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마을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1968년 2월12일 한국군에게 죽임을 당한 민간인 74명의 이름이 새겨 있습니다. 한베평화재단은 폐회로텔레비전(CCTV)으로 위령비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영화관에서 애국가가 나온 뒤 상영된 국정 홍보 ‘대한늬우스’에 나온 참전 군인 아버지 영상은 국가가 기록했고 아들의 영상은 한베평화재단이 올해 여름에 찍었습니다. 국가기록과 사적 기록의 만남입니다. 지금은 도시 이름이 호찌민으로 바뀐 사이공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종군기자, 안병찬의 자료도 전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을 겪은 이들이 보관하던 물건들과 기록들은 11월4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성동구 성동문화회관 1층 소월아트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폐회 전날인 11월20일 오후 3시에는 한국·베트남·미국 참전 군인 세 명이 한자리에서 만납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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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비석을 중계하는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있다. CCTV는 감시 장비다. 비석 근처에서 제사나 공연 따위가 있거나 누군가 비석을 부수려 하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는 그저 돌비석을 찍을 뿐이다. 보통 감시카메라와 마찬가지로 하루 24시간을 기록한다. 비석이 선 곳은 한낱 한가로운 남국 농촌일 따름이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드물다. 카메라가 기록하는 영상에는 어떤 사건도, 사소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019년 8월14일. 촬영 장비는 아이폰XS 스마트폰, 장소는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마을이다. 그날 날씨는 뜨거웠고 섭씨 38도를 웃돌았다. 기온이 너무 높아서 촬영하는 동안 카메라에 우산을 씌워 온도를 낮춰야 했고 건전지가 뜨거워져 잠깐씩 촬영을 쉬어야 했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촬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무얼 찍느냐고 관심 갖고 묻는 이도 없고, 달리 방해하는 이도 없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촬영은 해 질 녘까지 계속됐다. 촬영 시간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룻낮 동안이었다.
카메라가 향한 곳 중심에는 비석이 서 있다. 시멘트로 벽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씌운 사각형 묘각이다. 얼핏 정자 같은 모양인데 비석은 그 안에 있다. 영상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비석 옆에 제법 잎새 풍성한 야유나무 한 그루가 오래도록 마을을 지켜보며 시름에 잠겨 있다.
비석 앞에는 베트남말로 ‘Bia Tưởng Niệm’이라고 비명을 써놓았다. ‘위령비’라는 뜻이다. 비석에는 74명 이름이 가지런히 박혀 있다. 그들은 한날한시에 죽었다. 이름이 없는 경우도 있다.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한 아기가 죽은 까닭이다. 퐁니마을은 260명이 사는 작은 동네다. 퐁넛마을에는 300명이 산다. 그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시골마을이었으니까.
1968년 2월12일 아침밥을 먹은 뒤 한국군이 머물다 지나갔고 마을 사람들은 쓰러졌다. 74명이 죽었고, 17명이 그 구렁텅이에서 살아나왔다. 유방이 잘린 스물한 살 여인 응우예티탄은 이튿날 죽었다. 그날 오후 미군이 마을에 들어왔고 ‘본’이라는 상병이 사진을 찍었다. 야유나무 아래 비석은 그렇게 들어섰다.
CCTV는 영상 감시 장비다. 위령비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고작 야유나무 한 그루뿐이다. 그럼에도 CCTV는 먼 베트남 농촌마을에서 서울로 영상을 전송한다. 여전히 CCTV는 아무것도 감시할 수 없고, 감시할 내용 또한 없다. CCTV가 감시하는 건 정작 비석도, 죽음도 아니다. 이 CCTV가 잠들지 않고 감시하려는 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망각이다.
<font size="2">*부제 ‘구수정 초상’은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가 20년 동안 해온 일은 ‘야만의 시간’, 곧 망각과 싸우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다.</font><font size="4"><font color="#008ABD">5. 극장에서 만난 아버지</font></font>
그해 아들은 아버지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극장에서 표를 받거나 영사기를 돌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두 형제와 말끔하게 양장을 차려입은 어머니는 손잡고 이 극장에서 저 극장으로 뛰어다녔다. 정작 영화는 보지 않았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상영하는 ‘대한늬우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거기 나왔다.
