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의문의 죽임을 당한 독일 녹색운동의 스타
9월22일 독일 총선에서는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이 승리를 거두었다. 녹색당은 8.6%라는 창당 이래 최대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3당으로 자리를 굳혔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 의문의 죽임을 당한 페트라 켈리는 반핵·환경운동에서 출발해 녹색당 창당을 이끈 세계 평화운동의 산 증인이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충격과 의혹에도 불구하고 페트라 켈리가 남긴 녹색정치의 희망은 하나씩 꽃피고 있다. 편집자
1992년 10월18일 저녁 독일 경찰에 긴급신고가 들어왔다. 본 외곽 슈뷔네뮌더슈트라세 6번지, 녹색운동의 살아 있는 전설 페트라 켈리의 집에서 심하게 부패한 시신 2구가 발견된 것이다. 방마다 서류와 책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으나 침입자의 소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거실과 계단의 벽에는 달라이 라마, 안드레이 사하로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과 함께 찍은 페트라 켈리의 사진들이 빼곡했다.
연인이자 동반자, 바스티안

계단 꼭대기 디딤판에 놓인 시신 옆에는 독일군 장교들이 소지하고 다녔다는 38구경 데링거형 권총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층 침실에서는 또 하나의 시신이 자다가 숨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장미 문양의 검은색 잠옷 차림을 한 페트라 켈리였다.
다음날 새벽, 전 세계로 긴급뉴스가 전파됐다. “열정적인 평화운동가 마흔네살의 페트라 켈리와 예순아홉살의 나토 전 사령관 게르트 바스티안이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일자는 10월1일로 추정된다.”
이 폭력적인 죽음은 원래 ‘동반자살’로 보도됐다. 그러나 페트라의 친구들이 정황을 들이대며 항의한 결과, 동반자살이란 표현은 차츰 삭제되었다. 페트라를 쏜 다음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긴 것으로 알려진 게르트 바스티안은 미국이 이른바 북대서양 지역의 세력 균형을 위해 설치한 군사조약기구 나토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독일 땅에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미국의 결정에 항의해 나토 총사령관직을 사퇴하며 전 세계 운동권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인물이다. 1983년 녹색당의 연방의회 입성 당시 페트라와 함께 연방의원이 된 그는 페트라의 열정에 감화받고 나아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기꺼이 페트라를 위해 내놓았다. 연인이자 동반자, 충실한 개인 비서로서 항상 페트라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다. 그런 그가 왜 페트라를 쏘았을까. 이들의 죽음은 수많은 논란 속에서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소련의 비밀경찰 KGB의 냄새가 난다는 주장에서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와의 연계, 네오나치의 관련 여부, 나토 관련 기밀을 은폐하려는 국제 무기밀매조직의 개입 가능성, 심지어 티베트돕기운동을 차단하려는 중국 공안당국의 음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바스티안의 돌발적 행위라는 결론에 대해서도 다양한 심리학적 해석이 잇따랐다.
언론은 페트라의 죽음을 선정적으로 다루었다. 독일의 여성운동가 알리스 슈바르처는 그의 책 에서 “대안 노벨상을 받은 세계적인 평화운동가 페트라 켈리가 잠든 사이 누군가 그녀를 쏘아죽였다. 언론은 함께 살던 남자가 범인이라고 결론지으며 이렇게 커다란 정치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일로 서둘러 정리했다”고 분노했다.
녹색구호가 정치적인 힘을 갖게 되기까지 페트라는 두말할 여지 없는 최고의 대중 스타였다. 풀뿌리운동을 통해 단련된 시민활동가로, 독일 연방의회 의원으로 활약하며 환경파괴의 재앙과 군수산업으로 대표되는 패권주의에 온몸으로 맞섰다. 페트라 켈리의 죽음으로 성급한 사람들은 녹색운동의 종언을 점쳤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뜬 지 꼭 1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녹색당은 독일 사회에서 다시금 수권능력을 인정받았다. 녹색당의 멤버들이 정당반대당(Anti-Party)이라는 자기모순적인 이름을 표방하며 연방의회에 진출한 1983년, 사람들은 이 오합지졸의 ‘시끄러운 애들’이 언젠가 독일 연방정부의 여당이 되리라는 기대를 감히 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 언론의 해외토픽난에는 복권으로 졸부가 된 다음날 벼락 맞아 숨진 기구한 인생 등 믿거나 말거나 식의 단신들이 뒤죽박죽 실리곤 했는데 녹색당의 출현도 그 난에서 다뤄졌다. 청바지 차림의 젊은이들이 서독 연방의회 의장석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사진과 함께. 그 오합지졸의 무리 가운데에는 현재 독일의 내무장관인 오토 쉴리와 외무장관인 요슈카 피셔 그리고 맑고 화창한 목소리와 날아가듯 빠른 속도로 종이에 글을 옮기며 논점을 제시하던 페트라 켈리가 끼어 있었다.
