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콜트악기(PT콜트 인도네시아) 공장 노동자를 만나고 싶다는 건 오랜 바람이었다. ‘내가 일할 공장을 되돌려받아야 한다’는 생각만은 아니었다. 세계화된 자본은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노동자가 함께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콜트공장에서 페인트칠을 하던 황경수씨가 2013년 직업병인 모세기관지염으로 세상을 떠난 뒤 이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어느 나라에 있든, 비용을 줄이기 위한 자본의 노동 탄압은 견제가 없으면 무자비하다. 이런 공감대 속에 인도네시아 노동자와 함께 콜트 자본에 맞설 새로운 힘을 얻고 싶었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도 견제 눈빛콜트는 인도네시아, 중국 등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며 2007년 한국 공장 문을 닫았다. 부당해고에 맞선 콜트·콜텍 노동자 싸움도 시작됐다. 많은 숙제를 던지며 달려왔다. 더 싼 노동 비용을 찾아 국외로 떠나는 자본을 노동자가 막아낼 수 있는가. 그렇게 사라진 공장과 버려진 노동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법원과 정부는 노동자 편이 될 수 있을까. 예술을 빚는 도구가 공정한 노동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더는 의미 없는 것일까. 이런 숙제 앞에 노동조합과 예술가가 힘을 합쳐 싸웠다. 회사에서, 법원에서, 국회에서, 광장에서 집회하고 단식하고 공연했다.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공장은 없고 우리는 부당해고 노동자다.
그렇게 13년을 지내오는 동안 정작 콜트 공장이 있는 인도네시아에 다녀올 기회가 없었다. “원정투쟁을 해봐야 크게 얻을 것 없다”는 부정적 반응이 많았다. 그래도 가고 싶었다. ‘나 혼자라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6월16일 ‘나 홀로 원정투쟁’을 생각하던 중에 다행히 오랫동안 콜트·콜텍 투쟁을 도운 장창원 목사가 동행을 자처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국제연대를 활발히 하는 현지 노동조합인 민중노동조합(세르복 노조), 노동·인권 변호사 단체 LBH와도 연결됐다. 이들 도움으로 6월16일 저녁 콜트 공장이 있는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습하고 더운 공기를 가르며 오토바이 수천 대가 달렸다. 퇴근하는 노동자들이다. 포장마차도 불을 밝혔다. 한국의 1970년대쯤을 떠올리게 하는 거리 풍경은 정겹고 또 먹먹했다. LBH는 콜트악기 공장에 면담을 요청해둔 상태라고 했다.
6월17일 LBH 사무장 알렉스네 집에서 수라바야의 여러 단위 노동조합 위원장들을 만났다. 반응이 신통찮다. 무엇보다 ‘잘사는 나라 노동자가 한국 공장 가동을 요구하며 우리 일자리를 뺏으러 온 것 아니냐’는 불신의 눈빛이 감지됐다. 설득하고 싶었다.
“한국 경제 부러워하지 마세요. 거기에도 수많은 노동자의 피눈물이 있습니다. 한국 노동자와 인도네시아 노동자가 함께하면 그런 헛짓은 못할 것입니다.” 입을 뗐지만 마음 한켠이 무거웠다.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을까. 어떻게 먼저 다가가야 이들 마음을 열 수 있을까.
6월18일 회사에 면담 요청 답변 시한을 목요일(20일)로 박아뒀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자니 갑갑했다. 기타 하나 메고 무작정 콜트 공장으로 갔다. 정문 앞에 자리 깔고 노래를 불렀다. 을 부르고 를 부를 즈음 공장 경비들이 몰려왔다. 그럴수록 괜히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 “저, 모르시겠어요?”
한국 콜트 공장에 있던 관리자다. 누구랑 온 것인지, 얼마나 있을지 묻는다. “한국 사람 문제이니 한국 사람끼리 해결하자”고 했다. 이어 “따로 인도네시아 현지 법인장과 자리를 주선하겠다”고도 제안했다. 공식적으로, 세르복 노조나 LBH와 같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함께하러 온 투쟁이기 때문이다. “LBH가 공문을 넣어뒀으니 답신이나 빨리 달라”고 말하고 개인 면담은 거부했다.
6월19일 수라바야 법원 앞에서 어느 구속 노동자가 석방되기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 노동자도 연대한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 법원 앞에 가서 노래를 시작하자 주변으로 현지 경찰이 쫙 깔렸다. 경찰 무리 속으로 들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장난스레 경찰의 호응도 유도했다. 의외로 몇몇 경찰은 웃으면서 박수를 친다.
모인 노동자들 틈에 콜트 공장 노동자도 보였다. 반가워서 같이 식사하자고 했더니 “지금은 어렵고 상부조직과 회의해서 초빙하고 싶다”고 했다. 무척 기뻤다. 그 뒤, 따로 연락은 없었다.
6월20일 세르복 노조, LBH 변호사들과 콜트 공장에 갔다.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공장에 들어서는 기분이 묘했다. 도착하자마자 6개 건물에서 경비들이 몰려나온다. “돌아가라. 그런 연락 받은 적 없다.” 막아선다.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경비와 밀고 당기다가 체념했다. 세르복 노조 카미드가 대신 한국 콜트 노동자와 연대를 선언하는 메시지를 읽었다. “오늘 우리는 13년 동안이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국의 콜트악기 동지들과 연대합니다….” 선언문 낭독이 끝났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6월21일 도와준 사람들과 밥을 먹고, 인사하고, 짐을 정리한 뒤 숙소 침대에 앉았다. 공장에 들어가보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콜트 공장 노동자들과 연대를 도모하지도 못했다. 환영받지 못한 원정투쟁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목이 메고, 이러고 있는 나 자신이 싫어진다.
그래도 함께 싸우고 싶다마치 돈키호테처럼, 좌충우돌하는 시간이었다. 돌아보면 콜트 싸움 13년도 늘 비슷한 도전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눈앞에 실패가 자명하고 당장 현실적이지 못한 목소리라도, 누군가는 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를 던져야만 했다. 콜트 노동자는 아직 싸우고 있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과도 같이 싸우고 싶다. 그 목소리를 우리와 실은 같은 모습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웃고, 우는 열대의 땅에 처음 새겼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로가 됐다.
방종운 민주노총 금속노조 콜트악기 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