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양의무자, 수급권자, 생계급여. 나라가 만들어낸 가난을 둘러싼 언어다. 누군가는 평생 한 번도 듣지 않을 말이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과 공무원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해당하지 않는다면, 봐도 잘 모르고 관심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저 말들 사이에는 삶이 있고 저 말 때문에 생존이 오간다.
“‘부양의무자’의 수입이 늘면 ‘수급권자’의 ‘생계급여’가 줄어든다.” 이 명제 속에 딸과 엄마가 있다. 딸은 대학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45만원 남짓 벌었다. 소득이 신고됐고, 나라에서 엄마에게 주는 생계비가 4만8천원 깎였다. 딸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면 엄마의 생계비는 준다. 모녀에게 깊은 교훈을 새긴 ‘4만8천원’의 경험은 일상을 규제한다. 정인숙씨를 만난 날은 딸의 대학 졸업식 전날이었다. 딸은 3차 병원(상급종합병원) 취업에 성공한 예비 간호사지만, 엄마는 딸의 대견한 성취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딸한테 곧 ‘수입’이 생기기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딸이 나를 부양해야 하면 살고 싶지 않다”</font></font>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 정인숙씨는 관할 지방자치단체 사회복지과에 다녀왔다. 딸에게 짐이 되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취업자녀규정특례’ 제도가 있었다. 만 34살 이하의 결혼하지 않은 자녀는 수입이 있어도 엄격한 부양의무자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다만 월급이 295만원을 넘으면 기준이 똑같이 적용된다. 딸이 3차 병원에 취업하면 월급이 295만원을 넘길 수도 있다. 정인숙씨가 수급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딸이 가정의 생계비는 물론이고 몇천만원 하는 엄마의 화상 수술비도 감당해야 할 판이다.
엄마를 짊어지느라 딸이 취업-승진-결혼-출산-재산 축적 등 “다른 일반인처럼” 살지 못할까봐 두렵다. 수급권 박탈의 불안을 토로하며 그는 말했다. “딸이 전적으로 나의 부양을 책임져야 한다면 살고 싶지 않아요.” 딸의 미래와 나의 현재가 대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딸은 딸대로 살아가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딸이 취업을 앞둔 요즘 온종일 벗어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 정인숙씨가 내게 먼저 물었다.
“외로웠겠어요. 다 혼자 해야 하잖아요.”
부양의무자, 수급권자, 생계급여. 이 말들 사이를 홀로 헤매던 시간을 묻는 말이었다. 내가 스무 살 때 아버지가 쓰러졌다. 난데없이 아버지의 보호자로 불려다녔고, 불어나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휘청거렸다. 아버지는 결국 일을 나가지 못했고, 또다시 쓰러졌다. 알코올성 치매가 시작됐다. 내가 잠시 방심한 사이 아버지는 발등에 화상을 입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늘 압도됐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다시 살아보겠다고 찾아간 주민센터와 구청에서는 낯선 말들이 밀려들었다. 생존을 위해 ‘내가 알아먹어야 하는’ 말이었다. 그 말들을 이해하고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복지라는 걸 찾아나서야 했다. 찾아서 아는 만큼 신청해볼 수 있었지만, 신청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었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모멸감을 버티고, 신청 후 심사를 기다리는 초조함을 견뎌야 한다. 여기저기서 “복지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라고 말하지만, 그 당연한 권리를 받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감정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복지는 결과가 중요하다.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억울하다. 다행과 억울 말고 다른 감정은 사족이다. 내가 꾹꾹 담아두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감정에 그가 이름을 붙여주었다. 외로움. 권리를 찾아다니는 외로움이었다.
[%%IMAGE2%%]<font size="4"><font color="#008ABD">이혼하니 생계가 해결됐다</font></font>2007년 세를 얻어 운영하던 식당에 폭발사고가 났다. 병원에선 입원할 때 1천만원의 보증금을 요구했다. 정인숙씨의 아버지가 돈을 구해 왔고, 그제야 치료가 시작됐다. 옴짝달싹 못하는 그의 곁을 살피기 위한 간병비는 하루 7만5천원씩 꼬박꼬박 더해졌다. 한 번에 1200만~1500만원 넘는 수술도 여러 차례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한 그가 수술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방송에 나가는 것뿐이었다. …. 방송에 나갈 때마다 한 번씩 수술할 수 있었다.
