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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가해자 무징계 퇴사시킨 회사…싸워 이긴 피해자 “살아남는 모습 보여주겠다”

성폭력 가해자 쉬쉬한 대한항공에 4년간의 소송 끝에 승소한 피해자… “피해자가 사업주로부터 가해자 조치에 대해 설명받고 선택할 권리 인정한 의미있는 판결”
등록 2025-02-21 20:50 수정 2025-02-25 11:34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와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조합원들이 2020년 11월30일 서울 중구 한진칼 앞에서 대한항공 내 성폭력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와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조합원들이 2020년 11월30일 서울 중구 한진칼 앞에서 대한항공 내 성폭력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대한항공은 국내 1등 항공사다. 영업 중인 국내 9개 항공사 중 운항 편수, 여객 인원이 가장 많다.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이 완료되면 세계 10위권의 여객 수송력을 갖춘 초대형 항공사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굴지의 대기업이 소속 노동자와의 민사소송에서 어떻게든 이기겠다며 가용 자원을 총동원한 일이 있었다.

 

피해자 보호 대신 피해자와 싸운 ‘1등 항공사’

상대 노동자는 회삿돈 수백억원을 횡령해 회사에 막대한 피해를 준 사람이 아니었다. 대한항공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즉 회사가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노동자였다. 그럼에도 대한항공은 매출액 기준으로 국내 10위 안에 드는 대형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회사 쪽 변호사가 법원에 여러 차례 낸 의견서 분량은 1천 쪽에 달했다. 회사는 다른 직원들로부터 사실과 다른 내용의 확인서까지 걷어 법원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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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소송에서 이긴 건 피해자다. 법원은 대한항공이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를 징계하지 않고 사직 처리한 것은 법에서 정한 사업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않은 결과라며, 대한항공이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2024년 11월 확정했다.

“죽을힘을 다해 버텼어요.”

피해자는 이 결과를 얻기까지 대기업인 회사와 4년 넘게 법정에서 다퉈야 했다. 피해자를 2024년 12월5일 만났다.

“제가 대법원까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법원) 조정 과정(소송에 의하지 않고 당사자 간 합의에 이르는 절차)부터 시작해서 회사가 법원 결정과 판결을 계속 따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최종심까지) 끌려온 건데…. 여기까지 오다보니 신체적, 경제적으로 많이 망가졌어요. 없던 정신병이 생겼고,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자고, 게다가 엄청난 소송비용까지 더해져 제 삶이 더는 예전의 평범함을 되찾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근로복지공단은 피해자의 ‘중등도 우울 에피소드’ 질병을 직장 내 성폭력과 회사의 부적절한 조처에서 기인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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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가 근무한 부서의 팀장이었다. 2017년 7월23일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 대한항공 여객기의 탑승객 한 명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할 때 탑승 점검 절차를 받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출발하는 여객기 탑승구 앞에서 승객 탑승 수속을 하는 게 피해자가 같은 팀 동료들과 하는 일이었다. 피해자는 이 보안사고로 회사에 경위서를 제출해야 했다. 당시 팀장은 휴가였지만 피해자로부터 경위서를 전달받아 일부 내용을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급기야 7월26일 저녁 피해자에게 연락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사고 경위를 자세히 보고하라고 했다.

당시 회사 내엔 보안사고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중징계를 우려한 피해자는, 팀장 호출이 비록 휴무일 늦은 시간에 왔지만 유일하게 자신을 변호할 사람으로 믿고 찾아갔다. 팀장은 그런 피해자에게 성폭력(강간미수)을 가했다. “그날 일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어요.” 하지만 피해자는 팀장을 회사에서 만날 때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서웠다. 버티기 힘들었던 피해자는 2019년 12월 가명을 사용해 회사에 성폭력 피해를 알렸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사업주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되면 지체 없이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해야 하고, 조사 결과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이 확인된 때는 성희롱을 한 사람에 대해 징계, 근무장소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지체 없이 해야 한다. 이때 피해 근로자 의견을 들어야 한다.’ 남녀고용평등법에서의 성희롱은 강간, 강제추행(미수 포함)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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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가해자 징계 요구에도 묵살

피해자는 신고 후 회사 인사전략실과 법무실 관계자들과 한 면담에서 크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사건 내용이 누설되지 않도록 비밀 유지를 철저히 해줄 것. 그리고 회사가 규정에 따라 성폭력 가해자인 팀장을 철저히 조사하고 징계할 것.

