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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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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 공원, 이건희 기증관 공원 되나?

서울 4대문 안에 찾기 어려운 제대로 된 녹지공원이지만 2025년부터 이건희 기증관 공사하면 경관 가려져
등록 2022-10-16 00:30 수정 2022-10-18 14:50
열린송현녹지광장과 주변의 모습. 빨간 실선이 이건희 기증관 예정 터이다. 서울시 제공

열린송현녹지광장과 주변의 모습. 빨간 실선이 이건희 기증관 예정 터이다. 서울시 제공

“진짜 공원 같다.” “개방감이 좋다.”

2022년 10월7일 서울 종로구 동십자각에서 종로문화원을 지나 임시 개장한 ‘열린송현녹지광장’(이하 송현공원) 남서쪽 입구에 이르자, 시민들의 탄성이 들린다. 입구에 서서 보니 동서 270m 남북 200m, 넓이 3만7117㎡(1만1248평)의 녹지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4대문 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제대로 된 녹지공원이다.

송현공원은 일제강점 초기인 1906년 매국노 윤덕영 일가가 이 터를 차지한 뒤 116년 만에 시민에게 공개됐다. 해방 뒤 미국대사관과 삼성, 한진 등 대기업이 소유했던 것을 정부와 서울시가 함께 매입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임시로 문을 연 송현공원은 이건희 기증관 공사로 인해 2025년 초 문을 닫고 2027년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4대문 밖에는 월드컵공원, 올림픽공원, 서울숲 등 규모 있는 공원이 꽤 있다. 그러나 역사 도심인 4대문 안에는 제대로 된 공원이 없다. 삼청공원, 남산공원, 낙산공원이 있으나, 공원이라기보단 산이다. 가장 역사가 오랜 탑골공원이나 사직공원, 장충단공원, 흥인지문공원, 훈련원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등은 역사 유적인지 공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조선 후기 권세가들 땅에서 시민 품으로

송현공원은 규모는 작지만 여러 측면에서 공원으로서 의미가 크다. 먼저 역사적으로나 경관적으로 중요한 도심 한복판의 평지에 조성됐다. 또 공원 안에 나무와 풀, 꽃, 가로등, 벤치, 표지판 외에 다른 시설이 없다. 온갖 시설물로 범벅되지 않아 오히려 공원답다. 또 공원 둘레에 높은 담장이 없어 안팎이 두루 잘 보이고 접근하기 쉽다.

남서쪽 입구에서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자, 꽃밭을 지나 잘생긴 중국단풍 한 그루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다. 서쪽으로 ‘두가헌’ 음식점의 고풍스러운 서양 건물과 한옥, 은행나무 두 그루가 눈에 띈다. 여기가 벽동(송현동의 옛이름)에 있던 윤덕영의 ‘벽수거사정’ 터가 아닐까 싶다. 1909년 그림 <벽수거사정도>를 보면, 1906년 이 터를 차지한 윤덕영의 한옥 안팎에 은행과 단풍, 솔 등 큰 나무들이 있었다.

원래 벽수거사정은 순조의 딸인 복온공주와 그 남편 장동 김씨 김병주의 ‘창녕위궁’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런데 앞서 창녕위궁은 18세기 영의정인 청송 심씨 심상규의 대저택 ‘가성각’을 이어받았다. 가성각엔 중국풍 건물이 있었고 4만 권의 책과 그림, 꽃과 나무가 있었다. 장동 김씨나 청송 심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 권력 가문이다.

중국단풍 뒤로 가서 돌아보니, 멀리 트윈트리타워(옛 한국일보) 등 고층 건물을 배경으로 하고 중국단풍을 주인공으로 한 공원 모습이 아름답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땅이 느리게 기울어졌다.

동쪽으로 걸어가면 남쪽으로 송현공원의 녹지 가운데 가장 넓은 중앙잔디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앙잔디광장의 남서쪽엔 빛을 내는 커다란 공 모양의 미술품 30여 점이 설치됐다. 아무 거칠 것 없이 중학동, 수송동, 인사동 쪽으로 펼쳐진 거대한 잔디밭에 가슴이 탁 트인다. 그러나 아직 중앙잔디광장엔 치명적 문제가 있다. 10월7일 개장 다음날부터 ‘잔디 보호’를 이유로 출입을 막은 것이다.

