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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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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지금이 ‘악수’할 기회!

등록 2004-07-09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견 드러냈지만 빅딜 성사 한걸음 더… “북한 지도부는 대선 앞둔 부시 행정부의 온건 급선회 활용해야"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선거용 술수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올 11월 미국 대선이 다가오면서 미국의 대북 정책이 눈에 띄게 말랑말랑해졌다. 그리고 움직임도 빨라졌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적 결단 여부에 따라 북-미 간 막판 대타협의 가능성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물론 낙관은 이르다. 하지만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양자간 협상이 공식·비공식적으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게 정부 핵심 관계자의 귀띔이다. “지금 북-미 관계는 어쩌면 가장 꼭지점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걸림돌이 여전히 많긴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기술적·실무적 차원에서 양쪽의 견해차를 좁히기는 어렵지만, 정치적 용단이 있으면 문제는 뜻밖으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이게 북-미 관계의 현주소다.”

북 외무상과 미 국무장관의 전격적 만남

지난 7월2일 북한 백남순 외무상과 미국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자카르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전격 회동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며칠 전 베이징 3차 6자회담에서 이전보다 한 발짝 나아간 제안들을 주고받고 난 직후라 더 눈길을 끌었다. 7월2일치는 이를 “(양국 관계의) 외교적 진전을 보여주려는 부시 행정부의 의지”라고 평가했다. 또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 7월9일 서울을 방문해 한국 정부와 북핵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한다. 그의 방문은 최근 조금씩이나마 진전되고 있는 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부시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문하는 그에게 더 눈길이 쏠리는 까닭은 부시 행정부 내 외교 정책의 방향 급선회와 관련이 있다.

부시 행정부 내 온건파들은 지금이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여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부시는 재선에 불리한 이라크나 테러와의 전쟁 등 안보 이슈는 제쳐놓고 국내 경제 회복이나 동맹외교 혹은 다자외교를 강조하는 캠페인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에 따라 보수온건파들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고 있다. 3차 6자회담에서 북한과 2시간 이상 실질적인 양자회담을 연 것이나, 자카르타에서 파월 국무장관이 성사가 불투명했던 북한의 백남순 외상과 만난 것도 긍정적 신호로 읽힌다. 물론 2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얼마나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의 정성일 미주국 부국장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북-미 외교장관 회동에서) 핵 문제를 포함한 북-미 양국 관계의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전망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정 부국장은 백 외무상이 파월 장관에게 “미국이 양국 관계를 진전시킬 의지가 있다면 북한은 미국을 영원한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며, 양국 관계는 미국이 대북 적대 정책을 철회하느냐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뜻을 전했다고 설명했다.

미국도 북한의 결단을 촉구했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양국 외교장관은 3차 6자회담에서 제시된 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파월 장관은 백 외무상에게 북한 핵프로그램 폐기에 대해 한 단계 진전된 안을 수용하라고 촉구하고, 이 제안이 실질적인 진전을 위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백 외무상은 이와 관련해 즉답을 하지 않았다”고 바우처 대변인은 덧붙였다.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이런 공식적 만남은 북-미 관계의 ‘파편’일 뿐이다. 핵 문제 진전을 위해 물밑에서 막판 조율이 한창이라는 게 북-미 사정에 밝은 소식통의 전언이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북-미간 타협을 중재하는 인사들에는 행정부 관료뿐 아니라 북한를 비교적 잘 아는 워싱턴 내 전문가, 학자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들은 대선을 몇달 앞둔 지금이 북-미간 대타협의 흔치 않은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부시 행정부 내 온건파들이 모처럼 주도권을 잡고 적극적으로 나올 때 타협책을 찾아야 한다고 북한 지도부에 조언하고 있다.

대타협의 내용은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언론을 통해 간간이 흘러나오는 내용으로 빅딜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크게 보면 북한의 핵·미사일 완전 포기와 대규모 대북 경제 지원을 동시에 맞바꾸는 제안이다. 워싱턴 브루킹스연구소의 마이클 오핸런 연구원은 대타협의 핵심은 한반도의 재래식 무기 감축과 북한에 대한 경제 원조의 연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북한이 완벽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핵 프로그램들을 동결·폐지하고, 핵과 미사일 및 관련 시설의 수출도 중단해야 타협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미국, 3차 6자회담에서 구체적 조건 내놔

