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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육의 십팔번은 실용주의?

등록 2004-09-09 00:00 수정 2020-05-03 04:23

보수적 흐름 주도하는 대통령 측근 386 의원들…당내 원칙적 목소리 내온 의원들도 잠잠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천정배 원내대표가 이끄는 열린우리당이 경기불황을 빌미로 고소득층에 유리한 감세정책을 펼치는 등 경제정책 기조를 개혁에서 부양쪽으로 전환하는 조짐을 보이면서, 당의 정체성을 담보할 핵심 세력인 386 의원의 역할과 선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런데 이헌재 경제부총리나 보수언론으로부터 “경제를 모른다”는 비아냥을 자주 들었던 탓일까. 요즘 열린우리당 386 의원들 사이에는 천정배 체제의 ‘친기업적 경기부양’ 노선에 대해 별다른 저항 움직임이 없다. 오히려 상당수 386 의원들은 ‘실용주의’와 ‘경제활성화를 위한 대안찾기’라는 명분 아래 주요 경제정책 및 입법 방향과 관련해 친재벌적 경향성을 보이는 등 더욱 보수적인 흐름까지 드러내고 있다.

현실적 동기는 생존공간 확보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출신 386 의원들이 중심이 돼 지난 8월18일 창립한 ‘의정연구센터’는 당내의 이런 보수적 흐름을 주도하는 핵심축이다. 이광재, 서갑원, 이화영, 백원우 의원 등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참모 출신과 윤호중, 조정식 등 청와대와 정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인사 12명으로 구성된 의정연구센터는 최근 재벌개혁의 상징으로 여겨져온 ‘출자총액제한제’를 완화·폐지하는 일에 총대를 메고 나섰다.

이 모임 회원인 김종률 의원이 간사를 맡고 있는 당 규제개혁특위는 출자총액제한 개선을 검토하기로 했고, 고문인 강봉균 의원은 지난 8월31일 당 경제정책토론회에서 공개적으로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완화’를 역설했다. 서갑원, 이화영 의원 등은 “경제가 안 좋은데다, 기업이 투자를 안 하고 있는 상황에서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며 “‘자산규모 5조원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한 현행 규정을 ‘자산규모 10조원 이상 기업’으로 대폭 완화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히는 등 찬성여론 확산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진보적 경제·사회단체는 물론 노무현 대통령의 소신과도 180도 다르다. 그동안 재벌의 출자총액제한 철폐 요구를 거부해온 노 대통령은 9월5일 문화방송의 과의 특별대담에서도 “(재계가) 고쳐달라고 하는 출자총액제한제를 안 고쳐줬는데, 그것 때문에 투자가 안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기관에서 나와 있다”며 반대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측근 386들이 결집한 의정연구센터는 이를 폐지하거나 적어도 완화해야 한다는 의사가 확고하다. 이 모임에 참여한 한 의원은 “외국인 투자유치를 최선의 목표이자 애국인 것처럼 얘기하면서 출자총액제한 규모를 5조원으로 묶어 이에 근접한 기업들이 아예 외국으로 떠나도록 하는 것은 큰 모순”이라며 “재벌개혁이라는 명분에 집착해 허울만 남은 법안에 대한 개선책 논의를 금기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런 소신은 정치권 안팎에서조차 뜻밖으로 받아들여진다. 노 대통령이 “보수세력이 설파해온 경제위기론의 밑바닥에는 경제개혁 정책을 가로막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며 버티는 상황에서, 그의 핵심 참모 출신 의원들이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런 노선을 지향하는 것일까. 앞으로 또 어떤 주장을 펼칠 것인가. 일단, 이들이 의정연구센터를 창립한 것은 정치적 생존공간 확보라는 현실적 동기가 작용했다. 의정연구센터는 지난 5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출신인 이광재, 정무비서관 출신 서갑원,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업무조정국장을 지낸 이화영 의원이 주도했다. ‘노무현 사단’의 핵심인 이들은 지난 4월1일 총선을 통해 국회에 진입했지만 보수언론과 당내 견제 세력들로부터 ‘노통의 실세 그룹’으로 인식된 탓에 자기 역할 설정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섣불리 조직화할 경우 닥칠 당 안팎의 비판과 견제를 피하면서 자신들을 한데 묶을 방안을 고심했고, 그 결과물이 의정연구센터였다. 서갑원 의원은 “노 대통령의 측근 실세그룹의 조직화라는 당 안팎의 시선 때문에 원내 진출 이후 정치적 포지셔닝에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당시 원내 과반수를 넘긴 열린우리당 안에서 각종 현안에 대한 성명성 주장이 난무하고 무책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지는 현실에 착안해 대안을 제시하는 의정 활동의 모범을 보이는 차별화 전략으로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개혁노선이 경제 발목 잡았다”

