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장갑차 압사사건 100일을 맞는 평범한 주부 유순득씨의 분노와 다짐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9월20일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건’ 100일을 맞는 날이다. 그러나 날씨 탓일까. 여름 내내 뜨겁던 사회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 결국 우리는 다시 냄비처럼 식고 마는 것일까. 미국으로부터 형사재판권 이양 문제 하나 못 풀고 이대로 주저앉고 마는 것은 아닐까.
월드컵 열기로 지각 아래에서만 부글부글 끓던 미군 궤도차량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7월의 시작과 함께 폭발해 이 땅의 한여름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9월로 접어들면서 뜨겁던 시위 열기가 가을비에 젖은 듯 급속히 식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점차 잊히고 있다.
시위현장 누비고 날마다 1인 시위
3월에 비가 오면 날씨가 따뜻해질 조짐이고, 9월에 비가 오면 하루하루 서늘해진다고 했다. 미선이와 효순이가 사고를 당해 숨진 지 92일째인 9월12일 오후. 유순득(45·경기도 의정부시 가능2동)씨의 집을 찾아가는 길 위로 비가 내렸다. 그 비는 식어가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위로도 그렇게 추적추적 내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씨는 미선이와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그날(6월13일) 이후부터 시위현장을 누비며 하루도 빠짐없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마침 찾아간 그날은 어느 대통령 후보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다. 평소 자신이 존경해온 그 후보가 여중생 사건을 두고 “현행 한미행정협정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을 문제삼는 글이었다. 그는 인터넷에 글을 띄우고, 그 후보한테도 서면으로 좀 따질 참이라고 했다.
유씨는 이 사건이 의정부·양주지역에서 일어났음에도 집회장소에서 이 지역 국회의원이나 시장 등이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그 흔한 ‘유감의 성명서’ 한장 발표하지 않은 것에 무척 실망했다. “정치인에 실망한 게 어디 한두번인가요. 여중생 사건만 해도 그래요. 어느 정치인이 한번이라도 속시원하게 미국의 오만함을 따졌느냐고요. 정치인이 그 모양이니 미국이 제대로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겁니다.” 그는 우리 정치인의 저자세부터 꼬집고 나섰다.
100일은 길었다. 지금 그의 몸과 마음은 모두 많이 상해 있다. 속상하기로는 숨진 미선이, 효순이 부모만 하겠는가마는 한때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파 병원 다니면서 고생 꽤나 했다. 그는 이날도 “엄마 한번 못 부르고 장갑차에 무참하게 죽어간 미선이, 효순이가 너무 불쌍하다”며 연신 눈시울을 적셨다. 세상이 두 소녀의 죽음을 까맣게 잊을 때까지도 그의 눈물샘은 마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월드컵 열풍이 지축을 뒤흔든 6월14일. 아들 현구(고3)는 친구 여동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아들은 그곳에서 본 미군쪽의 무례한 행동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미군은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며 시종일관 변명하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이건 유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현구는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며 밤새 괴로워했다. 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유씨도 무척 가슴이 아팠다. 그 뒤로 밥맛을 잃어 식사도 못했고, 괴로운 날이 이어졌다. 이 문제가 결국은 내 자식, 우리 이웃의 문제임을 깨닫고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집회장을 찾아 나섰다. 시위현장을 향해 집을 나설 때마다 아들 현구가 고3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이 발목을 잡는 듯했다. 그러나 어쩌랴 엄마 노릇 잠시 접을 수밖에.
“그때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나봐요. 죽은 미선이, 효순이가 머릿속에 맴돌아 도저히 앉아서 화만 내고 있을 순 없더군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이 있는 자의 사과를 받아내고 충분한 보상을 받을 때까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모아 미국을 규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부끄러운 정치인들… 대선후보에 일침

그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미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주변 미군기지를 늘상 보아온 터라 그것은 주변의 일상이었다. ‘다만 미군들 조심하라’, ‘미군과 시비 붙으면 우리만 손해본다’는 말은 늘상 들어왔다. 하지만 미군의 존재는 자신의 문제로 별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미2사단 앞 시위현장에서 모르는 시민사회단체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열혈 시위자가 되어 있다. 사람이 변하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 것일까. 효순이, 미선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그가 이처럼 변한 건 얼핏 불가해하다. 그가 날마다 시위현장을 누비자 처음에는 주위에서 놀라워했다. 가족도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변화는 그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가족도 그를 따라 조금씩 변해갔다. 아들과 딸은 무언의 응원을 보탰고, 남편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몸이 많이 상해 있으니 좀 살살 하라”고 거들었다. 딸아이는 예전 같지 않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는 박수를 보내며 함께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 엄마의 드높은 사회의식에 공감했다.
그 당시 그가 미군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마다 미군이 히죽히죽 웃으며 빈정대는 모습을 보고 꾹 참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정말 그때는 분노가 치밀었어요. 이게 우방국이 우리한테 할 수 있는 짓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이들의 태도가 바뀔 때까지, 불평등조약인 소파가 개정될 때까지 1인 시위를 계속할 것임을 거듭 다짐하곤 했다.
더욱이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인터넷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인터넷을 보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시위대 수가 전체 시위대의 3분의 1이나 되었다. 월드컵에 묻힌 여중생 사건은 인터넷이 그 불씨를 살렸고, 지역 시민단체와 전국 시민사회단체가 동참해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밝혔다. 미흡하지만 미8군사령관의 사과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얼마든지 소파도 개정하고, 미군과 대등한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의 맘과 같지 않았다. 생계 때문에, 학업 때문에, 사람들은 조금씩 일터와 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위현장에 귀찮을 정도로 모습을 보이던 기자들은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자”고 앵무새처럼 떠들던 신문들도 조용해졌다. 세상은 빠르게 미선이와 효순이를 잊었다.
“미국 바로알기는 생명운동이다”
하지만 유씨는 희망을 접지 않는다고 했다. “저뿐 아니라 다들 너무 성급한 것 같아요. 일본이 소파 개정을 통해 형사재판권을 되돌려 받았듯 우리라고 그렇게 못하란 법이 있나요.” 그는 “더 체계적이고 결집된 모습으로 주한미군 문제를 장기과제로 풀어가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요즘 조카 손녀를 돌보는 그는 앙증맞은 아기의 모습에서 지난 여름에 겪은 풍상을 위로받고 있다. “미선이와 효순이를 잃었지만 이렇게 아이를 보며 새 생명의 위대함을 느껴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건을 규탄하고 따지는 일은 넓게 보면 생명운동인 것 같습니다.” 그의 초가을은 오묘하고 풍성해보였다.
의정부=황현호/ 의정부 참여사회 편집부장 thank-y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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