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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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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믿음을 줘야 한다

등록 2004-05-21 00:00 수정 2020-05-03 04:23

[기획연재 | 지금은 남북경협시대 3회]

중국 경제특구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의 조언… 개방 의지 · 완벽한 준비 · 고급인력 확보 등

▣ 상하이 · 쑤저우= 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개성공단의 성공 여부는 불확실성을 얼마나 잘 제거하느냐에 달렸다.” 푸동과 쑤저우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은 북한 정치의 불확실성이 개성공단 성패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요인으로 기업 환경이 갑자기 바뀌는 일이 없어야 경쟁력 있는 산업단지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벽한 기반시설, 9통1평

전문가들은 개성공단이 북한은 물론 한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현대상선유한공사 한명동 부장은 “한국은 임금 등 비용 경쟁력 측면에서 중국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는 상태지만 개성공단은 중국과 대등한 경쟁이 가능하다”며 “개성공단은 북한뿐 아니라 한국 경제에도 큰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개성공단은 ‘동북아 물류중심국가’ 프로젝트를 실현시키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 한 부장은 “상하이항이 푸동 경제특구나 쑤저우 공업원구의 성공으로 지난해 부산항을 제치고 세계 3위의 항만이 됐다. 지금 추세라면 2008년에는 싱가포르를 제치고 세계 1위가 될 것”이라며 “만약 개성공단이 푸동이나 쑤저우처럼 성공한다면 부산항이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개성공단의 성공을 위해 푸동 경제특구나 쑤저우 공업원구 등 중국의 경제특구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쑤저우 공업원구는 입지나 설립 배경 등에서 개성공단과 비슷한 점이 많다. 올해로 설립 10주년을 맞는 쑤저우 공업원구는 지난 1992년부터 장쩌민 등 중국 2세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불기 시작한 ‘싱가포르 학습 열풍’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중국은 리콴유 당시 싱가포르 총리를 초청해 직접 공단이 들어설 장소를 물색하도록 했고, 리 총리는 유서 깊은 관광지이자 인근에 상하이항이라는 거대 물류기지가 있는 쑤저우를 낙점했다. 1994년 중국과 싱가포르는 중국 35 대 싱가포르 65의 비율로 자본을 대 ‘중국-싱가포르 쑤저우 개발유한공사’(China Singapole Soju Development)를 설립했다.

실제로 공업단지를 조성하는 작업은 매우 치밀하게 진행됐다. 중국 정부는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굴뚝산업’은 배제하고 처음부터 정보기술(IT) 등 첨단산업을 유치하는 데 주력했다. 또 상대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적은 대만의 기업들을 많이 유치해 경제 외적 요인으로 인한 기업 실패의 위험을 줄였다. 일단 입주가 결정된 기업들에는 과감한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으로 최상의 경영 환경을 만들어줬다. 기반시설도 완벽하게 갖췄다. 쑤저우 공업원구의 완벽한 기반시설을 상징하는 말은 ‘9통1평’이다. 9통은 9개가 통한다는 뜻이고 1평은 평평하게 다진 땅이다. 평평한 땅에 전기, 용수, 열, 가스, 상수, 하수, 배수, 통신, 도로가 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쑤저우반도체유한공사 최완우 과장은 “이곳에 입주 계약을 마친 기업들은 공장 건물만 지은 뒤 플러그만 꽂으면 곧바로 공장을 가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쑤저우 공업원구에 입주한 기업들은 저렴한 원가와 중국의 거대한 시장을 배경으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공업원구가 잘 돌아가자 초기에 중국의 개방 의지를 의심했던 서방의 자본도 속속 모여들었다. 쑤저우 공업원구는 2300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1, 2기 단지가 모두 분양돼 최근에는 3기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있다.

개성공단은 쑤저우 수준의 완벽한 준비 외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게 북한 정치의 불확실성이다. 북한이 핵 문제 등으로 정권 유지에 위협을 느끼더라도 북한 정부가 흔들림 없이 개방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삼성전자 쑤저우LCD 안동기 총경리(법인장)는 “쑤저우 공업원구도 초기에는 서방에 믿음을 주지 못해 서방 자본의 외면을 받았다”며 “개성공단이 서방 자본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쑤저우 공업원구도 최근 미국의 통상압력과 원자재난, 그리고 금융위기로 이곳에 입주한 외국계 기업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개성공단에는 쑤저우와 달리 막대한 규모의 ‘시장’이 없다는 것도 개성공단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안 법인장은 “쑤저우는 13억 인구의 중국 시장이 있기 때문에 외국 자본들에게 큰 매력이 있다”며 “개성공단도 경쟁력 있는 시장을 개척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개성공단이 중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중국 기업들과 경쟁하지 않는 새로운 업종을 선택해야 한다. 안 법인장은 “중국의 로컬 기업들은 섬유, 신발, 가전 등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서방의 기업들도 이들을 당해내지 못한다”며 “쑤저우의 외국 기업들이 첨단산업에 주력하는 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가와 민간기업의 절묘한 조화를

북한이 과연 양질의 노동력을 얼마나 공급할 수 있느냐도 문제다. 삼성전자 쑤저우반도체유한공사 장형옥 총경리는 “우수한 노동력이 없으면 외국 자본이 아무리 투자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며 “쑤저우도 최근 IT 분야의 고급인력이 부족해 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쑤저우 시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취업박람회를 개최해 우수한 인력을 조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수가 부족해 삼성전자의 경우 직접 베이징 등 대도시의 일류대학을 찾아가 인재를 모셔온다. 전문가들은 개성공단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북한 정부가 얼마나 빨리 기업 경영 마인드를 터득하느냐가 개성공단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지적한다. 쑤저우나 상하이시 시정부처럼 ‘국가’와 ‘민간기업’이 절묘하게 조화된 행정을 할 수 있다면 개성공단의 미래는 밝다는 것이다.



쑤저우의 귀빈, 삼성전자


쑤저우에서 삼성전자는 ‘귀빈’ 대접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 쑤저우반도체유한공사가 쑤저우 공업원구의 1호 입주 기업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1994년 12월28일 쑤저우법인을 설립하고 공업원구 1기 단지에 공장을 지은 데 이어 지난해에는 삼성전자LCD가 3기 단지에 진출했다. 삼성은 10년 동안 이곳에 5개 법인을 설립해 총 3억달러를 투자했다.
삼성전자반도체공장이 처음 입주했을 때 이곳은 논바닥이었다. 장형옥 법인장은 “공장을 지으려고 땅을 파면 곳곳에서 물이 솟아올랐다”고 회상했다. 장 법인장은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 삼성전자가 쑤저우 공업원구에 입주하자 서구의 다른 기업들도 이곳을 눈여겨보게 됐다”고 말했다. 쑤저우 공업원구의 성공에는 삼성전자의 숨은 공로가 있었던 것이다. 쑤저우시도 이런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초대 법인장인 박재욱 상무가 본사로 영전해갈 때 쑤저우 시정부는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줬다. 장 법인장은 “당시 쑤저우 시장이 삼성전자의 공로를 기리며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을 했다”며 “물을 마실 때 그 우물을 판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삼성의 공로를 기린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공업원구 운영에 관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항상 삼성전자 법인장을 초대한다. 또 공업원구 설립을 기념하는 중앙공원의 국기 게양대에는 오성홍기 바로 옆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장 법인장은 “중국이 삼성을 우대하는 것은 공로를 인정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 속내에는 삼성의 첨단기술을 하루빨리 습득하겠다는 무서운 음모도 숨어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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