대한항공 취업규칙은 형사소송의 원인이 되는 위법행위를 한 직원을 징계한다고 정했다. 또 대한항공의 ‘성희롱 행위 방지 및 처리 지침’도 성폭력 행위를 한 직원을 상벌위원회에 회부해 징계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상식을 벗어난 의도적인 행위일 경우에는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중징계에 처한다’고도 정했다.

그런데 회사 관계자들은 팀장을 징계 절차에 회부하면 사건 내용이 밖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면서 무징계 사직으로 ‘조용히’ 처리하겠다고 했다. 회사가 정한 규정과 맞지 않는 태도였다. 피해자는 회사가 팀장을 제대로 징계할 수 있다면 피해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일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다는 의사를 면담 과정에서 밝혔다. 하지만 회사 관계자들은 ‘팀장을 징계 절차에 회부해 대기발령 또는 보직 해임을 하면 억측이 난무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겉보기엔 피해자를 보호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하면 피해자는 직장 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들이 아무 징계도 받지 않고 회사를 그만둘 때, 남아 있는 회사 사람들에게 피해자의 평소 행실을 비난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 사내에는 ‘그 사람만 억울하게 그만뒀다’며 가해자를 동정하고, 피해자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심각한 2차 피해를 겪는다.” 이 사건 소송을 대리한 김재련 변호사(법무법인 온세상 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결국 대한항공은 2019년 12월30일 팀장을 무징계 사직 처리했다. 이 사건 피해자를 지원한 신상아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은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를 무징계 사직 처리하는 것은 회사가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법률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사실상 피해자 혼자 알아서 대응하라는 뜻”이라며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만일 가해자가 회삿돈 수십억원, 수백억원을 횡령한 직원이었다면 이렇게 처리했을까요?”

피해자는 2020년 7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가 바란 건 돈이 아니라 ‘조사’와 ‘재발 방지’였다. 피해자는 법원 조정 절차에서 ‘외부 기관이 대한항공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성폭력 실태 전수조사’라는 요구를 회사가 받아들이면 손해배상 청구를 포기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회사는 이의를 제기하고 소송을 진행했다.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하며 피해자 손을 들어준 1, 2심 재판부 모두 팀장의 성폭력에 대한 대한항공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민법에서 말하는 ‘사용자의 배상 책임’이란, 쉽게 말해 어떤 회사 직원이 사무 집행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손해를 가했다면 그 직원의 사무를 감독하는 회사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대한항공은 팀장의 성폭력이 휴가 기간에 발생했으므로 사무 집행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팀장으로서 피해자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가진 가해자가 업무를 빌미로 피해자를 불러낸 점 등을 종합해 가해자의 범행은 사무 집행과 관련이 있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대한항공 직원으로 일하며 같은 부서 상급자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노동자가 2024년 12월5일 한겨레21과 만나 인터뷰했다. 피해자 요청에 따라 인터뷰는 익명으로 진행했다. 사진은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한겨레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대한항공 직원으로 일하며 같은 부서 상급자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노동자가 2024년 12월5일 한겨레21과 만나 인터뷰했다. 피해자 요청에 따라 인터뷰는 익명으로 진행했다. 사진은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한겨레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회사 책임 인정한 법원, “피해자에게 배상하라”

다만 판단이 갈린 지점은 회사의 사직 처리 부분이다. 1심 재판부는 무징계 사직이 징계 절차를 밟아 도달하는 ‘해고’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들며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정한 사업주의 조치 의무를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김재련 변호사는 “사직과 해고는 천양지차(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했다. “가해자가 징계받고 해고된다면 ‘그 사람은 매우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회사가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소문으로 피해자가 가해자로 취급되는 것을 막는 방패가 된다. 이는 직장에서 계속 일하는 성폭력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겪지 않고 노동자로서 안전하게 일할 권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다.”