이광재 의원 등 주도 세력들은 이에 따라 “대안 없는 정치, 성명서 정치는 배격한다”라는 원칙에 맞춰 회원을 천거하는 방식으로 참여 의원을 12명까지 늘렸다. 아울러 합리적 대안 마련이라는 창립 취지를 살리기 위해 실물경제에 밝다는 평가를 받아온 김혁규, 강봉균 의원을 고문으로 영입하는 데도 합의했다.

하지만 이들이 국가보안법 개폐, 이라크 추가 파병 등 정치적 주제에 대한 발언은 자제하면서 경제 문제에 관한한 여권에서조차 과격하게 받아들일 의견을 제안하는 것은 ‘노무현 정권의 성패에 대한 책임의식’과 이들의 ‘실용주의적 경제관’ 때문이다.

이들이 올 하반기 모임의 운영 기조를 ‘경제살리기’로 결의한 것은 지난 8월23일 밤, 서울 평창동 올림피아호텔에서 열린 ‘제1차 의정연구센터 워크숍’에서였다. 소속의원 12명과 모임의 고문인 김혁규, 강봉균 의원 등이 모두 모인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행정부와 열린우리당 안에 ‘대통령 임기 3년차인 2005년까지 경제침체가 지속되면 앞으로 각종 선거에서 참패하고, 실패한 정권이 될 수 있다는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라는 의견을 교환했다. 이들은 최근 참여정부가 집중 공략당하는 민생경제 분야의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학자 출신 (대통령) 보좌진의 개혁우선주의 △태생적으로 정권의 성패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관료집단 △여당의 상당수 초선 의원들의 개혁 편향성 때문으로 진단했다. 여권이 추진 중인 개혁 과제에 대해서도 △30~40대 젊은 층 중심의 네티즌 여론에 너무 민감하고 △재계·언론계·고소득층을 기득권 개혁대상 세력으로 간주해 반대세력을 결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경제단체 등 재계와의 미래지향적 대화 부족, 언론계와 대화하면서 개혁하는 노력 부족, 소득 문제를 강조하면 중산층 이상이 불안감을 느끼는 문제 등도 지적했다. 결국 여권이 이념적 선명성만을 중심에 둔 개혁노선에 집착하면서 경제 활성화가 가로막혔고,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셈이다.

이들은 이런 분석에 기초해 이후 민생경제 회복을 위한 대안 마련에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2005년에는 경제가 살아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경기진작 대책을 마련하고, 경제개혁도 경제심리를 안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정연구센터의 핵심 역할로 설정하고, 그 첫 과제로 출자총액제한제 완화·폐지론을 부여잡았다.

실제 고문인 강봉균 의원은 이날 밤 워크숍에서 “출자총액제한제 폐지가 개혁 후퇴로 비쳐지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출자전환은) 적극적으로 고무·격려돼야 한다”며 “열린우리당의 재벌개혁 정책도 수정·보완돼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에 기획간사인 이광재 의원은 “폐지보다는 그 한도를 대폭 늘리는 게 필요하다”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김태년·이화영 의원 등은 “출자총액제한제가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았다”며 “여론의 눈치를 보지 말고 과감하게 주장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내부 논의를 거쳐 이들은 출자총액제한제 완화·폐지를 위한 여론확산 작업에 나선 것이다.

