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선배들 앞에 면구스럽지만, 이 동네에서 십수 년 지내다보니 가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뭐냐”는 질문을 받을 짬밥이 되었다. 극적으로 무죄를 받은 살인사건이라거나 어려운 처지의 불우한 이웃을 도와 비극적인 처지를 바꾸었다는 무용담이 줄줄 나와야 모양이 나겠는데, 자꾸 패소 사건 당사자들이 스쳐간다. 패소하면 “더 열심히 했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까”를 되물으며 밤잠을 설치던 20대의 진심은, 어느덧 “이기면 내 덕, 지면 법원 탓”을 외치는 40대의 뻔뻔함으로 바뀌었건만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 때문일까? 그때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을 묻게 되는 일도 있다. 직장여성 차별의 대명사처럼 돼버린 ‘농협 사내부부 해고 사건’이 그중 하나다.
“내조는 이럴 때 하는 것”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여파로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1999년, 당시 1년차 변호사였지만 쟁쟁한 노동법 전문가 선배를 모신 덕에 여성단체가 나서 형사고발을 하고 소송 참여자를 찾던 이 사건에 참여하게 되었다. 간략하게 사건 설명부터 하면 이렇다. 구조 조정을 실시하며 ‘부부 직원’을 ‘상대적 생활 안정자’라고 하여 명예퇴직 권유 대상에 포함시켰는데, 말이 권유이지 퇴직 신청을 안하면 무급휴직이 기다리고 있고, 휴직이 끝나더라도 언제 복직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구조조정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서 그치면 사내부부들 처지에서는 억울하기야 하겠지만 여성 차별로 보기는 어려운데, 나머지 대상자들의 경우 권유에 따르지 않으면 본인이 휴직 대상자가 되는 반면 사내부부는 “사내부부 중 1인이 명예퇴직 신청을 하지 않으면 남편 직원이 휴직 대상이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 이 조건은 마법의 주문 같은 효과를 낳았다. 사내 부부 762쌍 중 688쌍의 ‘아내’ 직원이 사표를 낸 것이다. 회사는 이런 조건에서는 대부분 아내 직원이 퇴직 신청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성역할 고정관념과 가부장적 문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 차별적 결과 역시 충분히 예상하고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신고센터까지 열어두었는데도 한동안 소송 참여 신청자를 찾을 수 없었다. 사표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러니까 남편이 계속 근무하고 있어 농협을 상대로 무언가를 한다는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 포기하려고 할 때, 두 사람의 아내 직원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남편 생각해서 참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억울하고 분해서 안 되겠더라고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사해 평생직장으로 알고 10년 넘게 열심히 일했고 같은 직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조조정 대상이 되고 “며느리는 출근하는데 아들은 놀면 어느 시부모가 좋아하겠느냐, 내조는 이럴 때 하는 것”(실제 지점장이 한 말이다)이라는 말을 들으며 퇴직하게 되다니. 두 사람 모두 승진을 앞둔 고참 여직원이었고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큰 ‘언니’들이었다.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용인’… 대법원까지 패소
드디어 재판이 시작됐다. “금차 순환명령 휴직 후 복직 없이 정리해고할 수밖에 없음… 부부 직원- 특히 여직원- 배우자인 남편에게 불이익이 있음을 주지시킴, 우선적으로 남편을 통하여 배우자 명퇴 유도”라고 적힌 서류도 나오고, 전체 명예퇴직 권유 대상자 중 실제 신청자는 82% 정도인 반면 부부 사원은 98%가 신청했다는 수치도 확인됐다.
하지만 법원은 “부부 직원에 대하여 수차례 명예퇴직을 종용하며 그러지 않으면 남편들이 순환명령 휴직 대상자가 될 것이고 그 후 복직이 불투명하며 그들이 바로 정리해고 대상자가 될 것이라는 점을 고지하였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용인된다’고 하는 기이한 논리로 은행 쪽 손을 들어주었다. 항소심에서는 전문가 증언을 포함해 모두 5명의 증인을 신문하고 원고 본인 진술도 했으나 결론은 같았고, 대법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퇴직 신청을 한 것”이라는 은행 쪽 주장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이 재판은 3년 가까이 계속됐다. 당연히 세간의 관심은 예전 같지 않아졌고, 사람들은 경기회복의 봄을 즐기는 듯했다. 담담히 사건을 진행하던 선배 변호사들과는 달리 “꼭 이겨야 하는 사건” 패소 경험이 없던, 그리고 아직 법원에 대해 믿음이 남았던 신참 변호사는 이 사건을 대할 때마다 초조했다. 거의 비슷한 다른 회사 사건이 항소심부터 승소하기 시작하자, 괜히 중요한 사건을 내가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의기소침해할 때마다,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아팠을 사건 당사자들에게서 격려를 받았다. 어리바리 변호사가 불안했을 텐데, 단 한 번도 내색을 않고 따뜻한 붕어빵이나 시원한 냉커피와 함께 늘 ‘파이팅’을 외쳤다. 대법원에서까지 안 좋은 결과를 받고도 “재판을 해봐서 속이 시원하다”고 했고, 그 뒤로 많은 퇴직 아내 직원들도 용기 내어 재판을 시작한 것도 잘된 일이라고 하며 “이제 변호사님을 자주 못 만나는 게 더 아쉽다”는 감사 인사까지 받았을 때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들은 해고 이후 같은 지점에서 월급 반토막의 계약직으로 일하거나 다른 은행의 계약직을 전전하고 있었지만, 늘 씩씩했고 후회보다는 최선을 다했다며 앞으로 은행들이 이런 일을 함부로 못할 것 아니냐는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머뭇거리는 후배들도 살살 꼬드기고
변호사 시작하고 첫 3년, 가장 이기고 싶었던 사건의 패소. 자칫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던 일을, 나는 그렇게 씩씩한 언니들의 위로로 넘어설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다른 곳에서 여러 번 언니들을 만났다. 여자만 ‘40살 정년퇴직’이라는 차별에 맞서 홀로 싸워야 했던 사무직원, 같은 회사에 취직해도 승진은커녕 임금 인상도 꽁꽁 묶여 열받았던 특정 직군 근무자, 출산 때문에 퇴직했다가 같은 은행의 계약직으로 들어가 2년 단위로 해고되는 일에 분통 터뜨리며 비정규직 노조를 만든 은행원, 남들 다 받는 성과급을 왜 못 받느냐며 소송을 하겠다던 영양사들…. 때로는 실망스런 결과를 전해야 했지만, 언니들은 늘 먼저 일어서서 힘내라고 말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맷집이 세졌고, 여전히 많이 아픈 패소 판결을 들고도 다시 일어나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를 외치는 무모한 조언자가 되었다. 더 많이 공부해 꼭 이기고 싶다는 갈망도 커졌고, 머뭇거리는 후배들을 살살 꼬드기고 부추기는 일도 많아졌다. 다 언니들 덕분이다. 아, 맷집만 키우지 말고 실력도 키워서 얼른 언니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와야 할 텐데. 아직 갈 길이 멀다.
김진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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