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의 재발견⑧
땅의 여신을 숭배하던 엘레프시스도 황폐해져… 인간이 유린하면 땅은 반드시 보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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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 펠로포니소스 방향으로 기차를 타고 반 시간 정도 가다 보면 산업 쓰레기로 가득 찬 지역을 지나 정유공장의 석유저장탱크 사이를 통과한다. 이 지역은 그리스에서 가장 오염이 심한 중화학공단지역으로 부둣가에서 내륙지역까지 모두 공장으로 들어차 있다. 이곳을 몇번이나 지나친 적 있지만 중화학공단지역이려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연재를 준비하면서 만난 그리스 출신의 작가나 학자들 입에서는 언제나 ‘엘레프시스’라는 이름이 계속 나왔다. 나는 그 지역이 바로 엘레프시스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어떻게 4천년 역사를 간직한 그렇게 신성한 신의 도시에 공단을, 그것도 환경오염의 최대주범인 중화학공단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딸을 찾아헤매던 어머니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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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는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행위다. 내전이 끝난 1950년대부터 그리스는 우리나라처럼 돈을 벌 계획을 세우면서 문화유산이나 환경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기업주들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허가를 내주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부끄러운 엘레프시스’가 존재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엘레프시스에서는 이를 풍자한 구전동요가 어린이들 사이에 회자돼왔다. “꽃바구니 들고 떠나자, 더 이상 생명 없는 엘레프시스에서. 어린이들을 데려가자, 더 이상 생명 없는 엘레프시스에서.”
‘성스러운 땅 엘레프시스’는 고대의 델피나 올림피아처럼 신들에 제사를 지내던 신전들로 가득 찬 신들의 도시였다. 델피가 아폴로, 올림피아가 제우스의 고향이었다면 엘레프시스는 여신 디미트라의 고향이었다. 옛날의 성스러운 향기는 전설이 되어 남아 있고 여기저기 흩어진 돌들만 지난날의 영광을 대신 전하고 있다. 이곳은 땅의 어머니인 여신 디미트라가 살면서 직접 인간들에게 농경법을 가르친 곳이다. 엘레프시스의 신전 터를 지나면 아담한 박물관이 나오는데 이곳의 석상들은 대개 머리가 잘려나가고 몸통만 남아 있다. “석상의 몸체만으로 디미트라상인지 아르테미스상인지를 구별해내야 하는 것이 그리스의 고고학자들이 맡은 피곤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한 박물관 관계자가 말했다.
곡식을 비롯한 땅의 풍요로운 생산을 맡은 여신인 디미트라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퍼세포니를 낳았다. 그런데 어느 날 퍼세포니가 들판에서 꽃을 따던 중 갑자기 땅 속으로 사라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물론 아디스신의 준비된 계획이었다. 에로스의 사랑의 화살을 맞은 저승세계의 신 아디스는 퍼세포니를 짝사랑하며 괴로워하던 중 퍼세포니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형제인 제우스에게 이를 고백하고 제우스의 허락을 얻어낸다. 물론 납치된 퍼세포니는 지하세계의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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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세포니의 지하세계로의 여행을 현대인의 시각으로 다룬 것이 루이스 캐럴이 지은 다. 퍼세포니가 없어진 뒤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땅의 어머니인 여신 디미트라가 식음을 전폐한 채 횃불을 들고 지구의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며 딸을 찾아헤맸다. 제우스의 배신에 실망한 디미트라는 올림포스를 포기하고 엘레프시스에 정착했다. 새들도 울음을 그치고 나무들까지 얼어붙으면서 온 천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의 수도원 같은 곳

땅을 돌봐야 할 여신이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잃어버린 딸만 찾으러 다녔으니 당연히 땅은 생명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 인류는 기근으로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어두운 겨울은 그칠 줄 몰랐다. 죄의식을 갖고 있는 제우스는 올림포스산의 모든 신들을 디미트라에게 특사로 보내어 돌아올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제우스는 에르미스를 지하세계로 보내 아디스에게 퍼세포니를 내놓을 것을 명한다. 물론 영리한 아디스는 지하세계의 과일을 먹은 누구도 지하세계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해 지하세계에서 자란 석류를 퍼세포니에게 먹인 뒤 다시 협상을 시작한다. 타협책으로 나온 결론은 퍼세포니가 여섯달을 지상에서, 나머지 여섯달은 지하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딸을 만난 어머니는 땅을 회복시켜 꽃과 곡식이 무르익게 했고, 세상에는 생명과 평화가 찾아왔다.