“남편분이랑 이혼하셔야 혜택을 받을 수 있어요.” 몇 차례 반복된 수술 뒤 사회복지사가 권했다. 사고 이후 6개월간 남편은 화재 현장을 보상했고 전셋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몇 년을 함께 공들여 세운 살림살이가 한순간에 주저앉았다. 기초생활보장을 신청하려니 남편의 수입이 문제였다. 어차피 얼마 안 되는 수입이어서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미 부부의 몸과 마음도 멀어져 있었다. 이혼하고 ‘어찌 살까’ 싶었지만 막상 이혼하니 ‘잘됐다’ 싶었다. 장애연금과 생계급여로 오히려 최소한의 생계비용이 해결됐다. 살림을 웃돌던 막대한 병원비는 의료급여로 충당했다. 이혼 후 얻어진 결과에 만족하지만, 만약 이혼하지 않아도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만약에,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수급자 신청이 가능했다면? 만약에, 가족에게 모든 걸 전가하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없었다면? 그와 남편의 몸과 마음이 멀어진 이유 중 경제적 부담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부양의무자 기준 없이 개인으로 수급이 가능했다면 이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퇴원 후 한동안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피부를 재생하고 복원하는 수술이 남아 있었지만, 6~7년을 수술하지 않고 방 안에서만 보냈다. 그 기간 그를 계속 “귀찮게” 하는 복지기관 사람들이 있었다. 뻔히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기어코 문을 두드리고 기다렸다.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고향 친구들도 있었다. 먼저 팔 걷어붙이고 도와준 친구는 다치고 아플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그 느낌을 알고 있었다. 과거 친구의 남편이 산업재해를 겪었기 때문이다. 정인숙씨는 사고를 겪은 뒤 남편과 이혼하고 형제와 멀어졌지만 그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다가온 이들 덕에 그는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일할 수도, 일을 해서도 안 되는 처지</font></font>지난날 자신에게 다가와준 사람들처럼, 이제 정인숙씨도 현재진행형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선다. 병원에서 진행하는 화상 경험자 모임의 멘토를 맡았다. 최근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도 땄다. 살기 위해서 알아본 복지 정보지만, 그 앎을 발판 삼아 새로운 직업을 꿈꾸게 됐다. 화상 경험이 있는 동료들이 세운 사회적기업이자 카페 ‘화담’의 창립 멤버로도 참여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과 혼란을 자신만 겪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 고통을 아는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해 여전히 해볼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이런 생각과 경험과 자격(증)에도 불구하고 아직 ‘취업’은 요원하다. 화상으로 인해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손 때문에 업무 능력을 의심받는다. 화상 흔적이 남은 그의 얼굴을 사람들이 불편해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더욱이 기초생활수급대상자라는 이유로 사회적기업 화담 활동은 초기 창립 활동 외에는 더는 관여할 수 없다. 일종의 ‘창업’이기 때문이다. 사업자로 이름이 올라가는 순간, 수입이 발생하면 기초생활수급이 중단될 수 있다. 국가가 시민에게 독려하는 ‘취·창업’이 그에게는 독려되지 않는다.
3년마다 한 번씩 국민연금공단에서 나온 직원들이 정인숙씨를 지켜본다. 그는 단추를 잠글 수 없고 동전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그들은 더 나아진 게 없는 일상생활을 확인하고 장애인활동지원 시간을 평가한다. 몇 해 전 갑자기 한 달 198시간이 94시간으로 줄었다. 다급한 마음에 결과를 통보한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딸이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성인이니까 그런 거 같아요.” 주민센터도 어떤 기준으로 평가됐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대신 “딸이 성인이라 엄마를 돌볼 수 있지 않으냐”는 말을 들었다. 석연치 않았다. 다니던 장애인생활자립센터에도 문의했다. 센터에서는 자녀가 성인이 됐다고 활동지원 시간을 줄이는 선례가 없다고 했다.
정인숙씨는 어떤 명확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딸의 딸’이 돼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막 스무 살이 된 딸에게 주어진 건 1인분의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2인분을 책임질 의무였다. 줄어든 나머지 절반의 활동지원을 대신하던 딸은 이제 경제적인 책임까지 짊어질지 모른다. 내가 아버지를 돌본 지난 10년이 정인숙씨 딸에게 반복될 수 있는 상황이다.
