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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함께 주사위 굴려보아요

아이들과 함께 해본 아동 장애 인식 개선 게임 ‘굿투고’
등록 2019-04-18 10:58 수정 2020-05-03 04:29
장애에 대한 편견을 지우고, '함께 가자'는 뜻으로 만든 보드게임 '굿투고'를 아이들이 하고 있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지우고, '함께 가자'는 뜻으로 만든 보드게임 '굿투고'를 아이들이 하고 있다.

검정 주사위를 굴리자 4가 나왔다. 노란 말이 게임판의 ‘Good’(굿) 자리에 도착했다. 현호(11)가 주황색 굿 카드를 들고 하나(12)에게 질문했다. “지나가는 안내견이 귀엽고 대견해서 쓰다듬어준다, 굿(Good)이게 노굿(No good)이게?”

“노굿이지. 안내견은 만지면 안 된다고 학교에서 배웠어.” 하나가 정답을 말하자, 옆에서 게임을 지켜보던 김귀연(64)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안내견을 만지면 안 되는 거야?” 현호가 카드에 적힌 팁을 읽었다. ‘안내견을 주인의 허락 없이 만지면 안내견이 집중을 하지 못해 위험할 수 있다.’ 지난 차례에서 ‘청각장애 체험’이 걸려 말을 할 수 없는 현진(6)이가 빨리 다음 게임을 하라는 듯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게임 칸칸마다 ‘함께, 가기, 좋다’

하나와 현호, 현진이가 하는 보드게임은 조금은 특별하고 따뜻한 게임이다. 게임의 이름은 ‘굿투고’(Good to go),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해 만든 게임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가기 좋다’는 뜻이다. 진행 방식은 블루마블 게임과 비슷하다. 참가자 4명이 돌아가며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수만큼 말을 이동해, 도착한 칸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 지시는 굿(good), 고(go), 미션(mission), 위드(with) 네 가지가 있다. ‘함께, 가기, 좋다’는 뜻이 게임판 칸칸에 녹아 있다. ‘굿’ 칸에선 지체·지적·시각·청각 등 장애 유형에 관한 인식 퀴즈를 맞히고, ‘고’ 칸에서 장애를 잠깐이나마 겪어보고, ‘미션’ 칸에서 각 장애의 유형을 학습하면 점자, 휠체어 등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언어장애인이 말하는 것이 힘들어 보이면 중간에 나서서 요약 정리를 해준다’ 같은 장애 퀴즈에 굿이나 노굿으로 답하게 하거나, 시각장애를 느껴본다는 의미로 눈을 감고 주사위를 던져 촉감만으로 주사위 숫자를 맞히고, 눈을 감은 상태로 다음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점자’ 아이템을 얻는 식이다. 이렇게 얻은 아이템은 보드게임판 곳곳에 있는 ‘위드’ 칸에서 장애인을 돕는 데 쓰이고. 장애인을 돕는 데 쓴 아이템은 트로피로 교환할 수 있다. 이때 게임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모은 참가자가 우승한다. 이 게임은 지난 3월 중순께 텀블벅 사이트에서 펀딩이 진행돼 목표 금액 400만원을 넘겼다.

지난 차례에 ‘고’ 칸에서 청각장애 체험이 걸려 말을 못하던 현진이가 다시 주사위를 굴릴 차례가 돌아와 말할 수 있게 되자 “어휴, 되게 답답하네”라며 토해내듯 말했다. 하지만 또다시 ‘고’ 칸. 장애 체험을 해야 했다. 현진이가 이번에 겪을 장애는 ‘지체장애’. 지체장애인들이 자유롭게 몸을 쓸 수 없는 불편함을 잠깐 겪어보는 것이다. 필기구를 입에 물고 종이에 자기 이름을 적고, 다음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고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지체장애를 체험하는 참가자는 주사위를 굴리기 어려우니 다른 참가자들이 도와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협력과 배려를 배울 수 있다.

