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전남-섬과 바다 위에 문화시설을 수놓다

신안군, 1431억원 들여 전시공간 24곳 개관
마을 미술관에서 지붕 없는 미술관까지 각양각색
등록 2021-09-27 11:58 수정 2021-09-28 01:19
2021년 9월5일까지 전남 신안군 자은면 둔장마을미술관에서 열린 ‘신안만인보전. 신안군청 제공

2021년 9월5일까지 전남 신안군 자은면 둔장마을미술관에서 열린 ‘신안만인보전. 신안군청 제공

“마을 미술관에 이어 카페도 만들고 있당 깨요.”

저녁노을과 모래 해변이 유명한 전남 신안군 자은면 한운리 둔장마을. 이 마을 황경수(74) 이장은 2021년 9월12일 작은미술관을 연 지 열 달 만에 관람객 수백 명이 다녀갔다며 놀라워했다. 그는 “육지에서 45㎞나 떨어진 섬마을에 미술관을 만든 뒤 반응이 좋아 옆에 붙은 창고도 카페로 개조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손때가 묻은 공간이라 감회가 새롭다. 좁아도 이쁘게 고쳐놓으니 쓸 만하다”고 웃었다.

그는 이번 추석에 서울 사는 손주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초등학교 5·6학년인 손주들에게 미술관부터 구석구석 구경시켜줄 생각이다.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다들 마음이 어슷비슷했다.

새마을운동 때 울력으로 지은 마을회관

애초 이곳은 1971년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 울력으로 지은 마을회관이었다. 주민들은 당시 정부에서 지원한 시멘트로 블록을 찍고, 인근 소나무를 베어 서까래로 삼는 등 함께 땀을 흘렸다. 마을 한복판에 건물을 짓고는 성대한 잔치를 연 뒤 이곳에서 마을 대소사를 결정하고 이웃 경조사를 의논했다. 건물 앞쪽에는 그때 새겨넣었던 ‘근면·자조·협동’의 녹색 상징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앞다퉈 도시로 떠나갔고 건물은 서서히 낡아 방치됐다. 주민들의 애틋한 마음을 알아차린 신안문화원이 역사성과 장소성을 살린 아이디어를 냈다. 주민 동의를 얻어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마을회관을 작은미술관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위원회의 공모에 선정돼 벽체와 목재를 뺀 모든 것을 바꾸는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반년간 공사 끝에 이 건물은 어엿한 군립 둔장마을미술관으로 거듭나 주민 품으로 돌아왔다.

군은 미술관 관리는 주민한테 맡기고 기획과 운영을 도왔다. 개관 전시인 ‘둔장마을 사람들전’은 화가 안혜경·홍경미씨가 한 달 동안 이 마을에 머물면서 작품을 제작하는 등 세심하게 준비했다. 화가들은 밭머리에서 주민의 인생 여정을 듣고 인물화 32점과 ‘파밭 풍경’ ‘마을회관’ 등 작품을 제작해 내걸었다. 주민들은 “그림 속의 나가 참 좋아. 겪어보니 미술관이 별거 아니더구먼. 맨날 밭에서 일하다 미술관에 가서 놀고, 또 일하러 나가고 한당깨”라고 반겼다. 살가움을 느낀 작가들은 작품을 모두 기증하며 보답했다.

화가 안씨는 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사진이나 사연만 전해 받아 그렸다면 그림에 생명도 감동도 없었을 뻔했다”며 “한 분 한 분의 시간이 모여 역사가 된다고 느꼈고, 그래서 내친김에 자은 100명, 신안 1천 명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이후 ‘자은 3인 3색전’ ‘자은 풍경사진전’ ‘신안 만인보전’ ‘둔장의 무지개전’ 등을 이어가며 주민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주민들도 전시가 바뀔 때마다 “시방 뭔 볼거리가 있으까이”라며 스스럼없이 마실을 나오곤 한다.

