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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아니라 ‘목숨값’이오!

등록 2004-07-23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LG정유 파업으로 또 ‘고임금 노동자’ 논란… 유해물질과 사고에 노출된 화학사업장의 현실을 보라 </font>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7월14일부터 파업에 들어간 전남 여수산업단지 내 LG칼텍스정유(LG정유)는 필수 공익사업장으로, 우리나라 정유회사 사상 최초의 파업이다. 특히 〈AP〉등 외신들이 이번 파업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LG정유가 LG그룹과 미국 셰브론 텍사코사의 합작법인인데다 LG정유의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 싱가포르 아시아 석유시장에서 가격이 크게 출렁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에서 이번 파업이 주목받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른바 “고임금 노동자들의 배부른 파업”을 둘러싼 논란이다.

“쟁점은 임금이 아니라 5조3교대”

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가자 회사쪽과 일부 언론은 즉각 “국내에서 임금 수준이 가장 높은 사업장에서 무슨 임금 더 올려달라는 파업이냐”고 뭇매를 때렸고, 다른 사업장의 일부 노동자들도 “부럽다는 것 외에 다른 말이 안 나온다. 최고급 대우를 받으면서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등장했던 ‘현대자동차 고졸 생산직 연봉 6천만원’류의 고임금 논란이 또 제기된 것이다.

LG정유 노동조합은 △인력 충원을 통한 주5일제 실시(현행 4조3교대를 5조3교대로 전환) △비정규직 처우 개선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을 위한 지역발전기금(매출액의 0.01%·연간 약 11억원) 출연을 요구하고 있다. 임금은 민주노총 가이드라인에 따라 10.5% 인상을 제시했다. LG정유노조의 상급단체인 민주화학섬유연맹 유영구 교육선전실장은 “이번 파업의 쟁점은 임금이 아니라 5조3교대와 비정규직, 지역발전기금이다”며 “회사쪽이 발전기금이나 비정규직은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제쳐놓은 채 오직 임금 문제만 부각시켜서 돈 많이 받는 노동자가 파업한다는 악선전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 “회사쪽이 더 높은 임금 인상안을 던진다고 해서 노조가 다른 요구안을 모두 털고 파업을 풀지는 않을 것이다. 5조3교대 도입을 위해 임금을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도 회사쪽에 제시했다”고 말했다.

LG정유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전체 직원(2854명)의 1인당(평균 근속연수 11.7년) 평균 급여액은 연 6770만원이다. 회사쪽은 생산직 조합원들만 따져보면 평균임금이 연 6920만원이라고 덧붙였다. 여수 화학단지는 수천만원을 받고 취업을 알선해주는 취업 브로커들이 활개를 칠 정도로 고임금 사업장으로 불려왔다. LG정유 노동조합도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조는 10년 근속 조합원의 경우 평균연봉이 6천만원인데 이 가운데 세금 1170만원, 연장근로 수당 966만원, 비고정 급여(성과급 등) 1080만원을 빼면 실제 기본 근무로 받는 임금은 연간 2784만원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민주화학섬유연맹 유 실장은 “교대근무 사업장이지만 유해물질에 노출된 화학시설 사업장이라 병들고 아파서 걸핏하면 쉬는 사람이 많아 대체 근로가 자주 일어난다”며 “정규 노동시간 외에 연장 근로가 전체 임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회사 관계자는 “생산직한테 화학시설 사업장의 위험수당을 따로 주고 있는 건 아니다”며 “전체 종업원 2600명이 한해 매출 11조6천억원을 올리고 있는데, 매출액에 비해 근로자 수가 적은 편이기 때문에 1인당 임금 수준이 높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조합은 LG정유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목숨값’이라고 주장한다. 법정 노동시간이 주당 48시간이던 1968년부터 이미 실시해온 현행 4조3교대를 5조3교대로 바꿔 노동자들의 유해물질 노출을 줄이자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노조는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도 노동자들이 도망은커녕 불을 끄러 달려가야 하고 조종실에 있으면 거의 5분에 한번씩 사고 비상벨이 켜진다”며 “터지면 죽는다는 화학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각각 1·2·3선 소방요원으로 분류돼 있는데, 그 보상으로 매달 10만원짜리 주유권이 몇장씩 나온다”고 말했다.

각종 희귀병에 시달리다 쓰러지기도

여수산업단지 노동자들은 각종 암과 백혈병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희귀병에 시달리다 소리소문 없이 쓰러지기도 한다. 그래서 “예순살까지만 살아도 좋겠는데”라는 탄식까지 나오고 있다. 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최상준 박사는 “석유화학사업장에서는 벤젠 등 발암물질이 공장을 돌아다니고 혈액암이 보고되고 있다”며 “화학공장은 인원 부족으로 작업량이 많아서 유해물질 노출 기준을 초과하는 곳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지역주민조차 유해물질 때문에 집단 이주를 추진하는 상황인데, 공단을 떠날 수 없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감안한다면 상대적 고임금과 5조3교대 요구는 과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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