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인 5월, 가자지구 어린이들은 지옥을 경험했다. 이스라엘군이 안전지대라던 피란민 텐트까지 폭격해 수많은 이가 죽고 다쳤다. 비슷한 시기, 우크라이나 시내의 한 대형 인쇄소엔 러시아 미사일이 떨어졌다. 잔해에 깔린 희생자 주검을 소방관들이 수색했다. 한때 역사 속 개념에 불과했던 전쟁은 이제 생생하고 잔혹한 현실로 동시대를 흔들고 있다.
전쟁의 일상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시민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시 무기 판매 등으로 군산복합체가 얻는 초과 이윤 등에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영구 전쟁 체제에 반대하는 민초들이 서로 손잡고 함께 연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가 최근 저작 <전쟁 이후의 세계>(한겨레출판)에서 제안한 내용이다. 2024년 5월13일 한국을 찾은 박 교수를 <한겨레21> 유튜브 프로그램 ‘사기자’가 만났다. 2시간에 걸친 영상 인터뷰를 짧게 요약해 싣는다.
—<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새로운 패권 경쟁 시대를 전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 수단 내전 등등 지금 일어나는 군사 분쟁을 총 개념화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봤다. 도달한 결론이 뭐냐면 지금 (우리가) 패권 교체의 시대를 사는 게 아닌가, 비슷한 시기를 꼽자면 제1·2차 세계대전과 그 사이 시기라고 생각된다.”
—러우 전쟁(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차에 접어들었다. 언제쯤 끝날까.
“전쟁의 목적을 알면 대략 언제 끝날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러시아와 서방 사이 우크라이나라는 완충지대의 일부는 강탈해 자국에 편입시키고, 일부는 러시아 말을 잘 듣는 고분고분한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 목적이 실현될 때까지 푸틴은 전의를 불태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내년 미국에 새 지도부가 들어서는 만큼 변곡점이 찾아올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
—전쟁은 고도의 동원 체제다. 국민이 인내할 한계치를 넘어버리면 푸틴 정권도 흔들리는 것 아닌가.
“전시 특수라는 게 있다. 군대는 각종 물건을 많이 먹는 괴물이다. 증산을 해야 하고 제조업 주문도 많이 들어온다. 그래서 2023년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3.5%였다. 올해도 아마 4% 정도일 거다. 물론 전쟁의 고통이 당연히 있다. 전쟁 인접 지역에선 포격 등으로 러시아 사람도 죽는 거고, 입대한 사람들도 고통받는다. 하지만 실제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은 거의 없다. 고통의 분배도 말하자면 총알받이가 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다.”
—러시아 집권 세력이 이 전쟁으로 추구하는 건 뭘까.
“한국은 정치보다 자본의 사회 통제력이 크다. 러시아는 ‘거꾸로’다. 안보 계열의 관료들이 먼저고 자본은 그냥 그 말을 듣는다. 우크라이나 침략은 러시아 자본에 불편한 면이 적잖았다. 서방과의 교역에 엄청난 차질이 생기고 서방 은행 사용도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도 결정권은 자본에 없다. 전쟁 뒤 서방과의 관계가 차단되니 러시아 자본이 서방에 있던 자금을 가능한 한도까지 회수해 자국에 다시 재투자하는 입장이 됐다. 이제 정치인들이 원하는 건 그 자본을 (국내) 제조업에 투자하는 거다.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 특히 반도체 공장 신설에 힘을 많이 쏟는다. 2030년까지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반도체의 절반을 국산화하겠단 계획이다.”
—전쟁을 매개로 경제 체질을 개선하겠단 건데.
“한국이 1970년대 영구 집권 체제를 만들어 베트남 전쟁으로 돈 벌고 중화학공업에 집중 투자한 걸 생각하면 된다.”
—박정희 때하고 비슷하다는 취지인가.
“지금 푸틴 모델은 덩샤오핑, 나아가 시진핑의 중국 체제다. 당의 권력이 위에 있고 자본은 그 밑에 있다. 예를 들어 당이 최첨단 반도체에 투자한다면 자본은 무조건 투자해야 한다. 투자 결정권은 최종적으로 당에 있다. 그게 푸틴의 모델이다. 한데 그 모델의 청사진을 덩샤오핑이 어디서 얻었는가 하면 박정희였다. 그러니까 박정희 모델이 중국을 경유해서 러시아까지 가는 재미있는 순간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전쟁이 줄 이을 가능성도 있나.
