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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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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순자가 돌아왔다

등록 2004-05-20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maroon">화려한 ‘순자의 전성시대’는 갔어도 그녀는 여전히 ‘보통순자’가 아니었으니… </font>

‘유수 같은 세월’이라는 옛 시절의 대중가요 가사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곧잘 세월의 덧없음을 강물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강(江)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는 점이다.

지난 5월12일 텔레비전 9시 뉴스를 시청했던 사람들 중에 어지간히 나잇살이나 얹은 축이라면, 화면에 등장한 어떤 여인의 모습을 보고, 무심히 세월 저편으로 흘려보낸 이십 몇년 전의 그 험하고도 고단했던 물굽이를 불현듯 떠올렸음직하다.

“아, 저 여자!”

내 경우는 그랬다. 그 여인에 관련된 보도가 두 번째 꼭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텔레비전 뉴스의 그 시간 그 자리는 본시 그 여자의 몫이었다. 9시 시보가 울리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빗장이 열리고, 이어서 어김없이 “한편 이순자 여사는…”이라는 화두가 짝을 맞췄다. 그래서 ‘땡전(全), 한편 이(李)’ 뉴스였다.

‘턱의 날카로움’은 어디 가고…

나는 예전의 버릇대로 그 여자 얼굴이 화면에 비치자마자 채널을 돌리려다가 오랜만에 9시 뉴스로 돌아온 ‘순자’를 감개무량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감회어린 마음으로 감상해주기로 했는데, 물론 그는 예전의 순자가 아니었다. 얼굴 살집도 부풀고 눈가에 주름도 자글거리고, 무엇보다 순자를 순자답게 했던 턱의 날카로움(!)이 온데간데없었다.

70년대 중반, 나는 강원도 춘천의 한 공병부대에서 근무했는데, 대대 안에 이른바 ‘영수 클럽’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본부중대까지를 포함해서 4개 중대의 부대원들 중 ‘영수’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들간의 친목 모임이었다. 군사 지휘체계 이외에는 어떤 사적인 결사(結社)도 금지돼 있는 군대에서 그들은 공공연히 그런 ‘불온단체’를 결성해서 운영했는데, 신기한 것은 내가 근무했던 3년여 동안 지켜본 결과 클럽의 회원 수가 3명 미만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한번도 없더라는 것이다. 박영수가 제대하면 곧 김영수라는 신병이 들어오고, 최영수가 질병으로 후송 가자마자 이영수가 전입 오고, 조영수가 탈영을 해서 잡혀가면 다른 부대로 파견 나갔던 염영수가 복귀하는 식이었다. 그 영수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만나서는, 개인 장비에 대한 재물 조사를 할 때면 부족한 관물도 서로 빌려주고, 휴가 갔다온 영수가 은하수 담배를 다른 영수들에게 한갑씩 돌리기도 하고, 면회 온 애인을 이웃 중대 영수들에게 소개도 해주는 등 남다른 우애를 과시해서 ‘귀한 이름’ 가진 뭇 병사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동명이인이 많기로 친다면 영수는 순자의 비교대상이 되기에 턱없다. 요즘이야 순자 영자 하는 식으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드물지만, 70~80년대 전화번호부를 펼치면 김순자나 이순자는 거의 반쪽을 차지할 만큼 그 수가 많았다.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전화를 소유하는 경우가 드문 시절이었음에도 그 정도였으니 방방곡곡에 얼마나 많은 순자들이 살고 있었겠는가.

1980년 9월1일은, 세상에는 그저 서민들의 누나요 동생이요 어머니요 이모 같은 소박한 순자들만 살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한 날이기도 하다. ‘에므왕’(M1) 탄두 같은 머리를 반들거리면서 제11대 대통령의 권좌에 오르겠다고 취임식장에 나선 한 사내 옆에, 금박으로 장식한 눈부신 당의(唐衣)를 걸치고 늠름하게 서 있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순자렷다!

이때부터 7년이 넘는 화려한 순자의 전성시대가 시작되는데, 그러나 ‘그 순자’에게는 전성기였을지 몰라도 죄 없는 다른 순자들, 특히 성씨까지 같은 숱한 이순자들에게는 고역의 세월이었다.

