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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 후계 체제’ 굳어지나

등록 2004-09-10 00:00 수정 2020-05-03 04:23

고영희 사망 이후 흉흉한 권력 암투설 나도는 북한… “권력세습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지금 평양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남북 당국 대화 채널은 물론 민간 채널마저 삐걱거리며 돌아가자 다들 평양 이상 징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냉각기가 처음에는 남쪽 당국의 탈북자 단체 입국 추진 등이 북한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린 탓으로 해석하고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겠거니 낙관했던 정부 관계자들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9월2일 대화 중단의 주요 원인으로 “조문이나 탈북자 대량 입국 문제 등이라는 분석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냉각기가 길어지자 점차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정부 내에서도 늘고 있다.

평양 지도부, 요즘 정보 유출로 골치

덩달아 언론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 고영희(51)씨의 사망 소식에 이어 김정일 후계자 문제, 나아가 경제개혁·개방 성과의 부진에 따른 반김 엘리트 세력의 거사설 등 온갖 흉흉한 소문이 끊이질 않고 있다. 평양에서 90여일 동안 머물고 얼마 전에 돌아온 한 기업인은 “겉보기에 평양은 조용하다. 북한 정권 창건일인 9·9절이 다가오고 있는 탓에 이 준비로 다들 분주하다. 이상 징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북한 내부 사정을 제대로 읽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평양에 사는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정보 통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소문으로 듣는 얘기들이 많지만, 이조차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요즘 정확한 평양 사정은 안보다 바깥에서 확인하기가 더 쉬워 보인다. “평양 지도부가 요즘 가장 골치 아파하는 부분이 정보 유출이다. 이는 과거에도 가끔씩 있어온 일이긴 하나, 요즘은 외부 세계와 연결된 내부 관계자가 조직적으로 정보를 넘기거나 팔아먹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특히 미국 의회가 인권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북한 체제 흔들기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데 크게 긴장하는 것 같다.” 정보 기관 관계자의 조심스러운 평가다.

이 관계자는 북한 내부 사정과 관련해 일본 아사히신문사가 펴내는 시사주간지 최근호(9월7일자) 기사를 주목하라고 귀띔했다. 김 위원장의 후계 구도와 관련해 음미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는 암시였다.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정철 동지를 당조직부 실무 학습 기간이 끝나면 6개월간 고급당학교 과정을 거치도록 하라고 하셨다”는 대목이다. 김정철에 관한 지시 내용은 김 위원장에게 핵심 정보와 지시 내용 등을 매일 보고하는 비서실 산하 ‘일보과장’이 기록한 수첩의 일부로 북한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는 북한 지도부 동향에 밝은 관계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김정일 자신도 40년 전 대학을 졸업한 20대 초에 이 조직지도부의 지도원으로 당활동을 시작했다”고 지적하고 “내가 아는 한 정철씨는 금년 4월 조직 지도부 요직에 취임했으며, 이 인사는 김정일의 후계자가 정철씨로 거의 굳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싣고 있다.

김정철의 동향에 밝은 국내의 한 소식통은 “정철은 지난 1998~99년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아왔다”면서 “그런데 중간에 후계자 계승 문제가 삐걱거렸는데, 이는 대미 관계가 기대만큼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대미 관계만 순조롭게 풀리면 김정철을 바로 전면에 내세울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으나 2002년 10월 2차 핵위기가 불거지고 두 나라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차질을 빚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후계 수업이 미뤄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공식 후계자 지명 절차만 늦어질 것이라는 견해가 이어졌다.

고영희 우상화 작업 시작된 것인가

이런 와중에 공교롭게도 김 위원장의 처이자 김정철의 어머니인 고영희씨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왔다. 서울의 정보 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가 8월11일 고씨의 중태설을 처음으로 보도한 것이다. 고씨가 파리에서 유방암 치료를 받고 귀국한 후 북한이 프랑스에서 엄청나게 비싼 관을 구입, 특별기편으로 평양에 수송했고, 이는 고씨의 사망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때를 맞춰 베이징의 소식통들도 고씨가 파리에서 유선암 수술을 받았고, 귀국길에 병세가 아주 위독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확인해주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국의 정보 기관도 이를 추적했고, 최근 정부의 고위 관계자도 고씨의 사망을 단정적으로 확인해주었다. 고씨가 사망한 날짜는 지난 8월13일, 사인은 심장마비이며 7일장을 치렀다는 내용이었다.

고씨의 사망이 기정사실화되자 이번에는 후계 문제를 둘러싼 권력 암투설이 나돌고 있다. 김 위원장이 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김정철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공식 절차만 남겨놓은 상황에서 나오는 첩보들이라 궁금증이 더할 수밖에 없다. 고씨의 사망으로 김 위원장의 첫째 부인 성혜림씨 사이에 생긴 김정남(33)이 다시 유력한 권력 승계 후보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함께 탈북한 김덕홍씨의 입에서 나오면서 논란은 더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국내 소식통들은 고씨의 사망이 김 위원장의 후계 구상을 흔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고영희 사망이 후계 구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철의 당 고급학교 입교는 정통 후계 코스를 밟는 것이다. 다만 악화된 대미 관계 때문에 공식 지명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고씨에 대한 우상화 작업, 즉 위대한 어머니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이미 시작된 듯하다. 이제 사망했으니까 더욱 강화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때 가서 후계 구도에 이상이 있다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8월31일 정책 보고서를 통해 김 위원장이 1974년 생일(2월16일)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전례를 감안할 때 “정철의 경우 빠르면 올해 그의 생일인 9월25일 전에 이뤄질 수 있다”고 추정했다. 늦어도 수년 안에 이뤄질 것이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내년은 노동당 창건 60주년, 김 위원장의 선군정치 시작 10주년, 6·15 남북 공동선언 발표 5주년이 되는 해여서 제7차 당대회가 소집되어 당대회 개최와 당규약 개정 등을 통해 후계자의 지위를 공고화하는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권력 세습은 없을 것’이라는 아예 다른 전망도 나온다. 김 위원장이 3대에 걸친 세습 체제를 꿈꿀 정도로 국내외 정세를 모르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견해다.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할 경우 봉건 왕조 세습이라는 국제적 비난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긴 하다.

은근히 권력세습 견제하는 중국

특히 가까운 이웃인 중국이 권력 세습에 가장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맥락에서 얼마 전 중국 관변 싱크탱크인 텐진사회과학연구원 대외경제연구소가 작성한 논문은 눈길을 끌 만하다. “자연 재해로 인민의 생활은 최악에 달했지만 (김정일 총비서는) 가족 세습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극좌 정치와 정치 박해를 대대적으로 저지르고 있다”는 다소 충격적 내용이었다. 중국 당국이 서둘러 회수하긴 했지만 전문가들은 이 논문이 중국 지도부나 지식층의 대북관을 압축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가 최근 개혁·개방을 부쩍 강조하며 북한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고 있는 현실도 이런 권력 세습을 막아보려는 시도로 읽히고 있다.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이) 새로운 이념을 갖고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다시 살펴 중국의 근본 국익에 합치하는 외교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북한의 3대째 후계 세습은 그야말로 중국 국익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김 위원장은 핵문제에 더해 후계자 문제까지 겹치면서 장고에 들어간 걸까. 따라서 남북 관계의 냉각기도 더 이어질 것인가. 김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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