“러-우 전쟁과 가자 전쟁에 이어 이란이 이스라엘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했다. 여태 그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선명한 규모의 전쟁, 대리전도 아닌 직접 전쟁의 가능성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이란이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산하며 이스라엘과 어느 지점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머지않은 시기에 다시 한번 큰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본다. 미국의 경우 동유럽엔 큰 관심이 없고 오히려 가면 갈수록 대외정책에서 동아시아의 중심선이 높아져간다. 역시 팍스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의 중심이 일본이고 동아시아라는 게 가면 갈수록 확인된다. 앞으로 동아시아의 긴장 수준이 경향적으로 높아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미·일 안보 협력에 치중하는 한국 정부 외교 노선도 위험 부담이 있겠다.
“아주 우려스럽다. 한국만큼 미국 말 잘 듣는 후국(侯國) 도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대러 제재만 해도 일본은 사할린에서 계속 에너지를 수입하지 않나. 제재는 일단 결의했지만 일부 예외 사항이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은 사실상 현대차가 철수했다. 삼성전자는 생산 중단됐다. 그러니까 사실 한국이 훨씬 더 나간 거다.”
—미국 말 잘 들으면 유사시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일 텐데.
“이스라엘도 미국과 굉장히 가까운 나라인데 이란으로부터 미사일 세례를 받았다. 미국 동맹국이라고 미사일 세례로부터 완벽히 (면제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인의 나쁜 습관 중 하나가 북한을 너무 얕잡아본다는 거다. 현재 미국 뉴욕까지 가는 미사일을 보유한 나라는 중국, 러시아, 북한 정도다. 미사일 기술로 치면 중국과 인도네시아 수준에 빨리 근접하고 있다. 그런 국가는 미국이 그렇게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걸 잘 봐야 한다. 지금 북한을 공격할 경우 위험 부담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미국도 알고 있다.”
—유사시엔 한국 국민만 피해를 본단 얘긴가.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만 안고 갈 거다.”
—전쟁 시대를 막을 주체는 오직 민중뿐이라고 책에 썼다. 하지만 한국에선 반전운동이 영 힘을 못 받는다.
“그래도 낙관적으로 보는 부분이 있다. 한국은 요즘 선진국이 돼서 그런지 인간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있더라. 채 상병 사망 사건만 봐도 한 사람의 희생이 아주 큰 문제가 된다. 만약 (전쟁으로) 수도권 지역에 북한이 하루만 포격을 가해도 최소 2만 명이 죽는다. 군인이 아닌 시민 피해 기준이고 실제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거다. 전면전은 피해자가 하루에 100만 명 넘을 수도 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우리가 민중에 호소할 수 있는 키워드는 생명과 평화 아닌가 싶다. 통일과 민족은 시대가 지난 듯해도 생명, 평화는 오히려 한국에서는 호소력이 더 커진 것 같다.”
—재한 이주민 규모가 250만 명에 이르는데 여전히 이주민 혐오가 득세한다.
“사실 한국인들이 외국인에게 배타적이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서양 외국인이 대학 다니거나 <한겨레> 인턴기자 한다고 하면 전혀 문제없을 거다. (그런데) 가끔가다 왜 조선족 차별이 이렇게 심한가 물어보면 ‘길거리에서 러닝 바람으로 다니고 침 뱉는 행위를 한다’는 답을 받는다. 그러니까 조선족 노동자가 한국의 하급 노동자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하급 노동자에 대한 계급적 멸시가 머리에 각인돼 있고, 그 정서를 조선족에게 그대로 쏟아붓는 거다. 외국인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계급 멸시라고 봐야 한다. 또 한 가지는 한국이 서열사회라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계급적 요소를 대외화해 외국에 그대로 적용한다. 예를 들어 서구인이면 무조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이른바 못사는 나라 출신이라면 무시해도 된다는 식이다. 국내에서의 흠모나 무시를 외재화하는 거다.”
