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칼잡이’들은 왜 숨었나

등록 2004-06-03 00:00 수정 2020-05-03 04:23

검찰 핵심요직 빅3 인사의 의미… ‘관리형 전면 배치’는 검찰 잠재우려는 대통령 뜻 반영했나

강희철 기자/ 한겨레 사회부 hckang@hani.co.kr

타고난 용맹과 뛰어난 지략으로 패왕(항우)을 무찔러 한나라의 기틀을 다진 한신. 그러나 그 ‘공’은 이내 ‘화’를 부르고 만다. 그를 두려워한 나머지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유방은 순행(천자가 제후국을 돌아보는 일)을 핑계로 제후들을 끌어모은다. 마침내 창검과 백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서 한신은 뒤늦게 몸을 굽힌다.

광고

순행의 구실이 됐던 자신의 신하 종리매의 목을 들고 유방을 찾은 한신은, 기대와 달리 오랏줄에 묶여 수레에 실리며 긴 한숨을 내뱉는다. “과연 사람들의 말에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진다.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혜와 지모가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날 삶아 죽이는 것은 당연하구나!”

사마천은 명저 의 ‘회음후(한신) 열전’에서 한신의 입을 빌려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 즉 토사구팽이라는 말로 권력의 비정한 본색을 전하고 있다. 한신의 탄식처럼,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고 나면 좋은 활은 정말 소용이 다하는 것일까.

‘토사구팽’이라도 누가 토를 달겠는가

광고

지난 5월27일 검사장급 검찰간부의 인사가 발표되자 한 간부의 첫 반응은 이랬다. “기업들이 참 좋아하겠구만.” 또 다른 중견 검사의 논평이다. “진짜 칼잡이들한테는 칼을 쥐어주지 않았다.” 이들의 말처럼, 이번 인사는 ‘칼잡이 전면 후퇴-관리형 전진 배치’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검찰 내 핵심 요직으로 꼽히는 ‘빅3’의 면면을 뜯어보면 실감이 난다. 우선 ‘검사의 꽃’이라는 서울중앙지검장에는 이종백(54·사시 17회) 법무부 검찰국장이 임명됐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 등 화려한 수사경력으로, 서울지검장에 입성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불러일으키던 안대희(50·사시 17회) 전 대검 중수부장은 서울지검장 후보군에서 일찌감치 배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법무부 검찰2과장-대검 기획조정부장을 거친 이력에서도 드러나듯, 이 검사장을 두고 수사통이라고 말하는 검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 동기생의 얘기다. “이 검사장은 온화한 성품에 일 처리가 부드러운 사람이다. 전공은 수사보다는 기획쪽이라고 해야 맞겠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과는 ‘8인회’ 멤버로 예전부터 친했고, 이 앞에 검찰국장을 하면서 강금실 장관이 원하는 ‘코드’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어지지 않았겠냐.”

광고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세간의 각별한 주목을 받은 대검 중앙수사부장 자리에는 박상길(51·사시 19회)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이 기용됐다. 적어도 지난 이력으로 따졌을 때, ‘박상길 중수부장’에 토를 달 사람은 없어 보인다. 대검 중수부 검찰 연구관(평검사)을 제외하고, 그가 그냥 지나친 특별수사의 요직은 없다. 지난 1996년 중수부의 수사3과장을 시작으로 내리 2∼1과장을 지낸 뒤, 서울지검 특수부의 3∼2∼1부장을 거쳐 대검 수사기획관까지 지냈다. 유례없는 경력이다.

게다가 ‘사건 복’도 많았다. 대검 과장으로 있을 당시 백원구 전 증권감독원장, 한택수 전 재경부 국고국장, 이양호 전 국방장관,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한보 관련 정치인 수사를 맡았고, 서울지검으로 옮긴 뒤엔 종합병원 비리,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국외 재산도피 사건, 경성건설 비리 재수사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사건은 많았는데도 뒤탈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박 검사장은 사건 복이 많은 사람이다. 박 검사장은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인지(검사가 스스로 첩보를 수집해 수사에 나서는 것)를 독려하거나, 공격적인 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끝까지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윗분들하고 조율도 참 잘한다. 아랫사람들한테는 비교적 합리적이고. 함께 일해보면 전형적인 서울 사람, 검찰1과 출신답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한 부장검사)

안대희 전 중수부장 ‘반쪽의 영전’

‘빅3’의 하나로 꼽히는 법무부 검찰국장은, 검찰의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주무 국장이라는 점에서 검찰 바깥보다는 안에서 더 요직으로 주목받는다. 이 자리는 임채진(52·사시 19회) 춘천지검장에게 돌아갔다. 사시 19회에서 유일하게 검찰1과장을 지냈으니, 그가 이번 인사에서 검찰국장에 임명된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새로운 ‘빅3’의 면면은 외견상 딱히 흠잡을 곳이 없다. 갈 만한 사람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 안팎에선 “예상보다 무난한 인사”라는 평이 많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무엇보다 PK(부산·경남)의 약진이 눈에 띈다.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국장이 모두 대통령과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과거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목이다.

