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성범죄 판결 ‘다만’이 없어지도록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 피해자 관점 반영한 형법 개정 권고
오지원 변호사와 짚어본 권고안의 핵심… “가해자 관점으로 판단하는 법정, 피해자 의견 듣는 창구 만들어야”

제1396호
등록 : 2022-01-07 14:23 수정 : 2022-01-08 15:00

크게 작게

여성단체가 2021년 12월24일 19살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녹화 증거능력을 ‘위헌’으로 판단한 헌법재판소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2021년 12월 대전지법 형사12부(재판장 유석철)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위반(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20대 남성 ㄱ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ㄱ은 대낮에 미성년자를 화장실로 끌고 가 성폭력을 가했다. 재판부는 “한낮에 공개된 장소에서 쇼핑하던 피해자를 상대로 범행한 죄책이 매우 무겁다”면서도 “다만” 피고인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고,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으며, 피해자가 피고인과 합의한 점 등을 고려해 집행유예를 결정한다고 밝혔다. ㄱ씨는 1심 재판부에 75차례 반성문을 제출했다.

“다만”. 성범죄 판결 선고 결과가 알려질 때마다 이 두 글자에 분노하는 반응이 나온다. ㄱ씨 판결처럼, 재판부가 피고인의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다만” 피고인의 사회적·경제적 상황과 반성 여부, 범죄 전력 등을 고려해 선고 형량을 줄여주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정한 ‘양형기준’이 판결에 적용된 2019년 전체 성범죄 4824건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의 반성’과 같은 형량 감경 영역 안에서 형이 선고된 사건은 전체의 41.8%(2016건)인 반면, ‘미성년·장애인 등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와 같은 형량 가중 영역은 4.3%(207건)뿐이었다. 법정형보다 형이 감경되는 경우가 가중되는 경우에 견줘 10배가량 높은 셈이다. 피해자의 피해 정도나 회복 여부와 관계없이 재판부가 ‘가해자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판사 “피고인이 불리하면 안 된다” 생각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전문위)가 최근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전문위는 2022년 1월6일 법관이 형량을 정할 때 ‘피해자의 관점을 반영하라’는 내용을 담은 권고안을 발표했다. 형법 제51조 ‘양형의 조건’ 조항을 △피해자 연령 △피해의 결과 및 정도 △피해 회복 여부 △피고인 처벌 및 양형에 관한 피해자의 의견 등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라는 것이 권고안의 뼈대다. 또 ‘판결/결정 전 조사’ 등 성범죄 사건과 관련해 양형조사를 할 때도 피해자 관련 사항을 반영하도록 성폭력처벌법(제17조 판결 전 조사)을 개정하고, 피해자가 증인신문이 아니라도 양형에 관한 의견을 진술할 수 있도록 형사소송법(제294조 2항 피해자 등의 진술권)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함께 담았다.

전문위에서 이번 권고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맡았던 오지원 변호사(법률사무소 법과 치유)를 1월5일 인터뷰해, 권고안의 핵심과 의미를 짚어봤다.

“성범죄는 국민의 법 감정과 판사의 인식 사이에서 특히 괴리가 드러난다. 그동안 국회에서 법정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접근했지만, 실제 선고형이 올라가기는 힘들었다. (권고안의 핵심은) 지금처럼 피고인 (주장을) 중심으로 형량을 감경해주는 사례가 10배나 많아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심리제도 자체를 균형적으로 바꾸자는 취지다.” 판사 출신 오 변호사의 설명이다.

그는 양형과 관련해 논란이 발생하는 근본적 원인이 “판사들이 심리 과정에서 피해자를 만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할 경우, 재판부가 피해자 증인신문을 하겠다고 결정하지 않는 이상 법정에서 판사가 피해자를 직접 대면하기는 어렵다. 그러다보니 재판부는 피고인과 그의 변호인 주장만 계속 듣게 된다. 피해자 대부분은 자신의 재판이 언제 어떻게 진행되는지 제대로 통지조차 받지 못한다.

반면 형사법에는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이 존재한다. “형사법정에서 판사는 피고인만 쳐다보게 돼요. 자신의 판결로 인해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받을 때보다 (피고인이) 불리해지면 안 된다는 인식이 판사들에게 있는데, 이런 고민에서 피해자가 누락되는 거죠. 피고인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양형 심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고민이 (전문위에서) 있었어요.”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 전문위원 오지원 변호사. 사진 오지원 변호사 제공

법정형 상향돼도 선고형은 달라지지 않아
최근 관련법이 개정돼 성범죄 법정형이 상향됐지만, 선고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위는 성범죄 사건(2016~2020년, 1심 기준)의 집행유예 비율이 약 37%로 높고, 특히 디지털성범죄는 벌금형 위주의 선고 경향이 뚜렷한 점에 주목했다. 국회가 아무리 법정형을 상향해도, 판사가 기존 관행에 따라 형을 감경하다보니 실제 선고형은 법정형 하한선보다 낮게 나오는 것이다.