‘늬우스’가 끝나면 영화 상영 시간이 다른 극장으로 내달렸다. 아버지를 또 보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흰 손수건으로 닦았다. 동생은 아직 어렸다. 여섯 살 큰아들 상영은 눈물이 나오는 걸 힘들게 버텨내곤 했다. 늬우스는 금방 끝나버렸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극장에 내내 앉아 있고 싶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니 아부지 살아 계신다.” 그 말은 어떤 훈장보다 가슴 뜨겁게 모두를 안도케 했다. 아내와 두 아들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영상을 통해 지아비와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밀양 박씨 동녘 동 멀 원, 박동원. 함경도가 고향인 박동원은 맹호부대 1진으로 월남에 파병된 군인이었다. 정글을 헤매는 전투 중대장으로 계급은 대위였다. 보병 제1연대 제2대대 제5중대를 이끄는 책임자였던 박동원은 1965년부터 1년6개월 동안 전투에 참가했다. 경기고를 마친 뒤 육사에 들어가 14기로 임관한 박동원은 월남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전개된 맹호 5호 작전 띤빈전투의 영웅으로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 있다. 그가 참전한 또 다른 전투 비호 6호 작전의 영상 기록은 ‘대한뉴스 제556호-월남소식’(1966년 2월1일치)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 모자는 이 영상도 극장에서 보았을 게다.
박동원 대위는 공식적으로 한 번 사망했고, 한 번은 행방불명됐다. 한번은 전투에서 총을 맞고 들판에 쓰러져 있다가 무의식중에 물 냄새를 맡고 논으로 기어갔다. 긴 전투를 치른데다 피를 많이 흘려서 목이 너무 말랐다. 깨어보니 미군부대 야전병원 침대였다. 박동원의 전사 소식을 들은 건 서울에 살고 있던 동서였다. 그는 파월 전사자 명단에서 박동원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것을 아내에게 말했지만, 처형 식구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하루이틀 지났을 때 박동원이 생존했다는 소식이 왔다. 박동원을 기다리던 남은 세 식구는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월남전 이야기를 입시울(입술)에 올린 적이 없다. 죽을 위기에 처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전장터에 다녀온 군인들이 과장 섞어 말하던 무용담 따위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겪은 월남 이야기는 살림 때문에 부부가 다툴 때 겨우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 흔한 ‘귀국박스’도 챙겨오지 않은 남편을 아내가 타박하면 박동원은 전투를 마치고 복귀해서 피엑스(PX)에 가면 진열대가 비어 있어 무얼 사오지 못했다고 군색하게 둘러댔다.
이런 박동원을 정치군인들은 사상에 문제가 있는 장교로 분류했다.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이끄는 군대 내 사조직 칠성회(하나회 전신) 입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2·12 쿠데타 때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작전참모였다. 그는 며칠 동안 수경사에 감금돼야 했다. 그 뒤 내내 한직으로 돌다가 1987년 군을 떠났다. 박동원은 이런 고초도 아들에게 토로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죽을 때까지 폐질환을 앓았다. 월남에 파병되기 직전 전방 수색중대장으로 폭발물 제거 작전을 하던 중 폭탄이 터져 파편이 온몸에 박혔다. 갓 서른 살이었다. 그 몸으로 박동원은 월남에 갔고 폐에 들어 있는 쇠를 제거하지 못한 채 남은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의 몸 자체가 전쟁터였다. 아들은 50년째 묻고 있다. 어떻게 혼자만 그 기억을 갖고 살다 갔느냐고. 국가 영상으로는 한없이 자랑스러운 전투군인인데 왜 단 한 번도 그 전쟁에 대해 아들에게 말한 적이 없느냐고. 무엇이 아버지에게 그 긴 침묵을 강요했는지 이제라도 아들은 알고 싶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6. 인간 아카이브 -안병찬의 경우</font></font>
이탈리아산 휴대용 타자기 올리베티Olivetti DORA(70년대 생산)를 가장 먼저 기록해야 한다. 타자기는 문자 기록과 전파를 위해 태어난 연장이다. 그가 이 영자 타자기를 구입한 건 1975년이었다. 타자기를 사용한 곳은 베트남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휴대용 한글 타자기가 개발되기 전이어서 그는 이탈리아 타자기로 한글을 로마자화하여 쳐 넣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 특파원들은 이런 방법으로 기사를 작성하여 텔레타이프로 송고하였다. 사이공saigong이나 전쟁jeonjaeng은 물론 사랑sarang도, 눈물nunmool도 순 한글 영어였다. 얼마 전에는 44년이 지나 말라버린 이 타자기 테이프에 잉크를 묻혀 ‘ARCHIVE’라는 글자를 찍어보았다.
두 번째로 기록해야 하는 건 눈으로 본 피사체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장비인 카메라다. 그가 사용하던 캐논 AE-1은 지금이라도 취재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 전장을 내달릴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싱싱하다.