전문가들은 최근에 끝난 3차 6자회담이 북-미간 타협의 단서가 되리라고 본다. 미국 협상가들은 핵 위기를 종식시킬 더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북한과 양자 대화를 갖기도 했다. 이전 회담에서 미국이 해법다운 해법을 제시한 적이 없음을 감안하면 큰 진전으로 읽힌다. 미국의 제안에 따르면 북한이 3개월 안에 모든 핵개발 프로그램들을 공개하고 미 정보기관의 검증을 받는 동안 한국 등 미국의 동맹국들이 즉각적인 에너지 지원을 제공한다. 검증 뒤 미국은 서면으로 북한 체제 안전을 보장하고, 궁극적으로 미국의 직접적 대북 원조를 의미하는 과정에 참여한다. 물론 미국의 제안은 북한의 그것과는 충돌된다. 북한은 핵 동결과 궁극적으로 핵개발 프로그램을 폐기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 미국은 즉각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간극을 확인하듯 파월 장관은 “북한과의 협상은 어려우며,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북-미 사이에 많은 불신이 존재하며, 이것을 해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백남순 외상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그와 협상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을 더 명확히 확인하기 위해 만났다”고 한 발짝 물러섰다. 온건파들마저 높은 벽을 절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미간 대타협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북-미간의 빅딜 가능성을 접지 않고 있다. 이런 견해는 대선을 앞둔 미국 내 정치적 목적에 부응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는 “정치적으로 부시 행정부가 매우 열심히 북한과의 위기에서 진전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존 케리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호재로 대북 정책 실패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다. 특히 케리는 지속적으로 부시가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협상 타결을 지연했고, 평양의 핵무기 개발만 앞당겼다고 맹공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후유증으로 곤욕을 치르는 부시 행정부로서는 대북 정책의 실패까지 얹어지는 게 못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미국 내부의 강경보수파인 네오콘들의 ‘북한 혐오’가 여전하지만 대선이 닥쳐오면서 어쩔 수 없이 더 유연한 대북 정책을 용인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따라서 당분간 북-미 관계는 순항을 예고하고 있다.

“케리가 당선돼도 ‘공백기’엔 대북정책 표류”

북-미뿐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관계국들도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일본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인) 납치 문제뿐 아니라 핵과 미사일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해야 정상화가 된다”면서도 1년 안에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애드벌룬을 띄웠다. 중국은 북-미간의 뚜렷한 상호 신뢰 부족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에 무상 원조로 유리공장을 세워주는 등 지속적인 영향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러시아의 움직임도 숨가쁘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연방 외무장관은 남북을 부지런히 오가며 북핵 중재를 하고 있다. 미국 내 네오콘들을 빼고는 모두들 북-미간 타협을 엮어내기 위해 모종의 역할들을 하고 있다. 이처럼 관련 당사자들이 서둘고 있는 까닭은 역시 올 11월 대선 전에 진전이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케리 민주당 후보가 당선돼도 북-미 관계의 급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북한은 케리 후보가 부시에 비해 덜 껄끄러운 상대이기는 하다. 하지만 케리 후보가 새로운 외교안보 라인 진용을 갖추고, 새로운 대북 정책을 검토하고 짜려면 몇 개월이 후딱 지나갈 가능성이 크다. 또 새 팀들은 인사청문회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등 내부 정치 일정을 맞추려면 대북 정책에 눈을 돌리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정 기간 대북 정책의 표류가 불가피하다.

부시의 재선은 북한에 또 다른 불안요인이다. 는 7월2일치에서 미 행정부의 유연한 움직임과 관련해, “흔히 선거철에는 미국의 대통령들이 외교 정책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보였다가 선거 뒤 역전시켰다”고 썼다. 그나마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의 소모적인 대결이 대선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유화적인 대북 정책을 펴고 있다. 이라크 사태도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 날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정부의 한 핵심 당국자는 “만약에 예전의 북한이라면 이런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적 모험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공룡 미국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을 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벼랑에 처해 있다면 지금이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라고 지적했다. 물론 북한이 이런 무모한 시도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구나 지금은 남한을 비롯해 주변국들이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양보를 촉구하는 데 줄을 선 형국이다. 북한은 평화적 방법으로 체제 생존을 보장받으면서 경제적 재도약을 모색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만난 셈이다.

문제는 미국이 북핵 문제의 리비아식 해결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강경파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지만, 온건파들도 이 방식 외에는 뾰족한 대안을 찾기가 어렵다. 리비아식 해법은 북한의 고해성사를 전제로 한다. 북한이 지금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고농축우라늄(HEU) 방식의 핵개발 프로그램을 비롯해 모든 핵 시설·물질·프로그램을 고백하고, 이를 근거로 국제원자력기구(IAEA) 추가 의정서에 가입해 IAEA가 불시에 의심나는 시설들을 사찰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물론 이는 고통스러운 선택이긴 하나 그 대가는 엄청나다.

김정일, ‘리비아식 해결법’ 받아들일까

북한이 이 제안을 수용할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이 문제를 놓고 ‘장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다. 큰 틀에서 리비아식 해법을 따르되, 미국도 수긍할 수 있는 절충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전문가들은 올 9월에 열릴 4차 6자회담이 북-미 관계의 최대 분수령이 되리라 본다. 이때까지 진전이 없으면 모두들 대선에 몰입하면서 더는 대북 정책에 신경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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