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 들어간 쿠르드 게릴라들과 함께 한 15일의 기록
| 쿠르드 게릴라들과 함께한 보름의 기록. 온갖 고초를 견뎌내며 이라크의 험준한 산 속에서 만난 그들은 종교인처럼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왜 쿠르드인들은 이곳까지 쫓겨와야 했을까. |
|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이제 이라크 북부지역에 집단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 소수민족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의 맹방인 터키가 쿠르드족이 민족국가로 독립할 것을 우려해 수만명의 터키군을 이라크 국경지대에 전진 배치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라크 점령 미군과도 쿠르드 독립문제로 적지 않은 마찰을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 이에 따라 에서는 쿠르드 소수민족 사정에 정통한 하영식 전문위원을 쿠르드 게릴라 본부에 급파했다. 그는 7월27일 이라크에 들어가 쿠르드 난민촌인 마흐무르 등을 거쳐 게릴라 본거지인 자고르스 산맥 칸길산에서 15일을 머문 뒤 8월19일 이라크를 나왔다. 독립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온갖 수난을 감내하고 있는 쿠르드 게릴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과 이라크 전쟁 이후의 쿠르드족 운명을 추적해보았다. 편집자 |
쿠르드 게릴라들의 근거지인 칸딜산에 가려면 쿠르드 민족의 양대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이라크 쿠르드 지역은 두 지역으로 나눠져 있다. 가장 넓은 지역은 바르자니의 쿠르드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다. 이라크 내 쿠르드 민족의 분리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당을 세운 뒤 지금은 그의 아들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쿠르드민주당은 터키와 미국에 의존하면서 반민족적인 당리당략만을 추구해왔다. 1990년대에는 터키군과 손잡고 같은 민족인 쿠르드노동당(PKK) 게릴라를 공격해 쿠르드 민중들로부터 반민족적 정당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지금은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과 함께 이라크의 부를 나눠갖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다른 하나의 권력은 바르자니의 쿠르드민주당에서 독립한 쿠르드애국동맹의 탈리바니를 들 수 있다. 탈리바니의 쿠르드애국동맹은 바르자니의 쿠르드민주당과는 대조적으로 온건 이미지를 쌓아왔으며 쿠르드노동당과도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바르자니나 탈리바니가 모두 도시를 근거지로 하여 정치적인 뿌리를 내린 반면, 오잘란을 지도자로 한 터키 출신의 쿠르드 세력은 산을 근거지로 뿌리를 내렸다.

터키군의 추적을 피해 산으로 산으로
이라크 북부의 대도시인 에르빌이 바르자니의 쿠르드민주당, 술래마니가 탈리바니의 쿠르드애국동맹의 수도다. 이들 두 당은 무장군대까지 갖추고 자신들이 통제하는 지역에 검문소를 설치, 차량이나 통행인을 검문하면서 거의 독립된 정부처럼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뒤 바르자니의 쿠르드민주당은 이라크 북부와 터키 사이 국경 통과 지점까지 관할할 정도로 그 세력이 강화됐다. 그럼에도 이라크 북부지역의 쿠르드당들은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처럼 사당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쿠르드민주당의 경우 아버지인 무스타파가 죽고 난 뒤 아들이 권력을 이어받았고, 탈리바니는 거의 20년 이상을 당수로 지내고 있다.

바르자니가 통제하는 지역은 검문소가 있었지만 군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산이 가까워질 무렵, 탈리바니쪽 군인들이 차려놓은 검문소가 보였고 지나는 모든 차량이 검문을 받고 있었다. 우리가 탄 지프가 서자 한 군인이 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신분증을 요구한 뒤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이 군인은 신분증을 들고 전화를 하러갔고 다른 군인이 나를 간이건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운전사와 경찰이 쿠르드어로 주고받는 대화를 내내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약 30분이 지난 뒤 신분증을 쥔 군인이 돌아와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보내주었다. 광활한 메소포타미아 광야를 지난 뒤 드디어 지프는 산악지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운전사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거의 1시간 동안 산길을 헤쳐나갔다. 옆길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가 아찔할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길 맞은편에서는 예상치도 않았던 당나귀가 나타났다. 이 당나귀의 양편에는 식량이 가득 실려 있었다. 산악지역에 사는 쿠르드 목동이었다. 이곳 산악지역에서는 당나귀나 말을 가장 유용한 운송수단으로 쓰고 있었다.