엘레프시스에서 열린 종교행사는 퍼세포니를 찾기 위해 눈물과 함께 금식하면서 횃불을 밝히고 세상 구석구석을 누빈 여신 디미트라를 기리기 위해 열렸다. 당시 농업이 삶의 기반이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여신 디미트라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해마다 9월에 열린 엘레프시스의 비밀종교의식에는 수천명의 아테네 시민들이 아크로폴리스에서 엘레프시스까지 ‘거룩한 길’을 따라 함께 걸었다. 이들 가운데는 소크라테스·플라톤 등 당대의 철학자도 있었고, 로마제국의 지배기에 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있었다. 엘레프시스에서는 아홉날을 금식하면서 여신 디미트라를 위한 종교의식을 치렀는데 이 기간을 성스러운 기간으로 선포해 모두 기도와 명상에 매진했다. 엘레프시스에서 열린 의식은 수천년 동안 비밀에 부쳐졌으나 비잔틴 제국에 의해 조금씩 알려졌다. 이에 따르면 엘레프시스에서 진행된 비밀의식에서는 여신 디미트라에게 추수한 밀을 바치는 의식을 가장 중요시했다.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뒤 다시 열매를 맺는 현상을 비유로 표현해 인간의 죽음과 사후세계에 관해 가르친 것으로 알려졌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초연할 수 있던 것은 엘레프시스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이곳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영혼을 갈고닦은 수도원 같은 곳이다.
수천년 동안 인류의 의식세계를 지배해온 표현 가운데 하나가 ‘어머니 같은 땅’이라는 표현이다. 인간의 육체가 흙에서 나왔다는 믿음과 씨를 뿌리면 몇배로 생산해내는 땅의 생산력으로 인해 땅은 고대부터 신성시되었다. 그러나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땅은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화학물질이 경작을 위해 땅에 뿌려지면서 고통에 신음하기 시작했고, 곡식이 자라던 땅에는 공장과 높은 굴뚝이 들어서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강에는 폐수가 흘러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거침없고 잔인한 땅의 보복이 시작된다. 이전에는 언제 어디서나 마실 수 있는 물까지 오염됐고, 심각한 대기오염으로 인해 어떤 곳에서는 산소 마스크까지 쓰고 다녀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최대의 전쟁도발국들
무엇보다 땅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실험이다. 이전과는 달리 대량학살과 대규모의 파괴를 초래하는 현대 무기는 지구 전체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도 남는다. 미국은 지금 대략 1만2천개의 전략핵폭탄을 보유하고 있고, 러시아가 그 비슷한 수를, 다음은 수백개를 보유한 프랑스, 영국과 중국이 뒤를 잇는다. 지하 핵실험은 지구의 지반을 무너뜨려 지진의 중요한 원인이 돼왔다. 1945~98년에 미국이 한 핵폭탄실험은 1030번, 러시아는 715번, 프랑스 210번, 중국과 영국이 각각 45번이다. 이런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세계의 안전을 위해 일한다는 이른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영구상임이사국들이다. 즉, 핵무기를 이용해 다른 나라를 억압하는 최대의 전쟁도발국들이다.
지금 미국과 영국은 이미 수십만 병력을 걸프만으로 이동시켜놓고 공격을 개시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지난 2월15일, 수천만명이 전 세계적으로 전쟁반대를 그토록 울부짖었건만 부시와 블레어는 이를 아예 외면하고서 되레 으름장까지 놓고 있다. 이들의 전쟁선언은 땅의 보호자인 여신 디미트라를 다시 슬픔에 잠기게 해 복수하도록 자극하는 꼴이다.
아테네=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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