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3" color="6b8e23">지입제와 다단계 알선에 이중삼중 착취당하는 삶… ‘난폭운전’도 이유가 있었네</font>
지난 4월30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 공터. 트레일러와 대형 화물트럭들이 옆길에 점령하듯 즐비하게 들어찼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전국 각지에서 새벽길을 올라온 노란색 영업용 번호판을 단 트레일러마다 머리에 크고 작은 플래카드를 두르고 있다. 공터에 모인 구릿빛 얼굴들은 운송하역노조 산하 지입화물차주 조직인 화물연대 노동자들.
한달에 15번씩 경부선을 뛰는 이들도
“저 사람들 다 최하 3500만원 이상 빚지고 있다고 보면 틀리지 않아. 경부선 뛰어봤자 지입료 빼고 수수료 빼고 기름값 빼고 거기다 통행료 내고 나면 손에 떨어지는 돈이래봐야 코묻은 돈이야. 여기저기서 잘라먹고 우리한테는 오히려 ‘짐 싣고 갈 거야 안 갈 거야’ 하면서 큰소리친다니깐.” 화물운송 노동자 임인호(50)씨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트레일러에 올라타 조합원들한테 생수통을 나눠주던 그가 목타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달 15번이나 경부선을 뛰는 사람도 있어. 한달 중 절반을 차 안에서 자면서 일하는데도 먹고살 수가 있어야 말이지. 화물차 지입제를 그대로 두고서 물류비 절감이니 수출 한국이니 떠드는 건 말짱 헛소리야.”
“요즘 공익광고를 보면 승용차가 고속도로 갓길 주차하고 있다가 대형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왜 하필 화물자동차가 승용차를 덮치는 장면이냐?” 옆에서 듣고 있던 신아무개(38)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화물운송차량을 고속도로의 난폭한 무법자로 보는 사회적 시선에 대한 불만이다. 신씨가 모는 트레일러 번호판은 ㅅ통상이라는 운송업체 소유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일하는 운수회사는 인천의 ㅎ통상이다. 번호판 임자인 ㅅ통상에는 일거리가 있든 없든 매달 20만원씩 지입료를 내야 한다. ㅎ통상은 화주한테서 화물을 따온 뒤 신씨한테 물건을 넘기는데, 그렇게 물건을 받을 때마다 신씨는 또 3만∼4만원씩 ㅎ사에 줘야 한다. “내가 한달 일한 외형(총운임)이 700만원이라면 지입료, 알선료에다 기름값 내고 도로비 내고 나면 남는 게 100만원도 안돼요.”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시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화물차량들이 고속도로에서 법정 최저속도로 저속운행 차량시위를 벌이는 풍경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요구는 크게 △지입제 철폐 △화물차 경유값 인하 △화물 다단계 알선금지 등이다. 지입제부터 보자. 90년대 중반부터 화물운송업체들은 정규직으로 일해온 노동자들에게 차량을 강제로 불하시키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화물운송업이 허가제로 운영되던 시절에 화물차 운전기사들은 직영으로 고용된 노동자였다. 그러나 98년 화물운송업 진입규제가 풀리면서 시·군·구청에 등록만 하면 되는 신고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화물운송 노동자 대다수(약 97%)는 ‘지입차주’라는 특수고용 비정규직 신세로 전락한다. 차량을 현물출자하는 방식, 즉 지입차주로 존재가 뒤바뀐 것이다. 일감을 따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야비한 ‘화물운송 취소’
화물운수사업법에 따르면 일반화물(5t 이상) 영업을 하려면 차량 5대 이상, 자본금 1억원 이상이란 조건을 갖춰야 한다. 25t 차량 한대 값은 1억여원. 가난한 노동자 한 사람이 차량 5대 이상을 확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조건 속에서 운수회사는 시·군·구청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받아 회사 명의로 화물차를 등록한다. 그러나 명의와 달리 실제 차주는 화물운송 노동자로, 이들은 자기 이름으로 화물차를 할부구입하고 개인 사업자등록을 한다. 운수회사와는 달마다 지입료를 내는 위수탁관리계약을 맺는다. 차량 할부금·세금·보험료뿐 아니라 도로비·경유값 등 운송비도 차주인 운전기사가 내야 한다. 운수회사마다 운송비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면서 지입료를 착복하는 구조다.
