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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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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채용일까 해고 경쟁일까

정부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발표 후 입사해 고용승계 안 된 비정규직

일하며 밤새워 신규 채용 필기·면접 준비해도 10명 중 3~4명은 떨어져
등록 2019-03-27 00:06 수정 2020-05-03 04:29

김상호(가명)씨는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이하 철도공사)의 하청업체에서 승강장 안전문(스크린도어)을 정비하는 노동자다. 김씨의 일자리는 6월 말부터 철도공사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김씨는 해고될 위험에 처했다. 철도공사가 기존 하청업체 직원들을 고용 승계하는 대신 정규직 신규 채용(173명)을 하고 있어서다. 김씨에게 정규직 전환 정책은 희망보다 절망으로 다가온다.

입사 시점으로 희비 엇갈려
김씨와 같은 상황에 처한 승강장 안전문 정비노동자는 철도공사 4개 하청업체 195명에 이른다. 이들은 2017년 7월20일 이후 입사자다. 철도공사는 정부가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날짜를 기준으로 정규직 전환 여부를 갈랐다. 2017년 7월20일 이전 입사자 118명은 정규직으로 전환됐지만 그 뒤에 입사한 195명은 일반인과 경쟁해야 한다. 철도공사는 “정부 지침을 따랐다”며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정부 지침은 ‘발표 시점’ 당시 일하던 노동자를 전환 채용 대상자로 삼는다.

2018년 12월 한국철도공사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승강장 안전문(스크린도어) 정비 업무를 하고 있다. 한국철도공사 하청업체 노동자 제공

2018년 12월 한국철도공사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승강장 안전문(스크린도어) 정비 업무를 하고 있다. 한국철도공사 하청업체 노동자 제공

김씨와 동료들은 신규 채용에도 응할 계획이지만 걱정이 앞선다. 당장 4월부터 필기시험과 면접, 인성평가 등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 하청 직원에 대한 가산점은 없다. 3조2교대로 24시간씩 밤샘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하고 있다. 김씨는 3월12일 신규 채용 공고가 떴을 때 ‘최저임금 받으며 묵묵히 일해왔는데 단물만 빨아먹고 사람을 소모품 쓰듯이 버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성식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국장은 “현장에서 일 잘하던 사람 대신 시험 잘 보는 사람을 뽑는다는 게 당사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며 “정부가 취업준비생과 기존 정규직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2017년 7월20일 정규직 전환을 발표하면서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신규 채용을 멈췄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바로 정규직으로 뽑았다면 지금 같은 대규모 해고 우려를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1만 명 모두 정규직 전환하겠다”고 해놓고선

인천공항도 비슷한 상황이다. 인천공항공사(이하 공항공사)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직원 1만여 명 중 일부는 정규직화 과정에서 ‘경쟁 채용’을 거쳐야 한다. 2017년 5월12일 이후 입사자 3천여 명(민주노총 추산)이 그 대상이다. 2017년 5월12일은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방문해 “임기 중에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고 정일영 공사 사장이 “공항 가족 1만 명 모두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겠다”고 화답한 날이다.

이날이 기준일이 된 것은 ‘채용 비리’를 우려해서다. 정규직 전환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비리를 저질러 공항공사 하청업체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2018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이 만든 프레임이다. 자유한국당은 서울교통공사에서 정규직 전환된 직원 1285명 중 108명(8.4%)이 기존 직원의 친인척이라며 정규직 전환 과정이 채용 비리의 온상이라고 비판했다. 등 보수언론들도 ‘특혜’ ‘고용 세습’ 등의 표현을 써가며 보도했다. 실제로는 정규직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입사한 사람이 34명 포함돼 있는 등 다소 무리한 주장이었지만 영향력은 컸다.

그 여파로 공항공사와 한국노총 소속 4개 노조(정규직 1개, 비정규직 3개)는 2018년 12월26일 경쟁 채용을 일부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비정규직 노조)는 “기존 노사 합의를 뒤엎었다”며 다음날부터 천막농성을 시작해 3월21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항공사 하청업체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노유진(64)씨는 채용 비리가 말이 안 된다고 웃었다. “밤잠 안 자고 공부해서 청소할 거예요?” 노씨는 인천공항에서 쓰레기통 분리수거와 화장실 청소 일을 맡고 있다. 그의 동료들은 대부분 40~60대 여성이다. 가장 젊은 사람이 38살이다.

