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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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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청년 지역활동가의 제안, ‘평등한 지역운동을 위한 약속문’
등록 2020-02-16 00:16 수정 2020-05-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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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소멸’을 말하는 이 시대에 지역에서 문화 기획, 창업, 사회운동 등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하는 이들이 있다. 2020년 연중기획 ‘지역에서 변화를 꿈꾸는 청년들’은 이들이 만드는 공동체의 의미, 그리고 ‘같이’의 가치에 주목했다. 연중기획 두 번째는 더 평등하고, 더 나은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곱 항목이 담긴 경기·수원 지역의 ‘평등한 지역운동을 위한 약속문’을 제안한 세 청년 활동가를 소개한다.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지역을 바꾸고 싶어 시민단체에 들어온 그들은 좀더 나은 지역사회 커뮤니티를 위해 “우리부터 바꾸자”고 했다. 안팎에서 변화를 일구는 이들의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2월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시민단체 다산인권센터. 화성행궁 주변에 개성 있는 공방,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면서 ‘행리단길’이라는 지명으로 알려진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자 다산인권센터가 보였다. 이곳에 사월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세진 수원여성회 활동가, 푸우씨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가가 모였다. 사월, 세진, 푸우씨를 포함한 젊은 활동가 7~10명은 2019년 11월15일 발표회를 열고 경기·수원 지역의 ‘평등한 지역운동을 위한 약속문’을 제안했다. 지역 시민단체에 뿌리내린 세 청년 활동가에게 ‘평등한 지역운동’의 가치를 물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평등한 지역운동의 가치</font></font>

세 활동가는 저마다 다른 시민단체에서 일했다. 사월은 다산인권센터, 세진은 수원여성회, 푸우씨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세 활동가의 공통점은 ‘지역’이었다.

사월은 고등학생 때 부모님 권유로 매일 신문 사설을 읽었다. 공부가 재미없어질 즈음 2008년 ‘광우병 사태’가 터졌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갔다. 하지만 언론마다 제각각 논조가 달랐다. 뭐가 진실인지 궁금했다. 친구들은 입시에만 관심이 있었다. 사월은 무작정 광장으로 갔다. 첫 사회운동을 계기로 다양한 이슈를 다루는 지역 시민단체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16년 자신이 사는 지역의 시민단체에 첫발을 내디딘 사월은 이주민 등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해소하는 인권활동을 펼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활동도 함께한다.

사월과 같은 해 수원여성회에 들어온 세진은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지역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동네 사람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던 지역 시민단체의 문을 두드린 세진은 지역사회에서 활동할 새로운 성평등 교육 강사를 육성하고 학교·기업·공공기관에서 성평등 교육도 한다.

푸우씨는 두 사람처럼 처음부터 지역 시민단체에서 일하지는 않았다. 한때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푸우씨는 2009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가로 자신이 사는 경기 지역으로 옮겼다. 지역 노동자들이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사업장을 돌며 안전보건 교육과 위험성 조사 등을 하고 있다. “지역을 잘 알아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도 꿈꿀 수 있더라고요. 지역 시민단체의 존재 이유였죠. 지역은 변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단위였어요.”(푸우씨)

세 활동가처럼 최근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지역을 바꾸기 위해 지역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청년이 늘고 있다. 하지만 지역 단체의 한계를 느끼고 떠나는 청년도 많다. 지역 단체는 서울보다 상시 활동가 수가 적고 회원 규모도 작다. 젊은 활동가도 상대적으로 적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사회운동으로 넘어오는 경우보다 조금 덜 벌더라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지역 시민단체에 오는 청년이 늘었어요. 하지만 자신이 비판했던 기성 조직처럼, 젠더·평등 감수성이 떨어지는 일부 지역 단체를 보고 실망한 청년도 많았죠.”(푸우씨)

행정안전부에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 현황을 살펴보면 2018년 기준 1만4275개에 이른다. 중앙행정기관에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를 제외하면 경기(2262개), 서울(2145개), 전북(940개), 부산(835개), 경북(782개) 등의 순으로 경기 지역이 서울보다 많다. 하지만 이 중 얼마나 많은 단체가 실제로 활동하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지역 단체들이 모인 회의나 행사 등을 가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연령층도 비슷해요. 서울 단체들은 상시 활동가 수도 10명 가까이 되는데 지역은 4명이면 많은 편이에요. 단 한 명뿐인 단체도 있어요. 그래서 연대의 가치가 중요하죠. 어떤 이슈를 알리려면 여러 단체가 힘을 모아 서로를 도와야 하니까요.”(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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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4"><font color="#008ABD">바꾸려는 자, 그들부터 바뀌어야</font></font>