서울지검 한 부장검사의 인사평이다. “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게 힘있는 대통령이 됐다.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했으니, 못 만들 법이 없다. 지난해와는 처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지난해처럼 칼을 휘둘러대면 몹시 부담스럽게 된다. 이번 인사는 한마디로 ‘검찰, 너희들 잠자코 있으라’는 뜻이다. 일 벌이지 말라는 얘기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PK 출신이 ‘빅3’ 중에서 두 자리를 차지했다는 정도?”

다른 직책에는 지역 안배의 흔적이 뚜렷하다. ‘여의도’쪽과 검찰 사이에서 창구역을 맡게 될 법무부 차관에는 TK(대구·경북) 출신의 김상희(53·사시 16회) 대전고검장이, 송광수 검찰총장을 보좌할 대검 차장에는 충청도가 고향인 이정수(54·사시 15회) 부산고검장이 각각 기용됐다. 특히 ‘이정수 대검차장’은 단순한 지역 안배 이상의 의미로 읽힌다. 고려대학 법대 69학번 동기이자 막역한 친구 사이인 박정규(56·사시 22회) 청와대 민정수석이 노 대통령과 한 사찰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사시 공부를 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검찰과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청와대의 입장 변화로 볼 수도 있다.

반면, 흔들리던 검찰의 위상을 곧추세운 것으로 평가받는 안대희 전 중수부장은 이번 인사에서 ‘칼’을 쓸 수 없는 자리로 옮겼다. 고향인 부산의 고검장으로 갔으니 외형상으로는 영전이 분명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에겐 휘하부대가 없다. 칼을 내려놓고 조용히 쉬라는 뜻이다. ‘반쪽의 영전’인 셈이다. 큰 일을 치렀으니 휴식이 필요하다는 노 대통령의 속깊은 ‘배려’일 수도 있겠으나,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안희정, 이광재, 최도술, 염동연, 강금원, 신계륜, 여택수 등등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모두 누구에게 당했나. 안대희다. 사시 동기생이라고, 평판 좋다고 믿고 맡겼더니 팔을 모두 잘라버린 꼴이 됐다. 곱게 보이겠나. 실제로 대통령은 안희정에 대해 나라종금 건으로 두 번째 구속영장이 청구됐을 때 ‘청와대 문턱을 두번씩이나 넘어오냐’며 화를 냈다고 전해들었다. 안 부장은 미련이 있었지만, 서울중앙지검장은 처음부터 아니라고 봤다. 중수부장은 그나마 칼이 한 자루뿐이지만, 서울(중앙)지검장은 칼이 여러 개다. 휘하부대원(검사)만 150명이 넘는다. 게다가 대선자금을 수사하면서 기업들 치부도 들여다보지 않았나. 서울 검사장 보내놓으면 무슨 일을 또 벌일지 알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고검장 시켜서 모양새는 갖춰주되, 실권 없는 자리로 보낸 것이다.”(대검의 한 검사)

노 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을 만난 이유는…

검사장급 인사에 이어 곧 발표될 부장검사 인사도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받고 있다. 안 중수부장의 지휘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최측근들을 줄줄이 법정에 세운 칼잡이들, 즉 중수부 수사팀의 부장검사들이 어디로 옮기느냐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선임과장인 중수1과장 승진이 확실시되는 유재만(41·사시 26회) 2과장을 제외하면, 중수1과장으로 최도술·강금원·안희정씨 등을 수사한 남기춘(44·사시 25회) 검사, ‘나라종금’에서 안희정·염동연씨, ‘썬앤문’에서 이광재·여택수씨, ‘굿머니’에서 신계륜씨를 각각 기소한 김수남(45·사시 26회) 중수3과장과 조은석(40·사시 29회) 검사 등이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이다. 대검의 한 부장검사는 “남 과장의 경우 서울지검 특수1부장, 김 과장은 중수2과장 또는 서울지검 특수2나 3부장, 조 검사는 중수부 과장에 들어가는 게 상식선에서 합당한 인사”라며 “과연 인사가 어떻게 날지…. 이번 부장검사 인사에서는 이 사람들의 움직임이 관전 포인트”라고 말했다.

검사장 인사가 있기 이틀 전, 노 대통령은 재계 인사들을 청와대로 불러 이른바 ‘애로 사항’을 들었다. 이 자리엔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4개월 남짓 해외에 나가 있던 삼성 이건희 회장, 검찰의 연이은 소환 통보에도 끝내 귀국하지 않았던 신동빈 롯데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검찰이 ‘날랜 토끼’와 ‘높이 나는 새’들을 잡기는 잡은 것일까.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