서울시 양병현 공공개발 기획담당관은 “개장 직전에 비가 많이 와서 잔디가 뿌리 내릴 시간을 주는 것이다. 잔디가 안정된 뒤 완전 개방까지 2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송현공원을 공원답게 만드는 다른 장치는 공원 길가에 놓인 벤치다. 20개가 놓인 벤치는 공원 산책과 휴식, 대화, 사색을 상징한다. 한국 도시의 공공공간에 극히 부족한 벤치가 광화문광장에 이어 송현공원에 대거 공급된 것은 다행이다. 공원 벤치는 거리 벤치보다 훨씬 더 운치 있다.

열린송현녹지광장 북서쪽에서 본 중국단풍과 고층 건물의 모습. 오른쪽은 심상규, 김병주, 윤덕영 등 조선 후기와 구한말 권력자들의 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김규원 선임기자

열린송현녹지광장 북서쪽에서 본 중국단풍과 고층 건물의 모습. 오른쪽은 심상규, 김병주, 윤덕영 등 조선 후기와 구한말 권력자들의 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김규원 선임기자

“새 국립미술관은 서울 아닌 지방 도시에”

중앙잔디광장 북쪽 길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가니 옛 풍문여고를 고친 공예박물관이 단아하게 보인다. 특히 색색으로 둥글게 만든 어린이박물관의 디자인이 예쁘다. 그러나 2025년께부터는 송현공원에서 공예박물관 모습을 볼 수 없다. 송현공원 동쪽 부분에 터 9787㎡, 건축면적 3만㎡ 규모의 이건희 기증관이 지어지기 때문이다. 이건희 기증관은 공원 동남쪽을 거의 다 가린다.

인사동길 입구로 걸어가다가 문득 돌아보니, 북쪽으로 백악이 우뚝하고 서쪽으로 인왕산이 수려하다. 경복궁과 서촌에서도 백악과 인왕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송현공원은 그와는 다른, 두 산의 유장한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송현공원은 임시 개방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 속에 있다. 가장 큰 논란은 이건희 기증관이다. 문화연대 박선영 정책연구센터 소장은 “사회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을 기념하는 미술관을 짓는 것이 타당한가. 새 미술관이 시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관광산업을 위한 것인지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규모(연면적 5만2101㎡)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바로 옆에 연면적 3만㎡의 새 국립미술관을 짓는 게 타당하냐는 비판도 많다. 이민원 전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지방엔 국립미술관이 없다. 그런데도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 바로 옆에 또 국립미술관을 짓는 게 말이 되는가. 이번에 지방의 주요 도시에 국립미술관을 마련해야 한다. 문화예술 균형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규모 지하 주차장에 물순환 막힐라

송현공원 지하에 2층으로 450면, 연면적 2만㎡의 주차장이 들어서는 것도 논란거리다. 이 규모의 지하 주차장을 짓는다면 이건희 기증관 터를 제외한 송현공원 터(2만7330㎡)의 상당 부분을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도심 교통은 대중교통과 보행으로 풀어야 한다. 대규모 주차장은 주차난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차량 정체와 주차난을 악화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송현공원에 대규모 주차장을 파면 공원의 순기능 가운데 하나인 물순환을 파괴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환경연합 김동언 팀장은 “물이 흙을 통해 깊이 들어가야 지하수가 되고 가뭄, 홍수에도 도움이 된다. 대규모 지하 주차장은 빗물 유입을 막아 지하수를 고갈시키고 홍수 위험을 키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송현공원에선 시설물을 최소화해 공원의 본질적인 모습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배정한 서울대 교수(조경학)는 “송현공원은 면적이 크지 않지만, 빈 땅이 가진 도시적 기능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이다. 이번 임시 개방을 통해 도심에 개발하지 않는 여백을 둬야 한다는 시민의 합의를 만들어내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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