화물운송 노동자들은 지입차주란 허울을 걸치고 있지만 차량 주인이면서도 소유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한다. 차량 명의가 회사 앞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운수회사가 멋대로 화물차를 담보로 돈을 빌려쓴 뒤 나중에 탈이 생기면 “차주인 너희가 알아서 하라”며 떠넘기는 일도 다반사다. “회사마다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몰래 지입차를 잡히고 대출받고 있다. 나중에 차를 팔려고 서류를 확인해봤는데 여기저기 잔뜩 압류가 걸려 있더라.” 충북 제천의 ㅂ유통이란 운수회사 소속의 박아무개(37)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다단계 화물알선이 판치고 중간착취가 극성을 부리는 것도 뒤틀린 화물운송 구조에서 비롯된다. 박씨는 주로 충남 대산의 현대석유화학에서 전남 광양의 포스코제철소까지 화물을 싣고 오간다. “대한통운이 현대석유화학에서 화물 오더를 딴다. 대한통운은 직접 운반하지 않고 수수료를 뗀 뒤 화물을 하청업체한테 넘긴다. 하청업체는 그쪽대로 수수료를 뗀 뒤 물건을 또 다른 알선업체한테 넘긴다. 여러 알선업체들을 거쳐 나한테 물건이 배차될 때 떨어지는 화물운임은 애초 70만원이었던 게 50만원밖에 안 된다. 여기서 왕복 기름값 40만원, 도로비 6만원 내고 타이어까지 교체해야 한다.” 박씨의 말을 자르고 임씨가 다시 나섰다. “운송비 아끼려고 10원이라도 더 싼 주유소 찾아 졸리는 눈 비벼가며 밤짐승처럼 고속도로를 돌아다니는 게 우리들이야.”
화주와 운송 노동자를 연결해주는 과정에 끼어들어 이중삼중 중간착취를 일삼는 화물 알선업체들은 전국적으로 8천여개에 이른다. 알선업체들은 달랑 전화통 하나만 갖고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긴다. 화물을 실으러 가는 도중에 핸들을 되돌려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알선업체가 주파수공용통신(TRS) 무전기를 통해 느닷없이 화물운송 취소를 통보하기 때문이다. “그쪽 물건이 갑자기 취소됐다. 돌아가서 기다려라. 화물이 떨어지면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로 끝이다. 박씨는 “거기까지 가느라 길거리에 뿌린 기름값을 대주기는커녕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는 게 알선업자들”이라고 말했다. 물론 알선업자의 말은 거짓말이다. 물건이 취소된 게 아니라 사실은 더 싼 운임으로 화물을 실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그쪽으로 배차를 돌려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선업자의 눈 밖에 났다가는 일거리, 즉 짐을 아예 안 주기 때문이다.
건교부는 지입제 폐지 동의하지만…
힘의 논리에 따라 운송업체와 알선업자 모두 화주한테 운임을 현실화해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한다. 대신 늘어난 부담을 화물운송 노동자들한테 모두 떠넘기는 식이다. 화물운임을 화주한테 현찰로 받는 것도 아니다. 대개 석달짜리 어음으로 끊어주는데, 화물 운전기사들이 당장 현금화하려면 수수료를 물고 어음을 깡(할인)해야 한다. 운송업체들은 지입료만 꼬박꼬박 챙길 뿐, “기름값이 오르든 말든 돈을 벌든 말든 개인사업자(?)인 차주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투다.
주무부처인 건설교통부도 지입제 폐지 방침을 밝히고 있긴 하다. 하지만 화물운송업체들이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치열한 국회 로비를 벌이면서 폐지 시기가 차일피일 늦춰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일반화물 번호판을 단 차량은 전국적으로 20만대. “박정희 정권시절 군복 벗은 영관급들한테 화물운송면허를 하나씩 안겨줬는데, 이제 번호판 팔아먹고 가만히 앉아 지입료를 챙기고 있는 거야.” 화물차 경력 20여년의 늙은 화물 노동자 임씨가 말했다.
‘난폭 화물차’라고 낙인찍혀 있지만 들여다보면 그만한 속사정이 숨어 있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한푼이라도 아끼려면 심야운행이 불가피하다. 밤 12시부터 새벽 6시30분까지 통행료가 심야할인(50%)되기 때문이다. “톨게이트 앞에 트레일러를 주차시켜놓고 한숨 붙이다가 12시 땡하면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새벽 6시 반까지 부산톨게이트를 빠져나와야 합니다. 화주가 정한 시간 안에 물건도 대야 하고…. 우리가 화물차 타고 골프 치러가는 것도, 놀러가는 것도 아닌데 경유에 특소세를 물리는 게 말이 됩니까?” 운송비의 40%에 이르는 경유값을 내려주지 않으면 지입제 아래서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얘기다. 잠 설치고 고속도로를 헤집고 다녀봤자 엄청난 경유값, 도로비 때문에 결국은 돈 벌어 길바닥에 뿌리는 격이 되고 만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화물차가 들어서면 다 괄시해요. 승용차 몇대가 주차할 공간을 우리가 차지한다고 그러는데, 휴게소 식당에서도 눈칫밥을 먹어야 합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서 물류를 떠맡은 화물운송 노동자들은 국가 기간산업 종사자 아닙니까?” 박씨가 울분을 토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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