“같이 안 사시지만, 따님도 부양의무자여서 아드님과 따님 수입이 합산됩니다.” 주민센터 사회복지공무원이 내게 한 말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산 나뿐 아니라,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오래전 아버지와 관계가 끊긴 여동생도 아버지의 부양의무자였다. 기초생활보장은 “여기 권리가 있어요”라고 외치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이 더해지면 “사실 의무만 있어요”라고 말하는 격이다. 차라리 ‘수급권’이라는 희망을 만들어놓지나 말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의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나마 작은 구원이라도 받으려면, 가족 모두가 가난하고 능력이 없어지고 불행해지는 수밖에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시민 절반은 ‘부모 부양은 사회 몫’이라는데 </font></font>내가 10년간 걸어온 가난의 경로를 정인숙씨의 딸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단순히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현상으로만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왜 권리의 주체는 한 개인이 되지 못하는가? 제도는 한 개인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가족을 부양의무자나 보호자로 호출한다. 노인복지법, 아동복지법, 장애인복지법은 여전히 보호자 규정에 부모, 배우자, 친권자, 부양의무자가 먼저 나오고, 의료 현장에서도 혈연이나 부부가 아니라면 입원과 수술을 동의해줄 보호자가 될 수 없다.
이는 제도를 벗어나 한국의 일상적인 풍경에서도 맴도는 질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존중할 때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노동자의 권리는 ‘귀한 집 자식’ ‘누군가의 부모’라고 말할 때 가장 빠르게 인식된다. 눈앞의 한 개인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상상할 때 비로소 ‘사람’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가 개인에게 구성원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한국 사회와 제도 안에서 ‘가족’이 없다면 투명 인간이나 다를 바 없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2조 제5호는 많은 사람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조항은 ‘부양의무자’를 규정한다. 부양의무자는 “수급권자를 부양할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수급권자의 1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다. 그러니까 우리는 1촌 직계혈족이나 배우자가 빈곤해지면 경제적인 책임을 제일 먼저 짊어진다. 하지만 많은 이가 한 개인의 빈곤이 가족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찬성하는 비율은 55.5%다. 부모 부양에 대한 의식도 약화됐다.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김유경의 ‘사회 변화에 따른 가족 부양 환경과 정책 과제’를 보면 1998년 부모 부양을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는 비율이 2%에 그쳤지만, 2016년에는 50.6%로 상승했다. 정부는 여전히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라고 강조한다.
올해 정부는 2021~2023년 제2차 기초생활보장 3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단계적으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가 가능한 안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변수가 있다. 정부는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목표로 하지만, 의료급여는 재정 여건을 이유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미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노인·장애인 빈곤층 대부분은 건강과 의료비 문제가 생계만큼이나 절박하다. 의료급여를 뺀 채 생계급여만 개선하는 것은 ‘부양의무제 폐지 공약 실천’ 생색내기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부양의무자 기준’이 상상하는 가족은 가족애와 튼튼한 경제로 이뤄진 생활공동체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생활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는 가족 형태는 3대가 모여 사는 전통가족이나 중산층 핵가족이다. 하지만 1인 가구가 계속 증가하고, 출생률은 바닥을 치며, 가족 간의 유대와 부양 의식도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는 단순히 빈곤을 구제하는 것 이상이다. 한국의 근대화를 견인했던 가족 중심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다. 가족 내 생산과 분배, 남성 가장 중심의 소득 보장, 가족 중심의 복지 제도 등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당장 ‘가족 이후’를 논의해야 한다. 정인숙씨와 나는 이런 발판 위에 서 있다.
“안 죽고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얼마 전 딸이 정인숙씨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딸의 마음이 얼마나 갈지 의문이다. 이 나라가 당연한 도리라고 정해놓은 부양의무를 딸이 전담하게 되면, 고마움의 유대는 끊어질지 모른다.
나는 아버지를 돌본 10년의 시간을 돌아본다. 어째서 아버지의 존엄을 유지하는 유일한 장치가 나 하나뿐일까. 왜 국가는 한 사람이 권리를 존중받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걸 부정하고 가족에게 강제로 의존하게 하며 굴욕을 맛보게 할까. 나의 아버지가 아들의 아들이 되었듯, 정인숙씨도 언제 딸의 딸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런 상황을 초래하는 최전선에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있다. 이 냉혹한 기준은 이미 여러 삶을 짐으로 만들었고, 더 나은 삶을 포기하게 했으며, 일가족이 집단으로 죽음을 선택하길 부추겼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부양의무국’의 기준은</font></font>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부양의무자 기준이 아니라 ‘부양의무국 기준’이다. 개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기준에 미달하는 국가라면 탈락되는 게 마땅하다. 개인이 아닌 국가가 ‘탈락의 위기’를 불안해해야 한다.
조기현 작가 ruaendrlg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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