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단순 대북지원에서 전략적 투자로 변화… 영구적으로 영향권 안에 묶어두려는 장기적 포석인가 </font>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이제 평양은 중국 제품의 소비시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석달 단위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비즈니스 활동을 하는 한 기업인은 최근 중국 상인으로 넘쳐나는 평양 내의 모습을 전하며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놓았다. “이러다가는 북한이 완전히 중국 경제에 예속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 기업인은 이전에는 순수 관광 목적의 중국인들이 많이 붐비기는 했으나, 요즘처럼 장사나 사업을 목적으로 평양을 오가는 중국인들이 많이 눈에 띈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북쪽 사람들의 이들에 대한 환대도 극진하다.
평양이 소비주의의 맛을 느끼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양국간 노비자 협정에 따라 비교적 손쉽게 오갑니다. 올 5~6월부터 중국 기업인들의 방북이 크게 늘어난 것 같아요. 주목할 대목은 북한쪽 안내원들이 이들을 접대하는 태도입니다. 중국 기업의 투자를 한건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더라고요.”
이처럼 중국 기업인들이 북한 시장을 보는 시각이 사뭇 달라졌다. 중국인의 북한 시장 공략은 소비시장으로서의 잠재력이 엿보여서다. 지난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 조처 이후 소비시장이 성장하고 북한 주민들의 현금 보유 비율이 높아졌다. 그간의 현물거래 위주에서 기업은 물론 개인 사이에도 현금 유통이 중시되고 보편화되고 있다. 평양은 물론 지방 구석구석에 하루가 다르게 시장이 들어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엄격한 통제경제를 완화한 개혁 정책을 발표한 지 2년이 흐른 지금, 특히 특권층이 모여 사는 것으로 알려진 220만 인구의 평양이 소비주의의 맛을 느끼고 있다고 평가한다. 2년 전 임금과 물가 인상 조처 이후 평양 시내에는 요식업이 번창하면서 현재 식당과 맥줏집 등 500여개의 업소가 성업 중이다. 능력에 따라 수입에 차이가 나면서 신흥부자들도 하나둘 늘고 있다는 게 평양 내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의 전언이다. 일반 주민들도 호주머니에 현금을 갖고 다니면서 필요에 따라 언제든 물건을 사는 추세다. 중국 상인들은 일찌감치 이런 변화상에 눈을 뜬 셈이다.
실제로 중국 중쉬그룹은 최근 북한 최대 백화점인 평양 제일백화점에 대한 10년 임대권을 따내고 올해 말 개장을 목표로 내부 수리를 하고 있다. 이 그룹은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있는 자체 쇼핑센터에서 옷과 시계, 치약, 화장품 등을 가져와 팔 생각이다. 쩡창바오 그룹회장은 홍콩의 와 8월10일 가진 인터뷰에서 “평양은 시장성이 엄청나다”며 “우리가 평양 제일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소비재들의 가격은 조선 공식 가격의 절반 수준이며, 암시장 가격보다 싸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2위안에 팔리는 치약의 경우 북한에서는 10위안에 거래되고 있으나, 백화점에서는 5~6위안에 팔겠다는 자세다. 평양 제일백화점은 위안화와 미국 달러화만을 받기 때문에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공식 환전소나 암시장 등에서 화폐를 바꿔와 물건을 사야 한다. 내년에는 4개의 유사한 백화점이 더 개장될 예정이다.
북 언론 “유리공장은 조-중 친선 상징”
지난 5월에는 하오압록강맥주회사와 성원수출입유한회사, 러카이필름 등 신의주와 인접한 단둥의 18개 기업들이 대북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장기적 포석으로 제7회 평양국제상품전시회(5월17~20일)에 참가했다. 하오압록강맥주회사는 자사 제품인 압록강 맥주를 출품하고 멀티미디어영상 광고로 이를 평양 주민들에게 크게 알렸다. 이들 가운데 일부 인사는 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조선(북한)에서 징수하는 관세율이 아주 높아 대조선 수출에서 거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그러나 먼저 브랜드를 창조하고 나중에 시장을 개척한 뒤 돈을 버는 계획을 마련해놓고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실제로 북한 내 주요 시장에는 중국산 물건이 가장 많이 진열되어 있으며, 또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고 방북자들은 전한다. 일반 주민들은 특히 중국산 의류를 선호하고 있으며, 잘사는 계층은 중국산 텔레비전과 세탁기들을 고르고 있다. 중국산 시계나 전기면도기 등을 찾는 북한 주민들도 많다.
