 시절 고질병으로 여겨지던 이른바 ‘올리가르히’라 불리던 경제 독과점 세력을 과감히 정리하는 등 유례없는 정치·경제적 안정 가도에 들어섰다. 그러나 자신을 대권으로 이끌었던 체첸 문제는 이번에는 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 악수로 돌변한 것이다.
맘껏 오페라도 즐기지 못하는 국민
인질극 종결에 맞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서방 국가들은 이번 사태로 ‘테러와의 전쟁’에 큰 명분을 얻기나 한 것처럼 푸틴의 강경 테러 정책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다수 국가들이 테러 진압 과정에서 특히 어린이가 대부분이던 인질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테러범 처단에만 급급했던 러시아 당국의 비인도적 처사를 크게 꾸짖고 있다. 이에 따라 푸틴의 강경 테러 진압 정책은 그의 정통성이 도전받고 있는 징후라는 의견도 언론에서 솔솔 새어나오고 있다. 9월2일치 일간 에서 저명한 사회학자 유리 레바다는 전국 여론조사기관의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한 자리에서 “러시아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테러가 체첸과의 대규모 전쟁의 명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푸틴의 강압적·독단적 결정에 경고를 보낸 셈이다.
이 와중에 불쌍하게 죽어나는 쪽은 러시아 국민들이다. 국민들 사이에서 체첸 반군의 재반격 가능성 때문에 이제 맘놓고 비행기도 못 타고, 지하철로 출퇴근하기도 겁나며, 맘껏 오페라도 즐기지 못하게 됐다는 원망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나오고 있다. 더구나 또 유사한 테러가 발생하면 정부의 강경 진압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목숨을 건지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치를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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