“법정에서 양형 가중 사유에 대해서는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지만, 감경 사유에 대해서는 피고인의 소명 정도만으로도 인정하고 있어요. ‘진지한 반성’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대표적인 감경 요소죠. 피해자 입장에선 자신한테 피고인이 사과한 것도 아닌데 반성문 제출을 이유로 형이 감경되면 황당하잖아요. 판사가 피해자의 의견을 함께 듣고 상황을 이해한 상태에서 판단하면 피해자도 이해할 수 있는 선고가 이뤄지지 않을까요?”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증인신문이 아니라도 피해자의 의견을 진술할 수 있도록 권고한 것도 재판부가 “피해자의 경험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권고안은 피고인이 자백한 경우에도 피해자가 진술할 권리를 보장하고 이를 양형에 반영할 것을 ‘의무조항’으로 규정했다. 피해자가 ‘증인’으로서 재판 진행의 보조적 역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피해 당사자’의 지위를 갖고 재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폭력처벌법 제17조(판결 전 조사) 개정 권고도, 양형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입장이 누락되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현재 보호관찰관이 실시하는 양형조사는 크게 △검사 또는 법원 결정 전 조사 △법원 판결 전 조사로 나뉘어 있다. ‘검사 또는 법원 결정 전 조사’에서 피의자 또는 피고인에 관한 사항은 ‘성장과정’ ‘향후 생활계획’과 같이 세부 항목으로 나뉘어 있지만, 피해자 관련 사항은 별도 기재란이 없다. ‘판결 전 조사’의 경우, 피해자 관련 항목은 있으나 그 비중이 매우 낮다. 전문위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와 고통, 현재 상태, 양형에 관한 입장 등을 자세히 진술할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68년 동안 그대로인 형법 제51조
형법 제51조는 1953년 형법이 시행된 이후 68년 동안 단 한 번도 개정된 바 없다. 오지원 변호사는 “근대 형법은 과거에 ‘마녀사냥’처럼 국가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재판을) 했던 점 등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어 피고인의 인권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수사 절차도 피해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혀내는 데만 역량이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행이 쌓이면서 “사회적 약자가 피해자인 사건, 성폭력범죄, 산업재해 사건 등에선 가해자 또는 강자가 양형의 이익을 본다는 비판이 제기돼왔고 사법 불신을 초래했다”고 덧붙였다.

전문위의 이번 권고안은 결국 형사법정의 기울어진 추를 바로 세운다는 데 의미가 있다. 형법 제51조가 개정되면 양형의 객관성과 형평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기본권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거라고 전문위는 기대한다. “형사재판의 공정과 균형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죠.”(오지원 변호사) 더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법정 밖을 헤매지 않도록, 사법의 역할을 다시 고민할 때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디지털성범죄, 실형 선고 10% 안 돼
법무부 전문위원회 형량 분석

248회에 걸쳐 다수의 피해자 하체를 몰래 촬영한 사건(의정부지법 고양지원 2021고단○○○), 16살 피해자에게 돈과 담배를 주고 성관계한 뒤 다시 피해자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부산지법 서부지원 2019고합○○○), 오픈채팅방을 통해 14살 피해자에게 돈을 주고 2차례 성관계한 사건(대구지법 김천지원 2020고합○○○). 세 사건 모두 가해자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최근 불법촬영 범죄 관련 법정형을 상향 조정(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하는 등 성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됐으나, 실제 판결 선고 형량에까지 반영되지는 않았다. 2022년 1월6일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가 발표한 권고안의 핵심은, 이런 법정형과 선고형의 간극을 줄일 수 있도록 형법의 양형조건을 바꾸고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권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전문위원회가 2016~2020년 디지털성범죄 선고 형량(1심 기준) 등을 분석한 결과,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전체 사건의 9.37%에 그쳤다. 절반이 넘는 사건(53.64%)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는 25.77%, 선고유예는 1.93%였다. 전문위는 “실형을 선고하는 비율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이나 여전히 낮고, 실형의 81.7%는 징역 10개월 이하”라고 밝혔다. 양형위원회가 2014∼2018년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한 혐의로만 기소된 사건의 형량을 분석한 결과 15명 중 3명(20%)만 실형을 받고, 12명(80%)이 집행유예였다. 그나마 실형을 받은 3건도 모두 법정형 하한선인 징역 5년을 작량감경(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 법관의 재량으로 형을 감경하는 것)한 2년6개월형이었다. 주로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 처벌 전력 없음, 사회적 유대가 양호한 점 등이 감경 요소로 반영됐다.

가해자가 가벼운 처벌을 받으면 피해자 구제는 더 어려워진다. 서울시가 2019년 실시한 ‘서울 여성의 디지털성범죄 피해 실태 및 인식조사’(서울에 거주하는 여성 3687명 대상) 결과,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의 66%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처벌의 불확실성’이 꼽혔다. 이런 점은 피해자들이 신고를 주저하게 하는 요소다. 고소 절차를 진행했다가 오히려 가해자로부터 보복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전문위는 “(낮은 양형은) 결국 성범죄가 ‘숨은 범죄’(암수범죄)가 되게 만들고 형벌의 예방적 효과를 반감시킨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현재의 양형 판단 시스템은 피해자보다는 피고인 쪽에 기울어져 있다. ‘형사 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재판 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헌법 제27조 5항)고 돼 있지만, 피해자는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할 때만 증인으로 출석한다. 이러한 진술권의 불균형은 양형에도 반영된다. 전문위는 “판사들이 (피해자 진술에 기반한) 양형 가중 사유에 대해서는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고 감경 사유에 대해선 피고인 쪽이 소명하는 정도만으로도 인정한다”고 짚었다. ‘감형 컨설턴트’ 같은 법률 시장이 생겨난 이유도 그래서다. 한 법무법인은 직접 7만5천여 명의 회원이 가입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가해자(피고인)의 양형 참작 사유로 제출할 심리상담을 연결해주거나 반성문, 탄원서 양식 등을 제공하기도 했다.(‘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시장화’ 비판과 ‘성폭력 정치’의 재구성에 관한 연구’, 김보화, 2021년)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