‘재벌 연구소’와 토론회도 열 계획

의정연구센터 소속 386 의원들은 앞으로 국가경쟁력 제고와 경제살리기를 위해 친기업·친재벌이라는 비판까지 감내면서 민감한 경제 주제에 대한 토론회를 주도하고, 각종 해법을 제안하는 등 목청을 더욱 높일 방침이다. 운영간사인 이화영 의원은 “지금처럼 삼성·현대·LG 등 대기업을 백안시하고, 과거 기업 집중을 막기 위해 도입됐던 제도나 기업 규제를 그대로 둔다면 국제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면서 “친재벌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국민이 잘살 수 있고, 국민과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 과감하게 금기를 깨고, 할 말은 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를 위해 다소 파격적인 방식도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다. 우선 오는 9월13일 재벌 연구소의 대표격인 삼성경제연구소와 함께 ‘한국경제 희망플랜 10가지 제안’(가칭)이라는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두달 전 이광재 의원의 의뢰를 받은 삼성경제연구소는 부소장급이 직접 발제에 나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여권 안에서는 노 대통령의 측근 386들이 재벌의 이해를 대변해온 삼성경제연구소로부터 국가경제 활성화 방안을 찾는 것이 적절하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재벌연구소가 콘텐츠를 제공하는 만큼 재벌의 정서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의정연구센터 소속 386 의원들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대한 내부 토론을 거쳐 생산적인 제안은 입법과제로 선정해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 의원은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국민의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된다면 대기업 연구소의 연구결과라도 수용 못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다른 한 의원은 “사회를 너무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지 말고 실용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면서 “이제 친노동도, 친재벌도 아닌 시각에서 재벌도 냉정하고 현실성 있게 다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와 함께 △연기금의 주식투자 허용 △사모펀드 도입 등 논란이 계속되는 경제적 주제에 대해 전향적인 의견을 밝히고, 입법화 과정에도 적극 개입할 계획이다. 서갑원 의원은 “조만간 공적자금을 받아 회생의 길을 걸었던 대우건설 등 핵심 기업을 시장에 매각해 공적자금을 상환해야 하는데 현행 제도로는 해외 투기자본만이 이들을 인수할 수밖에 없다”면서 “연기금 주식투자 허용, 사모펀드 모집 허용을 통해 우리 기업이 이를 인수할 길을 열어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뿐이 아니다. 의정연구센터 소속 386 의원들은 △삼성·현대·LG 등 주요 대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분야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산업으로 육성하는 방안 △각종 비리 혐의로 활동을 제약받는 재벌총수와 경제계 인사들이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인 사면’ △골프장, 카지노 등 투기성·사행성 산업으로 비판받던 분야에 대한 적극 허용 등 더욱 민감한 주제를 공론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세대인가, 보수주의자인가

노 대통령 측근 386들의 이런 계획이 구체화될 경우 정권의 정체성 논쟁이 촉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안에서는 일단 이들의 행보에 공개적인 비판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송영길, 이인영, 우상호 의원 등 정치·사회적 과제에 원칙론적 태도를 보여온 386 의원들조차 의정연구센터 소속 386들의 ‘경제살리기 해법’에 대해 명확한 태도 표명을 미루고 있다. 전대협 출신 한 386 의원은 “노무현 정권 초반부터 보수세력들이 386 의원들이 경제에 무관심하고, 좌파적 개혁에만 치중해 나라를 망친다고 공격받아왔다”며 “우려되는 대목은 있지만, 이런 현실에서 대통령의 측근 386들이 정권의 성공을 위한 경제살리기에 발벗고 나서는 충정은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태도는 경제 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부족하다는 현실적 이유와 열린우리당 386 내부의 분열을 부추기는 보수세력에게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정치적 고려가 함께 녹아 있다.

그러나 40대 중반의 개혁 성향 한 의원은 “그들의 충정은 이해하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방향이 적절한 것인지, 너무 급격하게 경제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며 “그들의 움직임이 좀더 구체화되면 대응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40대 후반의 개혁 성향 의원도 “도대체 노 대통령의 측근 386이라는 그들이 뭐하자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비판했다.

이광재, 서갑원, 이화영…. 노 대통령의 측근 386들은 과연 경제 활성화를 위해 발상의 전환을 주도하는 신세대인가, 경제적 보수주의자인가. 그 해답은 아직 앞날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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