중국의 선진 공업기술 도입과 자재공급 확대를 겨냥한 투자 유치도 활발하다. 올 5월 평양에는 ‘북중상품판매센터’가 개설됐다. 중국의 무상 지원에 힘입어 평안남도 대안군에는 대안친선유리공장 착공식이 7월1일 열렸다. 북한 언론매체들은 이를 “우리(북)의 사회주의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게 될 이 유리공장은 조-중 친선의 최고 상징의 하나로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은 내년 10월 완공을 목표로 유리공장에 2400만달러가량을 투자해 연간 판유리 생산능력 640만t 규모의 최신 설비를 제공할 방침이다.
중국은 북한의 최대 교역, 관광대상국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이제 최대 투자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3년간 양국의 교역량은 108%나 늘었다. 2000년 4억9천만달러에 머물던 양국 교역이 2003년에는 10억2천만달러로 껑충 뛰었다. 이는 북한 전체 교역량 23만9천만달러의 43%를 차지하는 규모다.
최근 들어 북한은 관광사업을 통한 외화벌이에 심혈을 쏟고 있다. 특히 중국 관광객은 체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적은데다, 짭잘한 수익을 안겨주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운송 수단이 부족해 적잖은 애로를 겪어왔다. 이러던 참에 6월21일부터 평양∼단둥간 국제여객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이 버스들은 주말 외에 매일 평양과 단둥에서 동시에 관광객들을 싣고 양 도시를 오간다. 버스 안에는 중국 기업인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가득 차 발디딜 틈이 없다고 목격자들은 요즘 풍경을 전한다.
이처럼 중국 기업들의 태도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간 당국 차원에서 식량과 원유 등을 무상 지원하면서 북한과 우의를 다져왔던 전통적 경협 방식이 이제 멀리 내다보고 북한 시장을 선점하려는 전략으로 바뀐 셈이다. 전문가들은 중국 기업인의 북한 시장 공략 배경에는 당국 차원의 전략적 사고도 깃들여 있는 것으로 본다. 북한을 영구적으로 중국 영향권 안에 묶어두려는 장기적 포석이라는 지적이다. 남북간의 경협이 진전되어 중국의 경제지원이나 협력이 그리 필요 없는 상황은 중국 당국도 그리 반길 일이 아니라는 추론이다. 냉전 이후 그나마 대북 경제지원이라는 지렛대로 북한에 영향력을 끼쳐왔으나, 이런 역할을 남한이 온전히 대체할 경우 앞으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게 중국 지도부의 판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몇년째 대북사업을 벌이고 있는 임완근 남북경제협력진흥원장 같은 이는 중국이 수년 전부터 고구려사 왜곡을 정당화하는 동북공정을 모의해왔듯이, 어느 날 갑자기 중국이 북한 경제의 발목을 잡는 날이 올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한국으로서는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기막힌 사태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게 임 원장의 시각이다. 그만큼 최근 중국쪽의 북한 시장 진출이 무섭게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남북경협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서가는 중국, 지연되는 남북경협
“남북경협이 핵 문제다 뭐다 하면서 질질 끌면서 제대로 되는 게 없자, 북한이 중국쪽에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그냥 지켜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구려사를 빼앗기듯 북한 시장마저 넘겨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임 원장은 “중국 기업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남쪽 기업들과 달리 북한 투자에 제약받는 게 거의 없기 때문에 순식간에 북한의 알짜배기 사업이나, 기업과 백화점 등 유통수단을 장악할 수 있다”면서 정부 차원의 시급한 대응책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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