2심 재판부가 이를 바로잡았다. 회사가 가해자를 징계 절차에 회부하면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객관적으로 설명하거나 비밀 보장을 위한 방안을 강구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피해가 공개될 염려가 있다는 점만을 계속 강조하면서 가해자의 무징계 사직을 받아들일 것을 피해자에게 “사실상 강권했다”고 판단했다. “원고(피해자)가 다양한 선택지의 장단점을 충분히 검토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했다. 피고(대한항공)가 남녀고용평등법상의 ‘필요한 조치’를 다하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2심 재판부 판단이다.

재판부는 또 회사가 지속적인 상담과 인사상 배려 등 피해자 보호 노력을 하지 않은 점도 회사의 불법행위 구성 요소 중 하나로 인정했다. 2024년 11월14일 대법원은 2심 판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마침표를 찍었다. 김재련 변호사는 “사업주가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에게 징계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할 때 각각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를 피해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피해자가 숙고하여 그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은 피해자의 권리”라며 “사업주가 이런 피해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법원이 판단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신상아 회장은 “직장 내 성폭력 발생 사실을 인지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사업주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매우 큰 변곡점을 만들어낸 판결이자 다른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큰 힘이 될 판결”이라며 “이 판결을 끌어내기까지 버틴 피해자에게 감사하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가 접수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포함) 신고는 2019년 1345건, 2021년 1576건, 2023년 1875건에 달한다. 노동부에 신고되지 않은 사건까지 고려하면,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은 더는 이례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피해자는 대한항공에서 성폭력(‘성희롱’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성적 괴롭힘 포함)을 여러 번 경험했다. 2008년 3월 회식 자리에서 다른 상급자로부터 강제추행 피해를 입었다. 2018년 5~8월에는 새 부서 직원이 ‘남자들한테 눈웃음을 친다’ ‘네 눈이 남자를 꼬신다’는 등의 말을 마구 뱉었다. 이처럼 성폭력이 비일비재한 회사 안에서 피해자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피해자가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

그래서 피해자는 복직이 매우 큰 부담이다.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전 복직은 꼭 할 거예요. 꼭, 오랫동안 (회사에서) 견딜 거예요.” 이유가 궁금했다. “다른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옳았다고, 그래서 제가 살아남는 모습을요.”

피해자는 이렇게 사건을 알리고, 인터뷰에 응하는 일이 처음엔 두려웠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 조직 문화는, 직원이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쉽게 바뀔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워낙 보수적이고 위계가 뚜렷해서, 정식 절차를 밟아 신고해도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제 사건은 빠르고 간편하게 마무리됐고, 회사가 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거나 시스템을 재점검할 여지조차 보이지 않았죠. 그런 현실을 겪고 나니, ‘내부 절차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었어요. 결국 행정기관·사법부·언론 등 외부에 문제를 알리고, 사회의 관심을 받는 것만이 회사를 움직일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많은 분이 제 상황을 지켜봐주신다면, 회사도 저에게 함부로 보복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 없으리라는 간절한 바람도 있었죠. 무엇보다 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또 같은 피해가 동료들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계속 발생하고, 기업이 가해자를 아무런 징계 없이 내보내고, 피해자는 사내 따돌림으로 버티다 못해 퇴사하는,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 되는 사회를 바라며, 피해자는 오늘도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대한항공은 “회사는 직장 내 성폭력 및 성희롱 방지를 위해 전 직원 대상 정기·비정기 교육 실시 등 가능한 모든 조처를 하고 있으며, 사내에서 성희롱 발생 시 정직에서 사직까지 중징계로 엄정하게 대처하고 있다. 향후,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지속 모니터링하고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2020년 12월 ‘외부 컨설팅 업체에 위임해 회사 내 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사건에 대한 실태를 전수조사’하라는 법원의 조정 결정을 거부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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