2021년 새롭게 단장해 개관한 둔장마을미술관. 신안군청 제공

2021년 새롭게 단장해 개관한 둔장마을미술관. 신안군청 제공

“그림 속 내가 좋아 여기서 논다”

주민이 50명뿐인 작은 마을에 미술관이 열린 것은 전남 신안군의 ‘1도(島) 1뮤지엄’ 정책 덕분이다. 군은 섬마다 크고 작은 문화공간을 모자이크처럼 설치하는 아트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섬 주민들한테는 문화적 자긍심을 높여주고 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뜻에서 출발했다. 이를 통해 지역마다 생활밀착형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외부인들이 천양 천색의 섬들을 다양하게 체험하도록 하겠다는 바람도 담았다.

이를 위해 군은 2018~2025년 1431억원을 들여 신안 전역에 전시관·미술관·박물관·기념관 등 24곳을 개관한다는 야심 찬 청사진을 내놨다. 이미 12곳은 문을 열었고 앞으로 12곳을 조성할 예정이다. 군은 문화 복지와 교육 기회를 늘리지 않으면 소멸 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입안을 서둘렀다. 분석해봤더니 이 프로젝트로 생산유발 2605억원, 부가가치 1102억원, 취업 확충 3386명 등 경제효과가 있으리라는 예상이 나왔다. 설진준 군 문화예술팀장은 “신안 전역을 지붕 없는 야외 미술관으로 만들려 한다”며 “주민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사회기반사업이자 아트프로젝트”라고 소개했다.

전시공간은 규모와 방식을 달리해 다양하게 배치한다. 둔장마을미술관처럼 30평(99㎡)짜리 소박한 시설부터 면적 3천 평(1만㎡)에 이르는 신의 한국춘란박물관과 저수지 수면 위에 띄우는 안좌 김환기플로팅미술관 등이 저마다의 특성을 자랑한다. 자은 뮤지엄파크나 하의 천사상공원 등은 섬 전체를 아예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포함됐다.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전시공간도 여럿 등장했다. 2015년 개관한 암태 에로스서각박물관은 천사대교 개통 뒤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한 해 40만 명이 찾아오는 명소로 발돋움했다. 해넘이 풍경이 압권인 압해 1004분재공원의 저녁노을미술관은 해마다 10만여 명이 방문하고, 슬로시티로 지정된 증도의 갯벌전시관은 연간 4만여 명이 생태체험을 하려고 줄을 잇는다.

전시 주제는 전문가·지역민이 함께 논의

군은 특히 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전시 주제를 선정할 때는 전문가와 지역민으로 자문단을 꾸려 의견을 들었다. 성공 사례인 제주도·연홍도, 일본 나오시마·이누지마 등 예술 섬의 본보기도 살폈다. 주변 환경을 고려해 새로 설계한 건물을 신축할지, 방치된 학교나 창고를 재활용할지도 결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갯벌·노을·화석·수석 등 자연 △홍어·고둥·철새·춘란 등 생물 △한선·서각·자수 등 기예 △김대중·정약전·홍성담·이세돌 등 인물 △토지탈환 항쟁, 해저보물선 인양 등 역사로 주제가 압축됐다. 이승미 군 예술감독은 “전시공간은 이웃과 이웃, 주민과 작가, 마을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라며 “전시뿐 아니라 사랑방, 배움터, 창작소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하며 새로운 문화공동체의 미래를 열어보려 한다”고 말했다.

이런 정책실험을 이끈 박우량 신안군수는 2021년 5월 한국박물관협회의 ‘자랑스러운 박물관인’ 시상식에서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전 정책들이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외부로 향해 있었다면 ‘1도 1뮤지엄’은 주민의 문화 복지를 최우선으로 설계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며 “섬들이 저마다 고유함과 호젓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문화예술을 일상에서 충분하게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겠다”고 밝혔다.

신안=안관옥 <한겨레> 기자 okah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