지난 2월18일 인천공항 하청업체 소속 환경미화 노동자 노유진씨가 인천공항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지난 2월18일 인천공항 하청업체 소속 환경미화 노동자 노유진씨가 인천공항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노씨는 최저임금을 받고 매일 7시간30분씩 일한다. 외국 여행 성수기인 주말과 명절은 더 바쁘다. 일주일에 6일씩 출근하는 노씨는 ‘주5일제 쟁취’를 위해 투쟁조끼를 입고 일한다. 기자는 2월18일 반나절 동안 노씨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계속 허리를 굽혀 쓰레기를 꺼내고 쓰레기통을 닦느라 반팔 차림인데도 땀을 흘렸다. “남들은 우리가 벌써 다 정규직이 된 줄 알아요.”

노씨는 2017년 5월12일 이전 입사자라 경쟁 채용 대상자가 아니지만, 그의 동료 수백 명은 시험을 봐야 한다. 인천공항에서 일하는 보안검색요원, 특수경비요원 등도 마찬가지다. 신철 인천공항지부 정책기획국장은 “경쟁 채용은 해고 위협이다. 채용 비리는 사법 당국이 밝혀야지 경쟁 채용으로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다. 경쟁 채용 과정에서 비정규직 다수 노조인 민주노총의 힘을 빼려는 게 아닌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공항공사는 “정부 지침을 따랐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장기호 한국노총 인천공항공사노조(정규직 노조) 위원장은 “채용 비리에 국민이 공분을 느꼈고 투명한 채용 절차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다만 환경미화 등 청년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아닌 부분까지 경쟁 채용을 하는 게 타당하냐는 의문에도 일리가 있다. 앞으로 열릴 3기 노사전(노동자·사용자·전문가) 협의회에서 구체적인 사안을 다룰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공항공사 소방대원 35%는 경쟁 채용서 탈락

이미 많은 공공부문 비정규직들이 ‘정규직 경쟁 채용’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한국공항공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 한국공항공사 자회사와 하청업체 소속 소방대원들이 경쟁 채용으로 ‘정규직 전환’되는 과정에서 사실상 대규모 해고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공항공사 노조 관계자는 “경쟁 채용에 응시한 소방대원 232명 중 82명(35%)이 떨어졌다”고 밝혔다.

한국정보화진흥원 산하 손말이음센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손말이음센터는 청각장애인들의 수어(의사전달을 위한 손짓·몸짓)를 말로 통역하는 곳이다. ‘수어-언어 통역사’인 중계사들은 민간 위탁업체인 케이티씨에스(KTcs) 소속으로 있다가 2018년 12월 한국정보화진흥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그런데 경쟁 채용에서 기존 중계사 29명 가운데 11명(38%)이 탈락했다. 중계사들의 반발 끝에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추가 채용 절차를 밟았지만 탈락한 11명 중 2명밖에 재입사되지 않았다.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의 주장처럼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 과정에 일부 채용 비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국민권익위원회 등이 2019년 2월20일 발표한 ‘공공기관 채용실태 정기 전수조사 결과 및 개선 대책’을 보면 총 182건의 채용 비리가 적발됐다. 공공기관·지방공공기관·기타공직유관단체 1205개 기관의 신규 채용(2017년 10월~2018년 10월)과 정규직 전환(2014년 1월~2018년 10월) 인원을 조사한 결과다. 적발 건수를 보면 신규 채용 158건(87%), 정규직 전환 24건(13%)이다. 신규 채용과 정규직 전환 인원을 밝히지 않아 구체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도 채용 비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의역 김군ʼ의 일 하려고 비리를 저지른다고?

하지만 모든 정규직 전환에 채용 비리가 있을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부적절하다. 강원랜드, 우리은행, KT 등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채용 비리 사건을 되돌아보자. 대기업(또는 공공기관)·정규직·사무직(또는 전문직)·고연봉 일자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2월20일 발표된 채용 비리 조사 결과에서도 정부가 수사 의뢰한 대상 36건 중 19건(52.7%)이 의료·문화예술·체육 분야 전문직이었다.

핵심은 ‘비리를 써서라도 들어가고 싶은 일자리’인지 여부다. 승강장 안전문 정비사나 환경미화원처럼 최저임금을 받는 기술직·단순노무직 노동자가 엉뚱하게 채용 비리 유탄을 맞고 대규모로 해고될 위협에 처했다. 철도공사 하청업체 직원 김씨가 하는 일은 2016년 5월28일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숨진 19살 김군이 했던 일과 똑같다. “솔직히 사무직이나 관리직은 채용 비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공구 들고 현장에서 뛰면서 작업해요. 기름칠하다 옷이 더러워지고 기차에 치여 다칠 수도 있어요. 구의역 김군이 하던 일이 비리를 써서라도 들어가고 싶은 일자리인가요?”

김혜진 활동가는 “공공부문 일자리가 특권·특혜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근본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채용 비리를 없앤다며 엉뚱한 데다 경쟁 채용을 도입할 게 아니라 다른 일자리의 불안정성을 어떻게 없앨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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