—인종주의보단 서열주의의 발로라는 건가.
“무슬림이어도 사우디아라비아 왕자가 오면 줄 서서 환대하지 않겠나.”
—한국에서 이주민,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 혐오가 일상화돼버렸다.
“정치 시장에서 혐오가 주요 상품이 됐다. 오른쪽(우파) 주변부에 가면 혐오밖에 없다. 우리한테 필요한 건 혐오 장사를 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를 적어도 지식인 집단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다. ‘하면 안 되는 게 있다’는 것. 제22대 총선에서 한 후보(자국민보호연대 박진재)가 외국인 노동자를 감금해 사설 고문한 것을 내세웠다. 나치 친위대도 아니고 무슨 1930년대 독일인가. 이러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제22대 총선에서 녹색정의당이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약자를 위한 정당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걱정이 있는데.
“미국식 양당제가 한국에 너무 강하게 뿌리내리는 것 같다. 이러면 노동자나 영세민의 이해관계가 그냥 묻힌다. 한국 국회의원 중 제일 많은 직업이 법조인, 그다음이 직업 정치인이다. 이 나라를 부자로 만든 게 노동자인데 직접 물건 만들어본 사람 중에 국회의원 된 사람이 몇 명 있나. 이주민, 영세민, 소상공인 출신 의원이 있어야 한다.”
—미국은 반전운동이 활발한데 한국은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시민운동 전면에 나서는 사람 중엔 흑인 등 마이너리티가 많고 그들에겐 이 전쟁이 남의 일이 아니다. 백인에게 계속 시달려왔고 지금도 사실상 이등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아랍인이 이스라엘에서 이등 시민으로 사는 게 이들에겐 피부로 와닿는다. 근데 한국은 아직까지 마이너리티들이 시위를 벌일 만큼 조직화되지 않았고 자신감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 중국 조선족 동포만 해도 100만 명 가까이 와 계신다. 이분들이 만에 하나 격렬하게 시위하면 한국 사회는 크게 흔들릴 거다.”
—앞으로 언론이 할 역할은 뭔가.
“일단 우리가 세계에 좀더 많이 열려야 한다. 대한민국만큼 경제가 세계화한 나라도 드물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무역 의존도 비율이 80%가 넘는데 미국은 27%밖에 안 된다. 근데 우리한테 세계는 뭔가. 유럽, 미국, 중국, 일본 아니면 동남아다. 사실 세계는 그보다 훨씬 넓다.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부분, 예를 들어 지금 에콰도르에서 왜 범죄조직이 고위 경찰과 전쟁을 벌이는가와 같은 문제는 세계 마약 시장, 나아가 미국의 마약 경제와 직결된다. 혹은 수단에서 왜 내전이 벌어지는가. 우크라이나 전쟁만큼 큰 문제였는데 한국 보도량을 보면 아무도 관심 없다. 언론이 세계를 좀더 넓게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이야기에 민감하게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예시를 들어달라.
“예를 들어 한국에서 기본적으로 페티시화돼 있는 게 수출이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니까. 그러다보니 무기 수출까지 ‘케이(K)-무기’라고 부른다. 하지만 케이무기도 사람을 죽인다. 케이무기가 이스라엘에 가면 반식민주의와 전쟁을 벌이는 제3세계 인민을 죽이는 흉기가 되는 거다. 왜 다들 케이무기 수출에 환호하고 열광하나. 누군가 (비판) 발언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국이 죽음의 장사에 환호할 테고 100년 뒤 역사를 보면 전쟁 폭리에 열광하는 대한민국이 역사 교과서의 한 단락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재한 중국 조선족 동포 100만 명은 소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조선족 출신이 쓴 칼럼을 찾아보기 힘들다. 100만 명이나 되는 커다란 집단을 대변하는 대중 지식인이 칼럼을 쓰는 게 정상 아닌가. 여러 소수자 집단이 여론 공간에서 자신을 대변해야 한다. 그게 다민족 민주주의 국가의 정상이다. 그래서 한겨레가 이제 이런 것을 조금 더 앞장서서 했으면 좋겠고 적어도 한국어 표현이 완벽하게 가능한 재중동포에게라도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리=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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