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
2020년 2월 김용민(30)씨는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누리집에 뜬 세 글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20여 일 전,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인 용민은 배우자인 소성욱(29)씨를 피부양자로 등록하겠다고 신고했다. 그 결과를 조회해보니 성욱이 피부양자로 등록된 것이다. 피부양자 자격 확인서에 뜬 성욱의 이름 옆에 ‘배우자’라는 세 글자가 선명했다. 건보 직장가입자의 배우자·직계존속·직계비속 및 그 배우자, 형제자매는 소득과 재산이 일정 기준 이하인 경우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사실혼 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부는 피부양자 등록이 ‘안 되겠지’ ‘어렵겠지’ 지레짐작했다. 그와 성욱 모두 남성인 동성 부부이기 때문이다.
부부로 인정받았다는 행복감
“어안이 벙벙했어요. 사실 신청할 때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했거든요. 그런데 피부양자로 등록된 것도 모자라 성욱이 배우자라고 뜨니까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던 거예요. 저희는 커밍아웃해서 주변 지인들은 저희가 부부라는 걸 다 알아요. 신혼집 집들이를 수도 없이 했어요. 그런데 법적으로는 그 관계를 인정받지 못하니까요. 공공기관이 가족이고 배우자라는데 그 행복감을 말로 설명할 수 없죠.”(용민)
용민은 성욱에게 ‘배우자’ 글자가 뜬 컴퓨터 화면을 곧바로 갈무리해 보내줬다. 휴대전화 화면을 확대해 본 성욱은 울컥했다.
이들이 처음 만난 건 2012년 겨울. 사회복무요원으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다 시나브로 사랑에 빠졌고 이듬해 여름 연인으로 발전했다. 2016년 지병이 있는 성욱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을 때다. 마실 물이 다 떨어졌는데도, 물을 사러 집 밖에 한 발짝도 걸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서울 노원구에 살던 용민은 경기도 오산에 살던 성욱의 집으로 매일같이 출퇴근했다. 지하철로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용민은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성욱의 집으로 가서 그를 돌본 뒤 다음날 새벽 학교로 향하는 일을 6개월여간 반복했다. 성욱이 아프기 시작할 때가 여름이었는데, 창밖을 보니 눈이 오고 있었다.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함께 살 집을 구했고, 2017년 동거를 시작했다. 결혼하자고 노래 부른 건 용민이었지만 프러포즈는 성욱이 선수를 쳤다. “어릴 때부터 ‘특별하고 재밌는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어요. 성소수자로 정체화하고 나서는 그저 평범한 결혼식을 꿈꾸는 게 특별한 일이 돼버렸어요.”(용민)
결혼식은 이성 커플이란 통념이 가장 충실하게 실현되는 의례. 반지를 맞추고 식장을 빌리는 것까지 모두 겹겹의 난관처럼 느꼈다. 그러나 걱정은 걱정에 그쳤다. 청첩장 인쇄 업체는 둘의 사진이 나란히 인쇄된 청첩장과 짧은 손편지를 건넸다. ‘축하합니다. 응원합니다.’ 결혼식장 대관 담당 직원은 신랑 신부로 구분된 대관계약서의 서명란을 보란 듯이 볼펜으로 직직 그었다. “이런 구분은 필요 없죠.” 동성 커플의 결혼 소식이 알려져 결혼식장이 손해 볼까 걱정된다 했더니, 그는 “사회가 많이 바뀌어서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시도조차 하지 못한 혼인신고
2019년 5월, 너무나도 평범해서 특별한 결혼식에 성욱은 올리브색, 용민은 로즈핑크색 정장을 입고 나란히 입장했다. 그렇게 이들은 1년차 부부가 됐다. 그러나 이런 사회 분위기와 달리 제도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혼인신고는 시도조차 안 했다. 2020년 3월 월세살이를 접고 전세로 신혼집을 구하려 했지만,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제도 지원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사를 마치고 전입신고 할 때 용민은 성욱을 배우자로 신고해봤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력 오류라고 생각했는지, 이렇다 할 거절 절차도 없이 주민등록등본에 용민은 ‘세대주’, 성욱은 ‘동거인’으로 정리됐다.
그래서 이들은 언젠가 닥칠지 모를 ‘좋지 않을 상황’이 늘 불안하다. 지병이 있는 성욱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2016년 성욱이 아파서 쓰러졌을 때, 용민이 대신 약을 처방받을 수 없는지 병원에 전화로 물었다. 성욱이 10년 넘게 치료받은 병원이었고, 환자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의사였지만, ‘법적으로 가족이 아닌’ 용민에게 처방전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 결혼식을 올린 뒤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혼 배우자는 피부양자 등록 가능
건보 가입자는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나뉜다. 2016년부터 시민단체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일하며 한 달 177만원을 버는 용민은 직장가입자, 성욱은 직장이 따로 없어 지역가입자로 건보료를 각각 내왔다. 성욱은 소득이 없어 직장가입자 피부양자 등록을 위한 소득 기준을 충족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이성 커플이었다면 성욱이 용민의 피부양자로 등록돼, 한 달 건보료인 약 1만5천원을 내지 않아도 된다. 이들은 2월10일 건보공단 누리집에 민원을 올렸다.
“저희는 동성 부부라 한국에서는 아직 혼인신고를 못하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동거하고 있고 2019년 결혼식을 올린 사실혼 관계에 있습니다. 저희도 다른 이성 부부들과 똑같이 피부양자 자격 취득 신고를 할 수 있는지요. 가능 여부와 가능하다면 피부양자 자격 취득 신고 절차를 알려주세요.”
2월11일 답변이 달렸다.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도 고객님의 피부양자로 취득 가능하니 다음과 같이 서류를 제출하셔서 피부양자 취득 신고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용민과 성욱은 피부양자 취득신청서, 이들의 관계를 입증할 인우보증서와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제출했다. 그리고 2월26일 피부양자 자격을 취득했다. 서로가 ‘배우자’이자 ‘가족’이라고 뜬 건보공단 누리집 화면을 갈무리해 주변인들에게 자랑 삼아 전송했다.
“우리가 가족임을 이 서류가 인정해주는 거죠. 가족이고 부부라고 뜨는 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겠지만, 저희는 말도 못하게 기쁜 일이고 엄청난 사건이에요.”
“처분 취소된다면 소송으로 다퉈보겠다”
건보에서 동성 커플을 피부양자로 등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혼인신고처럼 ‘안 되겠지’ 생각하며 지레 포기했던 다른 동성 커플들이 눈을 반짝였다.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가 2019년 한국에 사는 동거 동성 커플 366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4명 중 1명(25.7%)은 본인 또는 파트너가 직장가입자이지만 상대방이 지역가입자로 건보료를 별도로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39.4%는 지역가입자인 사람이 직장가입자로부터 경제적 부양을 받고 있음에도 피부양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건보공단 쪽 처분은 단순 실수일 가능성이 크다. 직장가입자의 배우자가 이성이고 일정한 소득·재산 기준을 충족하면 법률혼이든 사실혼이든 피부양자로 인정되지만, 동성이면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있다고 해도 그 파트너를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헌법이나 민법, 가족관계등록법에 규정된 혼인은 ‘남녀 간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용민·성욱의 사연이 알려지면 건보공단 처분은 취소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용민·성욱은 행정소송을 내어 그 정당성을 다퉈보겠다고 했다. “피부양자 등록이 가능한데도 안 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제도도 가능하다고 알리고 싶어요.”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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