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을 살면서 가장 고민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삭발을 할까 말까.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그나마 사람들이 나를 여자로 인식하는 건 풍성한 머리숱 덕분인데 이 머리를 홀라당 밀면 어떻게 될까? 고심 끝에 용기 내지 못한 난, 결국 긴 머리를 펄럭이며 2022년 4월19일 청와대 인근 공터로 향했다. 발달장애인의 부모 550여 명이 단체 삭발식을 하는 자리였다. 자식을 위한 ‘단호한 결의’가 모여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국정과제 안건을 제시하는 자리 였다.
이날 일을 얘기하기에 앞서 나는 “왜 시위하는가”를 설명해야 할 듯한 부담을 느낀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여론이 움직이는 걸 봤기 때문이다. 왜 시위할까, 그냥 제안하면 되는데.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전 칼럼에도 언급한 적 있는, 과거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다. 우려먹어도 어쩔 수 없다. 설명하는 데 필요한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2006년 전후의 어느 따뜻했던 봄날. 국회 출입 정치부 기자라는 스펙이 대단한 것이었던지 금배지를 단 중장년 남성도 딸뻘 되는 여성에게 “류 기자님~” 하며 고개를 숙였다. 류 기자의 일상은 바빴다. 매일 쏟아지는 정치 이슈를 마감하느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하지만 기자 역시 직장인. 다른 직장인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 “오늘 점심은 뭐 먹지?”
그럴 때면 같은 당을 출입하는(담당하는) 다른 매체의 기자에게 오늘의 기자단 만찬 일정을 물어 점심을 함께 하곤 했다. 그날도 점심시간이 됐고 마침 기자실을 나서는 중에 만찬을 주최한 의원과 마주쳐 기자 몇 명과 의원, 보좌관이 대화를 나누며 국회를 나섰다. 국회 앞에는 늘 시위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아보려 한 적은 없다.
아마 의원이 무슨 농담을 했을 것이다. 국회를 나서는 순간 모두 와르르 웃었고 나도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 1인시위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우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고 나도 얼른 시선을 거뒀다. 시위는 늘 있는 일이니까. 그런 ‘작은 일’에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으니까.
단지 하나의 일화를 전하려는 게 아니다. 그때 내가 속했던 사회적 ‘이너서클’(Inner Circle)의 어떤 생리, 분위기를 전하려는 것이다. 당시 나는 필요한 것, 부탁할 것이 있으면 언제나 전화를 했다. 전화 한 통이면 필요한 정보가, 필요한 인력이 척척 내 앞에 연결됐다. 모든 것은 전화 한 통으로 일사천리. 그땐 그것이 삶의 당연한 모습이 었다.
시간이 흘러 출산하고 아들이 장애 판정을 받고 기자직을 그만두고 발달장애아의 엄마가 됐다. 아들을 키우면서 도움이 절실한 일이 수시로 다가왔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전화할 수 없었다. 힘 있고 능력 있던 그 많은 인맥은 ‘기자’라는 딱지를 떼는 순간 사라졌고 나는 모든 일을 혼자 끙끙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렇게 힘들고 이렇게 억울하지만 어디에 말할 곳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다.
2018년, 발달장애인의 부모들로 구성된 모임이 있음을 알았다. 관련 정책을 만들기 위해 부모들이 삭발식을 한다고 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난생처음 시위 현장에 참여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어지러웠다. 그 따뜻한 봄날 내가 외면했던 누군가의 위치에 내가 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한 것은 아무도 내 아들을 돕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너서클’ 밖으로 밀려난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장애’가 한 가정으로 들어온다는 건 이런 의미 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왜 시위를 하냐고요?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상하고 우아하게 제안하고 싶지만 장애인의 제안을 받아주는 기득권이 없을뿐더러 제안할 수 있는 경로도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15년 전 내가 누군가에게 그러했듯) 나와 내 아들은 있지만(실존하지만) 없는(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청와대 공터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발달장애인의 부모 2천여 명이 모였고 그중 550여 명이 삭발했다. 이들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새 정부의 국정과제로 선정해줄 것을 호소했다.