여기는 바로 자그로스 산맥의 하나인 칸딜산이다. 최정상 높이는 3400m였다. 이런 높은 봉우리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이 산맥을 통하면 터키나 이란, 시리아, 이라크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 쿠르드 게릴라들은 이 산맥을 통해 터키의 델심에서 도보로 칸딜산까지 넘어왔다. 터키군의 추적을 피해 낮에는 동굴이나 바위 밑에 피신했다가 밤에만 걸어서 약 3개월 보름만에 도착했다. 산악지역은 게릴라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통제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여권 없이 이웃나라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 이곳에 본부를 둔 이유는 터키군의 침공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지프가 멈춘 곳은 한 산골마을의 어귀였다. 이런 첩첩산중에도 마을이 형성돼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잠시 뒤 게릴라 초소가 보이고 보초병이 손을 흔들어 반겨주었다. 거의 20분 정도를 걸은 뒤 접견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접견소는 간단하게 돌로 쌓아 지은 작은 집이었고 그 옆에는 큰 나무 밑에 탁자와 의자를 갖춰놓아 많은 사람들이 앉아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많은 게릴라들이 산 밑으로 내려가려고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사람을 처음 본 탓인지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이곳에서도 지난해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침부터 조용히 책을 읽는 게릴라들
잠시 뒤 나에게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칼리슈니코프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 한명과 비무장 게릴라와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남성 게릴라들이 교육받는 사상학교였다. 산길을 걸으면서 차츰 힘들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곧이어 계곡을 따라 물이 흐르고 양편으로는 절벽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천연의 요새가 나타났다. 계곡 곳곳에는 게릴라들이 ‘망가’라는 거주지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식수는 계곡 바위에서 흐르는 수원지에 호스를 연결해 흐르는 물을 사용하고 있었고 절벽에는 인공으로 동굴을 만들어 학교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더구나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이용해 수력발전을 일으켜 전기까지 생산했다. 사상학교인 이 동굴은 공습에 대비한 방공호로도 활용된다. 게릴라 수십명이 책을 옆에 낀 채 왔다갔다했다. 게릴라들은 의무적으로 이데올로기 학습을 한다. 주로 쿠르드노동당 당수인 압둘라 오잘란이 저술한 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차츰 게릴라 경력이 쌓이면 전술에 관한 서적들을 학습하는데, 주로 혁명사를 학습하고 군사론에 관한 이론이나 게릴라전술에 관한 외국서적을 연구한다. 오잘란이 체포된 뒤 쿠르드 게릴라쪽에서 휴전을 선포하면서 지금까지 4년 이상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어 게릴라들 사이에서는 학습 붐이 불고 있지만, 전투가 치열할 때는 책 한쪽 읽을 여유조차 나지 않는다고 한다. 게릴라들은 보통 새벽 5시에 일어나 자기 정돈을 한 뒤 5시 반에 아침식사를 한다. 8시부터 강의를 듣기 위해 교실로 들어간다. 아침식사 뒤부터 강의시간 전까지 각자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데 이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산사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룻밤 머물 숙소는 벽을 쌓아올린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건물 안에는 방이 마련돼 있었다. 마치 한국사람들이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자는 모양새였다. 자다 일어나보니 여기저기서 담요를 깔고 자는 게릴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릴라들에게는 개인 공간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속옷과 군복, 무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동 소유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여름밤을 산 속에서 지낸다는 사실은 곧 모기와 독충들과의 싸움을 의미한다. 1년에 한두명의 게릴라들은 꼭 뱀이나 전갈에 물려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겨울에는 추위와 싸우고 여름에는 독충과 싸우는 것이 게릴라 싸움의 90% 이상이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사실 밤새도록 모기와 싸우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도시에서 자라고 생활한 인간의 연약함이 자연 앞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다시 행군이 시작됐다. 게릴라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길은 속세에서 쌓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무(無)로 돌아가는 고행의 길이며, 자유의 길이다. 종교적 깨달음과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승려의 발걸음과 매우 흡사하다. 흙색의 군복과 검정색이나 노랑색의 군화, 그리고 칼리슈니코프 자동소총이나 권총이 게릴라들이 보유한 자산의 전부다. 산 속에서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돈이란 것도 아무런 필요가 없다. 산에 들어오는 그날로 자신의 과거는 송두리째 사라지고 국방색 군복과 이름 없는 게릴라의 신분만이 주어진다. 몇년 동안만 게릴라로 생활하다 다시 이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번 게릴라가 되면 평생 게릴라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 산에서 게릴라가 되기 위해 들어가는 한 독일 출신의 여학생과 마주쳤다. 그는 “한 6개월 정도 산에서 게릴라로 지내다 내려갈 것”이라는 계획을 내비쳤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도 인생을 건 결단을 해야 한다.