표준렌즈라고 부르는 50㎜ F1.4와 135㎜ F3.5 망원렌즈는 가죽 케이스까지 살아있다. 사진을 연속으로 찍어대는 모터드라이브는 건전지만 넣으면 현재도 자동으로 돌아간다. 사이공에서 구입해서 ‘VIETNAM’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필름 보관통, 필름을 들여다보면서 내용을 확인하는 돋보기 루뻬(Loupe)까지 일습이 그의 지시를 기다리면서 상시 대기하고 있다.
방금 메모를 끝낸 듯한 취재수첩은 긴박한 숨결을 아직 몰아쉬고 있다. 이 밖에도 그는 몇 십 가지나 되는 그날을 증언할 수 있는 물건을 지켜오고 있다. 그날이란 1975년 4월 30일이다. 물건 주인은 안병찬이다. 그는 한국인 기자로는 유일하게 남베트남 최후를 지켜보았다. 당시 표현으로는 이른바 ‘월남패망’이다. 한국일보 사회부 사건기자 출신인 안병찬은 사이공에 급파되어 38일 동안 사이공을 중심으로 절명해가는 남베트남 상황을 기록하고 찍고 기사를 송고했다. 그는 그날 4월 30일 새벽 4시 10분에 미국 대사관 경내 앞마당에 내려앉은 여덟 번째 치누크 헬리콥터를 타고 마지막으로 사이공을 공중탈출했다. 치누크가 그를 부려놓은 곳은 남중국해에 전개하여 대기하고 있던 미해군 7함대 소속 상륙운반 도크선 덴버호 갑판이었다. 5일 항해 끝에 필리핀 수빅 만 미해군 기지에 기착한 뒤 이어서 5시간 비행 끝에 안병찬이 발을 딛은 곳은 미국령 괌이었다. 괌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한국일보 본사에 전화로 송고한 기사 제목은 ‘사이공 최후의 새벽 나는 보았다’(1975년 5월6일자 한국일보 1면)였다.
그는 지금껏 당시 사용했던 물건이나 작은 표식 하나까지 빠짐없이 보관하고 있다. 안병찬은 그날을 보았고 오늘 우리는 그날을 본 그와 그의 물건들을 보고 있다. 이것이 살아있는 아카이브다.
인간 아카이브 안병찬 목록을 글로나마 더 읽어보자. 맹호부대에서 받은 발목 위부터 초록색 헝겊을 붙인 정글화는 사이공에서 묻힌 흙먼지를 털어내면 금방 걸어갈 듯한 기세다. 베트남에서 탔던 뚜껑 없는 무개 지프 차량 EP.5302호의 열쇠와 면허증(1974년 9월 3일 발행)을 넣어둔 투명 비닐 파우치, 실제 사용했던 지프 EP.5302호의 등록증, 차량을 지원한 한국인 회사 그랜드 퍼시픽의 차량목록, 베트남공화국 대중선전선동과 회유부에서 발행한 젊은 안병찬 사진이 붙어 있는 기자(주민)증, 미군이 괌에 설치한 타무닝 난민캠프 수용소에서 팔목에 차야 했던 일련번호 ‘15111’이 찍혀 있는 팔찌는 기자인 안병찬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경로를 거쳐 귀환했는지를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안병찬에게 그날은 이미 오래된 과거이고 세계사적으로는 월남패망, 혹은 베트남 통일이라는 역사이지만 이 물건들은 생생하게 숨 쉬고 있는 현재다. 몇몇 물건이 있을 때는 재구성을 위한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안병찬 자료들은 그대로 다시 일으켜 세워 맞춰주기만 하면 과거가 곧장 현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기록의 힘이다.
안병찬은 전쟁을 기록하는 기자였다.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그의 물건들은 진작부터 그를 증언하고 또 기록해왔다. 한낱 물건들이 마침내 기록자인 기자를 기록하기에 이른 것이다. 취재수첩 어딘가에는 빠른 볼펜 글씨로 이렇게 써있다. ‘다 끝났다. 미련 없다. 월남 끝났다.’ 그 자료들은 다시 말하고 있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날을 말하는 기록이 여기 살아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우리가 안병찬이다.’ 기록은 어떤 인생보다 길다. 국가는 패망할 수 있을지라도 기록은 패망하지 않는다. 인간 아카이브 안병찬의 경우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과거 안병찬이 기자의 표상이었다면 지금 안병찬은 인간 아카이브의 표상이다.
<font size="2">한베평화재단 후원 계좌 우리은행 1005-603-308131 문의 02-2295-2016</fon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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