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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성은 평등의 다른 말

“차별을 가리는 것에 속아넘어가지 않길 바라며” 성본변경청구로 엄마 성 물려준 김지예·정민구씨가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21-11-20 09:05 수정 2021-11-23 00:54
2021년 11월9일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와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이 출생신고된 자녀의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꾸겠다며 낸 ‘성본변경청구’가 허가된 것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1년 11월9일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와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이 출생신고된 자녀의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꾸겠다며 낸 ‘성본변경청구’가 허가된 것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1년 11월9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여성인권위원회와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이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지예·정민구씨 부부가 아빠 성을 따라 출생신고된 자녀의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꾸겠다며 낸 ‘성본변경청구’에 대해 10월 서울가정법원이 허가 결정한 것을 알리고 환영하는 기자회견이었다. ‘엄마 성’을 물려준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김지예·정민구씨에게 부탁해 싣는다. _편집자

‘김’정원 보아라.

안녕. 지금은 2021년 11월이고, 우리는 너의 엄마 35살 김지예, 너의 아빠 42살 정민구야. 그리고 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1살 김정원이지. 우리는 너에게 이 편지를 늦어도 2041년에는 보여주자고 얘기했어. 20년이 지난 뒤에 이 편지를 보면서 오늘을 추억하자고 말이야.

2041년은 어떨까? 탄소중립, 탄소제로 세상이 되었을까?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지구가 조금은 천천히 뜨거워지고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아기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는 일이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일이 되면 좋겠다. 왜냐하면 지금 2021년에는 엄마 성을 물려주는 일이 꽤나 별일이어서, 너에게 엄마 성을 물려준 일만으로 무려 KBS 9시 뉴스에 출연했거든! 여러 언론사가 너에게 엄마 성을 물려줬다는 일을 앞다퉈(?) 알리기도 했어. 아마 넌 ‘그깟 거로 웬 유난이냐’고 할 거야. 그래 지금은 너에게 엄마 성을 물려준 일이 웬만한 유난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

세상에 부성이 우선한다는 게 법이라니

우리는 네가 생기기 전부터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궁리했어. 이런저런 웃기는 이름을 갖다붙이고는 낄낄거렸지. 엄마 김지예와 아빠 정민구 모두의 성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진지하게 네 이름을 고민하다 궁금해졌지. ‘왜 사람들은 아기에게 당연히 아빠 성을 붙이는 걸까?’ 하고 말이야. 그러면서 우리나라 법에 ‘부성우선주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 세상에 부성이 우선한다는 게 법이라니. 그걸 법으로 정할 수 있다니. 그동안 모성을 그토록 강조하며 엄마라면 이래야 한다 구구절절 읊어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부성이 우선한다는 거야. 너무 황당했지. 명백한 차별 조항이었고, 진작에 없어졌어야 하는 구시대적인 조항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결심했어. 너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기로.

너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는 일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어. 우리보다 먼저 엄마 성을 물려준 분들이 계셨고, 방법적으로 아예 막혀 있는 건 아니었거든. 다만 가장 손쉬운 방법이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엄마 아빠가 혼인신고를 하면서, 미리 네 존재를 계획하고 엄마 성을 물려줄 거라고 둘이 합의한 뒤 혼인신고서 해당란에 체크하는 거야. 별도로 합의서도 제출해야 하지. 당연히 아빠 성을 물려줄 때는 하지 않아도 돼. 다른 하나는, 아빠 성이 자동으로 붙은 너의 성을 엄마 성으로 바꿔달라고 재판해야 해. 받아들여질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엄마와 아빠는 결혼하고 7년 뒤에 너를 가졌으니, 당연히 혼인신고서에 미리 체크하지 못했어. 7년 뒤를 내다보지 못한 거지. 그래서 법원에 성본변경청구를 하게 된 거야.