여성 게릴라 비율 35%
산으로 가는 이들은 출신배경도 다양하다. 게릴라들 중에는 과거에 의사나 학자, 학생이었던 사람도 있고 농부나 목동도 있다. 대다수는 박해받는 터키의 쿠르디스탄 출신이지만 이란, 이라크, 시리아 출신의 쿠르드인들도 눈에 많이 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서유럽 출신의 쿠르드 젊은이들도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 뉴 단(33)은 독일에서 의사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평생을 자신의 조국을 위해 바치기로 작정한 뒤 산으로 들어왔다. 물론 게릴라 군복에 과거를 모두 묻어버리고 수만명의 게릴라 중 한명이 된 뒤 5년 동안 산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의사로서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이혼까지 한 뒤 산으로 들어왔다. 그는 지금까지 게릴라가 된 것을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게릴라의 삶이 어렵고 고되지만 내 민족을 위한 삶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인다”며 다시 한번 자신의 의지를 다졌다. 여성 게릴라를 위한 사상학교에서 유독 어린 소녀티가 나는 여성 게릴라가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제 겨우 17살로 산에 들어온 지 4년이 지났다. 그가 산에 들어온 나이는 13살의 어린 나이지만 산에 들어온 동기는 누구 못지않게 뚜렷했다. 1999년 체포돼 구금당한 오잘란의 소식은 범쿠르디스탄권을 뒤흔들어 놓았다. 민족해방운동의 위기감까지 감돌았으나 결과는 더욱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터키뿐 아니라 이란, 이라크, 시리아 지역 어린 청년들이 민족해방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산 속의 게릴라들도 세대별로 나뉜다. 먼저 80년대의 초창기 그룹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60, 70년대 좌파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한 세대로 다소 낭만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산으로 들어왔다. 이들이 최초로 쿠르드 게릴라 운동을 주도했고 지금도 지도적인 구실을 맡고 있다. 당시 500~600명 정도의 게릴라들이 활동했다. 제2세대를 든다면 바로 90년대 초에 대거 들어온 게릴라들이다. 쿠르드군 총사령관 제말이 회상한 바대로 500명의 게릴라가 갑자기 1만명으로 늘어난 폭발적인 시기다. 이 시기에 쿠르드 게릴라 운동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제3세대의 게릴라들인데 이들은 지도자인 압둘라 오잘란의 체포에 자극을 받아 산으로 들어온 세대다. 많은 젊은이들이 산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주목할 점은 이들 중 다수가 터키 지역에서 온 젊은이라기보다는 이란이나 시리아, 이라크 출신의 젊은이들이라는 점이다. 이는 게릴라 운동이 이미 터키 지역의 쿠르디스탄이라는 지엽적인 공간을 넘어서서 범쿠르디스탄의 운동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하나 쿠르드 민족의 해방운동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여성들의 대대적인 참여다. 여성 게릴라의 비율만 보더라도 거의 35%를 차지한다. 즉, 쿠르드 전체 게릴라를 1만명으로 본다면 여성 게릴라의 수는 무려 3500명이나 된다는 계산이다.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게릴라를 선택하는 이유에 대해 사라 여성게릴라대장은 “물론 쿠르드 민족으로서 당하는 고통도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중동 지역에 일반화된 여성들에 대한 봉건적인 억압”이 그 주된 이유라고 밝혔다. 중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이슬람교 영향으로 문 밖 출입 금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가린 뒤 외출, 학교교육에서의 차별, 부모에 의한 일방적 중매결혼 등 많은 봉건적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여성 게릴라들은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이곳에서 12살의 나이에 부모의 결혼 강요를 피해 산으로 왔던 게릴라 펠타를 만나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24살로 산에서 완전히 성인으로 자랐다.
쿠르드어 교육에 열 올려
여성 게릴라들의 사상교육장으로 이동해왔다. 접견소에서 한낮에 출발해 도보로 거의 4시간을 와야 했는데 절벽을 타는 등 험한 길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뒤 더위를 먹었는지 필자를 비롯한 안내원과 경호병은 모두 앓아누웠다. 이곳은 ‘페자’라고 하는데 ‘자유여성당’이 그 정식명칭이다. 페자는 남성 게릴라들의 사상학교보다 더 깊숙한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여름의 강한 해가 바위절벽을 데워 새벽에도 더운 바람이 불었고 뱀과 전갈이 들끓었다. 이들 독충에 대한 공포증 때문에 나는 항상 해독제와 주사기를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했다. 매일 새벽 5시 반이 되면 이곳 여성 게릴라 사상학교에서는 모두 한곳에 모여 조례를 한다. 대표의 짧은 격려사와 더불어 함께 보내는 우렁찬 박수로 하루를 연다. 어린 나이에 산에 올라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 게릴라들은 아침에 열리는 쿠르드어 교육에 열을 보인다. 이곳에서는 쿠르드어 읽기와 쓰기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아침마다 강의실에서는 사상교육을 한다. 이날은 ‘민주주의와 환경보호’에 관한 주제로 열띤 토론이 열렸다. 첩첩산중에 사는 게릴라들이 환경문제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사뭇 놀랐다.
자그로스산맥 칸딜산(게릴라 근거지)= 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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