2018년 209명의 부모가 삭발한 뒤 현 정부가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관련 정책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된 터였다. 그런데 2022년 5월에 출범할 새 정부의 공약에선 아예 관련 정책이 실종된 상태. 좋은 정책이 있으면 현 정부의 것이라도 이어가겠다는 게 새 정부의 방침 아니었던가. 그 말에 기대어야 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기 전, 인수위원회가 모든 국정과제를 마무리하기 전, 우리(발달장애인)도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삭발을 선택했다. 평일 낮에 모인 부모 대부분이 엄마, 즉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내줄 테니 우리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 호소했다. 몇 명이 동시 삭발을 해야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관심 보이는 척이라도 할까? 100명? 200명? 아니야. 2018년보다 많아야 하지 않을까? 강요하는 이 하나 없는 상황에서 삭발 신청자가 쇄도했다. 300명, 400명을 넘어 어느덧 500명을 훌쩍 넘어간 수. 그만큼 절실한 마음들이 모였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필두로 △낮활동 지원체계 구축 △지원주택 등 주거유지서비스 도입 △지원고용 확대 및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확대 △소득보장체계 구축 △실효성 있는 통합교육 지원체계 수립 △탈시설 권리 보장 등을 요구했다.
평소 발달장애에 관심 없던 사람들은 “뭔 요구를 이렇게 많이 하냐”고 하는데 사실 이 내용에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현재도 시행 중인 정책들이다. 다만 하등의 실효성 없이 시행되고 있기에 촘촘한 세부 정책과 예산 마련으로 실효성을 보장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중학생 딸이 주말에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가기로 했다며 용돈 좀 달라고 할 때 “보고 싶은 영화 재미있게 보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와”라고 하면서 3천원을 내밀면 어떻게 될까? 딸은 3천원으로 영화를 보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정작 부모는 “아, 나는 딸의 교우관계를 위해 적극 지원하는 좋은 부모야~”라며 혼자 흐뭇해한다면? 지금 발달장애 정책이 딱 그렇다는 뜻이다.
새 정부 출범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똑딱똑딱 시간이 없다. 그래서 머리를 밀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봐줄까 싶어 550여 명이 민머리가 됐다. 그러고는 서로의 까칠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부디 발달장애 정책 중에서도 더 절실한 우선순위를 갖는 지원체계 정책이 새 정부 국정과제에 포함되길 바랄 뿐이다. 삭발식을 전하는 이번 글을 쓰면서 무거운 분위기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애썼다. 부모들의 삭발식이 슬픈 장송곡으로 마무리되는 걸 원치 않아서다. 이날의 삭발식이 새로운 희망을 위한 오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윤석열 정부의 발달장애인 정책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류승연 작가·<배려의 말들> 저자
삭발한 김철곤 할아버지
비장애 형제자매, 조부모, 관련 업계 종사자 등 부모가 아닌 이들도 이날 기꺼이 삭발하는 것으로 힘을 보탰다. 먼저 외손주 민준이를 위해 나선 김철곤 할아버지(사진). 그는 “딸이 결혼해서 민준이를 안겨줬을 때 꼬물거리는 손가락과 입이 너무나 귀했는데 지금 민준이는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24살 자폐성장애인”이라며 “손자를 남기고 이생을 어찌 떠날 수 있을까. 죽어서도 계속 민준이 곁을 맴돌며 눈물지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엑스레이로 찍어보면 시꺼먼 색으로 나올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으며 조부모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친정 부모님과 시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개인적으로 가슴 아픈 삭발도 있었다. 한창 예쁘고 싶을 나이인 24살 누나가 남동생을 위해 삭발에 나선 것이다. 우리 딸도 10년 뒤 동생을 위해 삭발하겠다고 하면 나는 말려야 할까, 응원해야 할까. 부산에 사는 정연주. 그는 한 달에 한두 번 있는 회사 월차를 모두 발달장애인 동생을 위해 써야 하는 현실을 말하며 동생의 지역사회 자립을 위해 삭발을 결심했다고 한다. 부디 꽃 같은 그의 ‘정당한’ 청춘을 위해서라도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가 꼭 수립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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