경기 지역 젊은 활동가들의 고민은 2016년 촛불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촛불 이후 지역 단체가 가져가야 할 것은?’이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 참석한 활동가들은 촛불 이후 어떤 고민을 하고 지역운동을 해야 할지 의견을 냈다. 공통된 열쇳말은 ‘연대’와 ‘만남’이었다. 이후 활동 기간 5년 이하의 젊은 활동가들이 만나는 모임을 꾸렸고 2018년 ‘만남, 상상, 연대!’를 주제로 한 지역운동포럼을 열었다. 가깝지만 만나기 힘들었던 활동가들은 함께할 수 있는 지역운동을 고민했고 평등한 조직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눴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성평등 관점에서 지역운동도 다시 돌아봤다. 세진은 말했다. “아무리 진보 성향을 가졌다고 해도 성인지 감수성 이해는 저마다 달랐어요. 평등한 지역운동에 대한 합의와 개념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평등한 지역운동을 위한 약속문’에 담길 항목은 일곱 가지로 좁혀졌다. 젊은 활동가들이 연대 활동을 하며 느낀 차별이었다. 사월은 성소수자로 커밍아웃했다. 지역 단체에서 성소수자로 커밍아웃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여러 단체와 회의나 행사, 뒤풀이를 하다보면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처럼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사월이 대답하기 곤란한 말과 행동이 많았다. 하지만 지역 단체나 개인 차원에서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은 거의 없었다.

“지역 단체에는 앞으로 더 다양한 청년이 올 거예요. 그 전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청년들이 차별과 혐오의 말을 듣지 않게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볼 계기가 필요했죠.”(사월)

약속문을 함께 만든 7~10명의 젊은 활동가들은 나이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초면에 동의 없이 반말하지 않도록 한다는 항목에 공감했다. 회의나 행사 등 공적인 자리에서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하지만 나이, 지위, 성별 등으로 위계와 권위의 문제가 생겼다. 반말은 때로 친밀감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초면에 반말을 들은 젊은 활동가들은 자신을 동등한 활동가로 존중해주지 않는다고 받아들였다. 연예와 결혼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항목도 여러 활동가에게 지지를 받았다. 일곱 항목 하나하나가 정상성 규범을 넘어서는 작업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화는 외모 지적보다 취향 공감으로</font></font>

연대 활동을 하다보면 외모에 대한 지적이나 조롱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흰머리가 왜 이렇게 많냐. 염색 좀 해야겠네” 등 외모 평가도 잦았다. 지역에서 열린 강연이나 모임에서 누군가를 소개할 때 “잘생긴·예쁜 활동가” “연예인 ○○○을 닮은 활동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흰머리가 좋은 사람도, 싫은 사람도,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잖아요. ‘흰머리가 왜 이렇게 많냐’는 말은 나이듦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닐까요. 우리가 어디까지 조심해야 할지 함께 정해보자고 했죠.”(세진)

항목별로 구체적인 예시를 들면서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었다. 외모에 대한 지적과 조롱을 하지 않는 것엔 다들 공감했지만 “예쁘다” “날씬하다” 등 외모 칭찬에는 찬반이 갈렸다. 활동가들은 토론을 통해 외모 이야기 대신 서로의 취향, 관심사, 일상 등으로 인사를 갈음해보는 실천 방안을 약속문에 담았다.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신체 접촉은 하지 않는다는 항목도 모두 동의했지만 “오랜만이야” 하며 포옹하거나 손을 얹는 행동에는 논쟁이 있었다. 포옹과 악수가 친밀감의 표현일 수 있다는 일부 의견이 있었다.

특히 안전하고 평등한 뒤풀이 문화를 만든다는 항목은 몇 주에 걸쳐 찬반 토론을 했다. 뒤풀이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이 저마다 달랐다. 어떤 뒤풀이를 할지 구성원에게 묻고 함께 결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식사할 때 채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 말해달라고 하는데, 뒤풀이는 너무 당연하게 술자리로 여겼어요. 공적인 행사에서 못한 말을 나누고 구성원들이 더 친해지는 시간까지 차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도 아직 뒤풀이하면 어느 술집을 가야 할지 고민해요. (웃음) 하지만 이젠 다른 상상력이 필요한 때잖아요. 너무 당연하게 여긴 뒤풀이를 다시 고민해야 안전하고 평등한 뒤풀이를 만들 수 있는 걸요.”(푸우씨)

사월이 약속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약속문을 제안하는 글에 적힌 마지막 문단이다. “우리의 약속문을 각 단체, 조직, 진보정당이 채택한다고 하여 성평등을 침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약속문을 기초로 우리가 속한 조직 안에서 책임을 갖고 이런 대화와 학습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약속하고자 합니다.” 약속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약속문이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지 않으려면 약속문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돌아보는 게 중요해요. 아무리 높은 수준의 규칙과 약속이 있어도 절차로만 이뤄진다면 지속가능한 지역운동은 어려울지 몰라요.”(푸우씨)

<font size="4"><font color="#008ABD">절차보다 실천</font></font>

세 활동가는 지난해 11월15일 발표회를 열고 ‘평등한 지역사회를 위한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몇 개월의 토론 끝에 사월, 세진, 푸우씨 등 활동가 7~10명이 만든 약속문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다산인권센터, 수원환경운동연합, 수원이주민센터, 수원여성노동자회, 수원여성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변혁당 경기도당 등 참여 단체만 일곱 군데가 넘었다. 굳이 ‘준비운동’이라고 정한 건 약속문을 계기로 변화를 시작하자는 뜻이었다. 세진은 말했다. “평등한 지역운동에 대한 출발선을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커요. ‘평등한 지역운동’은 당위적 개념이니까요. 각 단체에 맞는 약속문을 만들다보면 언젠가 정말 평등한 지역운동이 되지 않을까요.”

수원=글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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