성본변경청구는 대부분 재혼가정이나 한부모가정에서 신청한다고 해. 아빠 성을 물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니까, 혹여나 아빠와 성이 다르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억지로라도 맞추려는 거지. 아니면 아빠가 없어야만 엄마 성으로 바꿀 수 있는 거야. 우리는 너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는 게 우리 가족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지. 그리고 판사님은 그 말을 들어주셨어! 와우!

여전히 주변에서는 네 성이 아빠와 다르면, 너에게 아빠가 없거나 친아빠가 아니라고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걱정해. 그렇지만 정원아, 자녀의 성이 아빠와 다른 사람은 세상에 많을 거야. 각자의 사정에 따라 그들의 성이 아빠 성일 수도 엄마 성일 수도 있지. 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없을 수도, 너를 낳은 아빠가 아닐 수도 있는 거야. 그걸로 너를 평가해서는 안 되는 거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덧씌워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틀린 거지. 그러니까 이 편지를 쓰고 2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네가 아빠와 성이 다르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일러줄래? 우리 그 사람을 쫓아가서 지상 최대의 차가운 눈빛을 쏘아주자.

“가부장적 가족 질서에 저항하는 맥락…”

다음 문장은 무려 10명의 변호사님이 네 이름에 엄마 성을 물려주는 것에 뜻을 모아주고, 법률 지원을 해주면서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기똥차게 정리해주신 거야. 자녀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는 일이 틀린 게 아니라고, 잘하고 있다고 힘을 보태주는 사람도 많거든. 같이 읽어보자.

청구인들(엄마, 아빠)은 사건본인(정원)이 모의 성과 본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이름이 여성을 배제시킨 가부장적 가족 질서에 저항하는 맥락에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평등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봐도 정말 멋지다. 엄마는 네가 당연한 것에 의문을 먼저 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잘 보면 그렇지 않은 속임수 같은 것이 있거든. 누가 차별하고 누가 차별받는지, 왜 그게 가능한지 눈치채길 바라. 세상이 쉽게 보여주는 것, 그 너머를 보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써놓고 보니 너무 거창해서 취소하고 싶어지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되는 일은 아닐 거야. 엄마랑 아빠가 그렇게 살게. 너는 옆에서 지켜봐줘. 그리고 너도 동의가 된다면 우리 같이 그렇게 노력하며 살아보자.

정원아! 엄마와 아빠는 너에게 잘 어울리는 최고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진짜 노력했어. 김정원, 너만의 정원을 가꾸라는 뜻으로 지었고, 그 정원이 아름답게 가꿔지도록 우리도 열심히 도울게. 네 이름은 무조건 아빠 성을 따라야만 한다는 차별적 조항을 없애는 데 일조하고 있으니, 자랑스럽게 여기자! 지예와 민구의 정원 파이팅!!

망설인 진짜 이유를 깨닫고

덧> 앗… 아빠도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엄마가 마무리를 지어버렸네.

아빠> 정원아 안녕?! 엄마가 정말 조금의 시간을 주었구나. 그래도 괜찮아. 아빠가 하고 싶은 얘기를 엄마가 잘해줬거든.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원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기로 결심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 겉으로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얘기할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진짜 속마음은 달랐어. ‘엄마 성’에 대해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빠 걸 뺏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다른 아빠들은 다 자기 성을 물려주는데’ ‘그게 당연한 건데’ 이런 생각들 말이야. 이런 생각이 내가 망설인 진짜 이유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엄마 성을 써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어.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럽고 엄마한테 미안했거든. 정원아, 네가 김정원이든 정정원이든 성이 중요한 거 같지 않아. 아빠는 정원이가 자유롭고 평등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고 네가 사는 세상이 그러했으면 좋겠어. 그런 세상을 위해 우리 같이 노력해보자. 앞으로 너와 함께 살아갈 날이 가슴 뛰게 기다려지는구나. 엄마 아빠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김지예·정민구(김정원의 엄마와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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