아, 29만원짜리 남편의 아내여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전 아무개의 죄상이야 별개로 치더라도, 수천 켤레의 구두로 화제를 모았던 필리핀의 이멜다와 비교되는 순자의 화려한 옷차림이 입방아에 올랐고 새세대육영회니 심장재단이니 하는 허울 좋은 단체와 얽힌 비리를 비롯해서 친정 아버지 이규동, 삼촌 이규광, 삼촌의 처제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 친동생 이창석 등 주전 벤치 가릴 것 없이 외척이 풀멤버로 동원돼 저지른 비리들은 시장골목에서 시금치값 몇푼을 깎느라 버둥거리던 숱한 순자들에게는 허탈감을 넘어 부럽기까지 했을 터. 거기다 날이면 날마다 매스컴까지 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계엄령을 발동할 힘도, 국보위나 하나회를 조직할 능력도, 그렇다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그들을 징발할 처지도 못 되었던 무지렁이 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하나 있기는 했다. 분노의 대상을 놀림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5공이 중반쯤으로 접어든 시기부터 그 권력자에 대한 우스개 얘기가 시리즈로 만들어져서 삼겹살보다 더 맛난 안주로 등장한다. ‘말당 서정주’(未堂의 未자를 못 읽을 만큼 무식하다는 풍자), ‘토관과 신토’(‘士官과 紳士’라는 영화 제목을 빗댄 유머) 등 주로 권력자를 무식쟁이로 희화화하거나, 서민의 오락인 고스톱판에 독재자를 등장시켜 애꿎은 담요뙈기만 두들겨팼다. 그런데, 그 우스개판에 어김없이 우리의 순자도 심심찮게 주연이나 조연을 맡아 등장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놀부 마누라가 되어서 끼니때가 아닌데도 걸핏하면 주걱을 가지고 놀았다(그런 환경 탓인가. 8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내 딸 아이도 주걱턱을 달고 나왔다).

80년대 말에 발간되어서 베스트셀러가 된 풍자 콩트집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전아무개가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아갔다. 미리 연습해온 대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뭐 그 비슷한 인사말을 서툰 영어로 건넸다. 코 큰 대통령이 “미, 투”(Me, too)라고 받았다. 얼결에 전아무개가 그 말을 받아 “미, 쓰리!”라고 했다. 그러자 옆방에 있던 순자가 “미스 리 찾으셨어요?”라며 튀어나왔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러나 민주화의 봄을 수탈당한 서민들의 이런 우스개가 그들 각자에게 무슨 위무가 됐겠는가. 털을 다 뽑아놓은 꿩이 모닥불 피우는 사이에 도망쳐버리자 쩝쩝 입맛을 다시며 “도망쳐봤자 꿩 지만 춥지”라고 했다는 나무꾼의 자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순자가 돌아왔다. 전재산이 달랑 29만원뿐이라고 해서 잠시나마 최저임금 생활자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던 불쌍한 남자의 아내가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에게 이십 몇년 전의 아린 추억을 일깨우며. 그러나 역시 ‘보통순자’는 아니었다.

“83년 재산신고 때 40만원을 신고했는데 그것은 남편 돈이 아니라 내 패물을 팔아서 땅을 사서 불린 순전히 내 돈이다. 그 돈을 불려달라고 친정아버지한테 맡겼는데 남편이 기업에서 받은 돈도 일부 섞여 들어갔다. 아버지가 작고한 뒤 106만원을 돌려받았다. 지금 내가 가진 130만원은 10년 동안 친정살이를 하면 모은 알토란 같은 내 돈이다.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남편의 추징금으로 대납하겠다. 검찰이 추적하고 있는 206만원의 괴자금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차남이 가지고 있는 167만원은….”

토란 농사 잘 되는 마을 소개해줄까?

그러면서 30분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비록 독재자와 그 부인이지만 나도 한때 그들 부부를 풍자하는 콩트를 써서 술값깨나 벌었던 사람으로서, 하마터면 동정의 눈물을 흘려줄 뻔했다. 남편 재산은 29만원인데, 부인이 가지고 있던 전재산 130만원까지 바치고 나면 뭘 먹고 산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보통의 순자다. 자세히 보니 단위가 ‘만’이 아니고 ‘억’이었다.

토란을 파종하려면 4월 중순이 적기다. 다소 늦었지만 그가 남편과 함께 보통의 순자들 틈에 섞여 농사를 지을 의향이 있다면, 토란 농사 잘 되는 마을을 소개해줄 의향이 있다. 다 털고 ‘보통순자’의 자리로 돌아가라. 맘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한 가지는 보장 못 한다. 그대들이 순자네 토방마루에 앉아 토란국 반찬에 밥을 먹을 때에도 주변을 열심히 살필 일이다. 언제 어디서 짱돌이 날아들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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