현진이가 입에 볼펜을 물고 바닥에 놓인 종이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숙여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현진’ 이름 세 글자 중 ‘이현’ 두 자까지만 쓰고 현진이는 “힘들어. 못 쓰겠어”라고 고개를 들고 허리를 폈다. 하나가 “안 돼. 다 써야지. 안 그럼 아이템 못 얻어”라고 말했다. 현진이가 ‘이현진’ 세 글자를 쓰는 데 2분 넘게 걸렸다. 입으로 쓰니 글자가 얼기설기, 알아보기 힘들었다. 현호가 “대체 뭐라고 쓴 거야”라고 말하며 웃었다. 점자 두 개 아이템을 가지고 있던 하나가 가장 먼저 트로피를 얻었다.

이 게임은 고정욱 동화작가가 2012년에 낸 동화책 를 기본으로 진로교육 전문기업 캠퍼스 멘토 산하에 있는 즐거운교실문화연구소와 고 작가가 함께 만들었다. 는 철봉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철민이가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같은 반 장애인 친구 유리를 이해하게 되는 내용으로 시작해 각 장애 유형을 동화로 그려냈다. 기획의 초점은 다리를 다치면서 장애인을 이해하게 된 철민이에게 맞췄다.

장애인인 고정욱 작가의 책을 바탕으로

게임을 기획한 이민재 즐거운교실문화연구소 소장은 “아는 만큼 이해하게 된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이해하려면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게임을 통해 장애에 대해 즐겁게 알고 다가가되, 장애인을 희화화하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 아이러니한 게 재미있을수록 교육 효과가 떨어져서, 게임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만 균형을 맞췄다”고 말했다. ‘장애를 어둡지 않게 그리고 싶다’는 기획 의도답게 게임판은 노란·초록·파랑 등 밝은 원색을 썼다. ‘굿투고’ 로고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했다. 게임판 뒷면엔 게임을 시작하기 전 ‘장애인을 도와본 적이 있나요?’, 게임을 마친 뒤엔 ‘보드게임을 하고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같은 질문을 던져 게임으로만 끝나지 않고 장애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보도록 했다.

고 작가는 “아동을 대상으로 하면서 장애 유형을 교육 차원에서 넣어 만든 게임은 세계 최초이지 않을까 싶다. 게임엔 장애 유형 15가지가 있는데, 외우지 않고 잊어버려도 좋다. 그저 한번 읽고 그런 장애가 있다는 것만 알아도 된다. 재미를 통해 배우면 평생 가는데, 이 게임이 장애가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도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게임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장애에 대해 잘 모르는 성인들도 재미있게 할 수 있다. 게임을 옆에서 지켜보던 세 아이의 할머니 김씨는 “아, 이거 재미있네!” 하며 종종 훈수를 두며 게임에 참여했다가 아이들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김씨는 현진이가 볼펜을 물고 이름을 쓰던 지체장애 체험을 따라 해보고는 “정말 쉽지 않네”라고 말했다.

“수어로 내 이름 알려주고 싶어요“

게임은 트로피를 3개 얻은 현진이가 이겼다. 현호는 아이템을 12개나 모으고도 위드 칸이 걸리지 못해 트로피를 한 개밖에 못 얻어 아쉬워했다. 게임을 마친 뒤 현진이는 “눈 감고 게임을 하니까 이상하고 불편했어요. (앞이) 안 보이면 밖에 나갈 때 무서울 것 같아요. (앞으로 시각장애인을 보면) 도와줄래요. 게임이 재미있었어요”라며 ‘굿투고’를 달라고 했다. 이번 게임으로 자신의 이름을 수어로 쓸 수 있게 된 하나는 “보드게임을 하면서 장애인들의 불편한 점을 더 알 수 있었고, 앞으로 청각장애인을 만나면 수어로 내 이름을 알려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글·사진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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