청소년기를 미국에서 보내다.

페트라 켈리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점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미국에서 다녔다는 사실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 정치가를 키우기 위해 그의 부모는 일찍부터 조기유학에 열을 올린 극성 부유층이었을까? 1947년 그녀가 태어났을 때 독일은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새로 써야 하는 참담한 시점이었다. 그의 고향인 바이에른은 나치의 온상으로, 이른바 ‘벽돌 아줌마’들이 줄을 서서 잿더미 속을 헤집던 폐허의 현장이었다. 페트라의 아버지는 동독 출신 포로였다고 한다. 전쟁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불안해진 남자는 딸과 아내를 남겨놓고 자취를 감춰버렸고 페트라는 후일 ‘녹색 할머니’로 유명해진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어머니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거기서 만난 미군 존 켈리 대령과 새살림을 차린 어머니를 따라 페트라 카린 레에만양은 페트라 켈리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미국에서도 특히 인종차별이 심했던 지역에서 학교를 다닌 페트라 켈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서거와 그의 비폭력의 원칙에 깊은 감화를 받고 독일의 역사와 전쟁의 잔혹함에 새삼 눈을 뜬다. 대학 졸업 뒤 유럽으로 건너와 유럽공동체의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페트라 켈리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사소하게 보아 넘기는 사안에도 남다르게 반응하며 시민운동가로서 커나간다.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혁명을 꿈꾸는 좌파와 경제적 부흥을 꿈꾸는 우파로 양분되어 있던 시절, 페트라는 좌파쪽의 친구들과 가까운 편이었지만 이들의 교조적 태도에 저항하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소비사회’로 변모한 독일의 문제를 인식하고 중요한 가치기준을 스스로 구별해내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었다.
페트라 켈리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생존을 위협하는 현안 즉 ‘핵’의 문제였다. 암으로 일찍 세상을 뜬 어린 여동생 그레이스의 병상기록을 통해 치료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방사능이 남용되는지 알게 된 페트라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 변모한다. 이때부터 그는 곳곳의 반핵운동 현장으로 달려가 해박한 지식과 열정, 그리고 확신을 선사하는 최고의 웅변가로 활약했다. 그가 온다는 소문이 나면 인파가 성황을 이뤘고,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녹색운동의 절박함에 갈채를 보내곤 했다. 핵발전소 건설현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인간 띠 잇기 행사를 하며 행사 자체를 새로운 축제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국사회 ‘페트라’들의 활약을 꿈꾼다
녹색당의 첫 발걸음은 미력하나 기운찼다. 권위적인 남자 어른들의 정쟁이 아닌, 밝고 씩씩한 젊은 남녀가 동분서주 함께 뛰면서 벌이는 정치는 신선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생태계의 생명원리처럼 다양성을 존중해온 녹색당은 그 뒤로 쉽지 않은 길을 걷는다. 생태주의 녹색정신 대신 ‘계급투쟁’이 난무하고 미숙한 사무처리 방식에 대한 ‘인간적인 약점’을 물고늘어지는 편협함이 난무하는 통에 여러 차례 풍비박산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섬세하고 여린 심성의 페트라 켈리는 정신불안증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공격적인 성향의 당원들은 유명세를 치르는 그를 향해 ‘다이아나 황태자비 콤플렉스’라고 조롱했고,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지하며 지원을 호소하는 그를 향해 ‘광대인지 광신자인지도 모르는 늙은이(달라이 라마)를 왜 도와주어야 하느냐’고 조소했다. 이름만으로 세계적 명망을 얻게 된 그에게 주변 친구들은 “이제는 녹색당에서 발을 빼라”고 권할 정도였다. 그러나 페트라 켈리는 “나는 녹색당의 일부”라면서 그 아픔을 새겼다.
영국 녹색당에서 페트라 켈리와 같은 역할을 한 세라 파아킨은 에서 “녹색당이 그를 얼마나 매몰차게 대했는지, 최소한의 업무 여건도 허용하지 않았던 그 용렬함이 그가 죽은 뒤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녹색당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을 것”이라고 통탄했다. 1991년의 걸프전에 대해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아니라 자연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는 잔악한 인간들의 만행”이라고 통탄한 페트라 켈리. 그런데 10여년 뒤 이제는 아들 부시가 권좌에 올라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연방의회로 진출한 뒤부터 페트라 켈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한 스승은 시민운동을 함께하던 지역주민이었다. 또한 지구촌 곳곳에서 내몰린 원주민들이었다. 페트라 켈리가 꿈꾼 녹색 세상은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무엇보다도 ‘인권 존중’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곳이다. 그가 지향했던 ‘새로운 정치’를 우리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김재희/ 기획위원 franz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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